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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마태오 복음서: 하느님과 상대하시오 - 엄격한 윤리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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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1,868 추천수0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태오 복음서] 하느님과 상대하시오 : 엄격한 윤리 기준

 

 

몇 년 전 버스 정류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환경미화원이 정류장에 설치된 쓰레기통을 비우다가 그 내용물을 모두 땅에 쏟고 말았다. 순간 한숨을 쉬며 난감해하던 그분은 다시 흩어진 쓰레기들을 주워담기 시작했다. 승객 대부분이 흩어진 쓰레기들을 피해 가며 버스를 타는데, 갑자기 어느 중년남이 나서서 쓰레기를 같이 줍기 시작했다. 담배꽁초, 가래침 묻은 휴지 등 보기에도 더러운 것들을 맨손으로 부지런히 집어 옮기니 금세 정류장이 깨끗해졌고 환경미화원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버스가 도착하자 그는 표표히 사라졌다.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을 요구하셨다. 행동이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예수님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을까? ‘산상설교’에 그 답이 있다. 어떤 말씀이든 주제별로 정리하는 작업을 즐겼던 마태오 복음사가는 ‘산상설교’(5-7장)에서 예수님이 알려 주신 윤리 목록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 그래서 산상설교의 전체 주제를 ‘하느님 나라의 윤리’라 부른다. ‘산상설교’에는 실로 많은 가르침이 나온다. 행복 선언부터 교회의 역할, 대립명제, 자선, 단식, 기도, 주님의 기도, 재물, 그리고 황금률에 이르기까지 모두 금쪽같은 내용이다. 그중에서 ‘하느님 나라의 윤리’가 갖는 성격을 잘 밝혀 놓은 곳은 ‘대립명제’(5,21-48)이다.

 

어떤 중년남이 있었다. 그는 퇴근 후에 집에 돌아오면 씻고 식사를 한 후 곧바로 소파로 간다. 소파에 누워 리모컨을 이리저리 작동하다 먼저 뉴스를 선택한다. 뉴스가 끝나면 다시 채널을 돌리다 자칭 정치평론가들의 험담이 오가는 종편에 잠시 머무른다. 그것도 지루해지면 쇼 프로그램으로 이동해서 소녀시대가 춤추며 노래하는 장면을 열심히 들여다본다. 무려 다리가 16개나 등장해 현란하게 움직여 대니 눈을 뗄 도리가 없다. 매일 그런 식으로 살아가던 그는 어느 날 자신이 이상하게 변해 있음을 발견한다. 젊은 여성이 지나가면, 어디서든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그 여성의 다리에 눈이 가는 것이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 5,27-30).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느님의 눈은 속일 수 없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십계명 중 하나이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이르신’ 그 계명에 대해 예수님은,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한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조차 자유자재로 재해석할 수 있는 전권(全權)을 가진 분이라는 엄청난 자의식이 돋보인다. 그러더니 덧붙이는 말씀이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면 간음한 것과 마찬가지란다. ‘음욕을 품고 바라본다’는 표

현만 보면 추악한 속셈을 가진 눈길이 떠오르지만, 그리스어 성경 원문에 나오는 동사 ‘에피튜메오’는 그저 호기심 어린 눈길을 의미한다. 어느 여성에게 ‘몸매가 좋으시네’, 혹은 요즘 식으로 말해 ‘착한 몸매네’라는 눈길을 던지는 정도다.

 

예수님 말씀을 처음 들은 이들은 필시 이해가 불가능했을 터다. 가벼운 눈길 한 번이 범죄에 해당하는 ‘간음’으로 간주된다면 난감한 노릇 아닌가. 사람들의 당황한 눈빛을 의식해서인지, 예수님은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든다. 오른 눈이 죄를 지으면 차라리 그 눈을 빼어 던지라고 한다. 이해를 돕는 게 아니라 이해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예다. 소녀시대를 보고 ‘참으로 체격 조건이 남다른 처자들이구먼’이라는 생각만 해도 눈알을 빼라는 뜻 아닌가? 이를 곧이곧대로 따른다면 가톨릭 남성 교우 중 과연 몇 분이나 성한 눈을 갖고 있을지 걱정된다. 여성 근처라도 가면 죄를 지을까 봐 어머니마저 멀리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에 나오는 신부님이라면 모를까. 상황이 이 정도라면, 예수님의 윤리를 가히 ‘극단적’이라 불러야 옳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시는 분이 인간의 나약함을 무시하셨을 리는 없다. 이런 때는 별수 없이 말씀의 행간을 읽어내야 한다.

 

두 번째 중년남은 아마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내가 비록 TV에 빠져 이 지경에 이르렀지만 언젠가는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고야 말겠다. 성을 상품화하는 언론이 문제다.’ 그리고 옆구리에서 또 하나 올라오는 생각은, ‘설혹 내 눈길이 지나가는 여성의 다리에 머물며 잠시 못된 생각을 했기로서니 다른 사람들이 내 생각까지 어찌 알랴. 아마 신부님 중에도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을걸?’ 하지만 그의 판단은 틀렸다. 사람 눈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느님의 눈은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문자로 된 율법을 넘어서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제부터 문자로 된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과 직접 상대하라고 말씀하신다.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하느님의 관찰 아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간다.

 

돈 십억 엔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자존심을 팔아 놓고는 한국 외교의 승리라고 떠벌린다. 그러더니 겁이 났는지 정작 협정을 맺은 외무부 장관이 아니라 차관을 보내 할머니들을 위로했다. 하늘이 무섭지 않은가! 어른들의 잘못으로 수많은 어린 생명이 억울하게 수장당했고, 몇 명은 아직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한 상태다. 그런데 지금은 나라의 미래를 걱정할 때라며 서둘러 덮으려고만 한다. 아직도 물속에 있을 어린 생명의 울부짖음을 듣지 못한다는 말인가? 차라리 그 사람들의 눈을 빼고 손을 자르는 게 나을지 모르겠다.

 

하느님 나라의 윤리는 엄격하기 짝이 없다. 하느님과 직접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변명이나 어떤 자기 합리화도 하느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행동은 계명 이전의 것이다. 간음을 하려면 먼저 눈에 음욕이 담겨야 하고, 음욕이 눈에 담기려면 추악한 흑심이 발동해야 하고, 흑심이 발동하려면 마음에서 잠시 하느님을 제쳐 두어야 한다.

 

누구에게도 요구받지 않고 법적인 제재도 받지 않는 상황에서 발 벗고 환경미화원을 도운 첫 번째 중년남은 하느님과 직접 상대했던 사람이다. 그는 좋은 선택을 했다.

 

* 박태식 신부는 대한성공회 소속으로 월간 <에세이>로 등단, 월간 <춤>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입문했고, 현재 서강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성공회대학교에 출강하며, 대한성공회 장애인 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으로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6월호(통권 483호), 박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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