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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마르코 복음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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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2,306 추천수0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르코 복음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지난 호에서 마르코 복음의 시작이 왜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건이었는지 설명했다. 또한 요한의 투옥(1,14)을 기점 삼아 시대를 구분하려는 마르코의 의도가 있었음도 지적했다. 그렇게 마르코는 예수님을 새 시대를 여는 인물로 간주했고, 그에 걸맞게 여러 가지 가르침을 복음서에 개진했다. 앞으로 한 가지씩 살펴보겠지만 ‘하느님 나라’, ‘십자가의 역설’, ‘사랑의 계명’, ‘하느님의 아들’, ‘고난받는 인자’, ‘복음’ 등, 하나같이 향후 그리스도교 2천년 역사의 이정표가 되는 신학 개념들이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14-15).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제일성(第一聲)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었다. 이곳 외에 하느님 나라를 직접 언급한 곳이 또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9,1).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13,28-30).

 

이 구절들은 모두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임박했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하느님 나라’의 본격적인 성격은 비유를 통해 드러난다.

 

마르코는 하느님 나라의 비유들만 모아 집중적으로 4장에 배치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4,1-20), 등불의 비유(4,21-25),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4,26-29), 겨자씨의 비유(4,30-32), 깨어 있음에 대한 비유(13,32-37)가 있다. 예수님이 알려 준 하느님 나라의 비유는 사실 너무 평범해서 누군가 그 속뜻을 친절하게 알려 주지 않으면 난감한 지경에 이르고 만다. 그런 까닭에 라틴 교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De Civitate Dei)을 썼고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을 집필했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책을 읽어 보시기 바란다. 그 방대함에 기가 딱 막힐 것이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엄청난 잠재력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비유들의 특징을 꼽아 보겠다. 우선 씨를 뿌리면 수확하는 날이 있고, 큰 나무로 자라고, 열매를 맺고, 등불을 등경에 얹으면 방이 환해진다. 아무리 멀리 갔던 주인이라도 반드시 돌아온다. 말하자면 하느님 나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그런데 비유를 자세히 보면 시작은 그저 그렇다 치더라도 끝은 평범하지 않다. 나쁜 땅에 뿌려진 씨앗들은 스스로 죽어 없어지지만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들은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수확 때에 낫을 대면 반드시 낟알과 쭉정이는 운명이 갈릴 테고, 큰 나무로 자라지 못하면 도끼로 쳐버려 불쏘시개를 면치 못할 것이다. 또한 등불이 어둠을 밝히면 몰래 감춰둔 것도 드러나고, 주인이 당도하면 못된 종은 호되게 당하고 만다. 일단 시작된 일에는 끝이 있겠지만, 끝의 양상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여기서 조금 뒤로 물러나 보자.

 

예수님 시대에는 종말-묵시 사상이 시대사조로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느님의 눈에 이 세상이 빗나간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이 세상은 악의 세력이 지배하느라 인간에게 고통만 안겨 줄 뿐이고, 악화 일로를 걸어 언젠가는 멸망하게 되리라고 예견한다. 그러다가 드디어 하느님의 직접 통치가 이뤄지는 새 세상이 오게 된다. 이처럼 종말-묵시 사상 체계에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 두 세상이 들어 있다.

 

여기서 종말론과 묵시 사상 사이에 약간의 거리를 둘 필요가 있는데, 종말론이 일반적으로 세상 역사에는 끝이 있다는 사고방식이라면 묵시 사상은 종말의 모습을 구체화해 가시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묵시 사상이 문학적인 틀을 입었을 때 비로소 ‘묵시문학’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다니엘서, 요한묵시록 등).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가뭄, 홍수, 기근, 지진, 전염병 등 갖가지 환난이 발생하고, 나라 간에는 전쟁이 터진다. 그리고 천체가 흔들리며 우주적인 파국이 닥쳐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그렇게 극도의 절망과 혼란이 세상을 뒤덮고 나면 하느님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만민을 단죄하고 선민을 구원하여, ‘이 세상’에서 고통받던 선민이 마침내 ‘오는 세상’에서 최고의 행복을 누린다. 역사란 퇴보로 치닫고 있으며, 장차 극도의 혼란이 발생한 후 새로운 질서가 등장하게 된다는 뜻이다. 종말-묵시 사상이 유다 땅에서 대대적으로 유행하던 시기는 대략 기원전 2세기-기원후 2세기 정도로 잡을 수 있으며, 예수님도 시대의 인물인지라 이 사상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느님 나라의 비유뿐 아니라 앞에 언급한 9,1과 13,28-30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특징은 미래성에 있다. 그러나 종말이 언제 올지,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13,32)고 하여 예수님 자신도 지존하신 하느님 앞에서 한껏 자신을 낮추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하느님 나라의 미래는 온전히 하느님 손에 달려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종말이 언제 온다느니, 종말이 되면 이러이러한 일이 있을 것이라느니 하는 말은 모두 헛소리에 불과하다.

 

새천년을 앞두고 세상이 온통 들끓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 이전인 1992년에 다미선교회가 나타나 우리나라를 혼란에 빠트렸던 적도 있다. 요한묵시록에서 천년왕국이 지나면 7년 동안 사탄과 큰 전쟁이 있으리라고 내다보았던 데 맞춰 1999년에서 7년을 빼 계산한 결과다. 역시 부질없는 예고였다. 어리석은 인간은 거기까지일 뿐이다. 하느님 나라는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그 어느 사람, 심지어 아들인 예수님마저도 모르는 일이다. 단지 뿌려진 씨에서 열매를 거두며, 자그마한 씨에서 큰 나무가 되고, 등경에 불을 켜 어둠을 밝히며, 주인이 와서 모든 일을 셈하듯 하느님이 전적으로 주도하실 미래에 우리는 강력한 희망을 둘 수 있을 뿐이다.

 

이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다. 마르코 복음은 그렇게 세상의 앞날을 바라보았다.

 

* 박태식 신부는 대한성공회 소속으로 월간 <에세이>로 등단, 월간 <춤>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입문했고, 현재 서강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성공회대학교에 출강하며, 대한성공회 장애인 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으로 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3월호(통권 492호), 박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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