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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Wcc (종교연합) 의 주체가 가톨릭 교회라는 말에대한 답변 카테고리 | 천주교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09 조회수2,431 추천수0 신고

가톨릭 굿뉴스 자료실 > 선교 ㅣ 복음화 방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이 없다'는

내용으로 검색해서 자료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특별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공부해 보시면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제2바티칸 공의회에서 선교와 복음화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에 대해

아셔야 이해에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다종교 상황과 선교

 

 

들어가는 말

 

선교는 교회의 내적 본질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교회가 먼저 존재하면서 교회는 자신의 사명 중의 하나로서 선교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 사업을 하면서 자신의 실체를 형성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는 것이다. 선교는 교회가 존재하기 위해서 그리고 교회가 존재하는 한 언제 어디서나 계속되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지상 과업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 활동은 시대적 상황에 적합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새로운 천년기를 맞이한 오늘의 그리스도교는 세계화와 함께 일련의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이 변화는 이미 지난 세기에 시작되었는데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교가 다종교 상황이라는 역사적 흐름의 거대한 물결에 도전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교가 운명적인 다종교 상황을 외면할 수도 회피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도전은 그리스도교에게 타종교들을 바라보는 시각과 그리스도교의 선교 신학에서 새로운 신학적 이해와 반성을 요구한다.

 

 

1. 다종교 상황에 직면한 그리스도교

 

역사적으로 돌이켜볼 때 그리스도교가 자신의 종교 외의 다른 종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아지고 그들 종교에 대한 이해가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후반 지리상의 발견 이후이다. 이때부터 그리스도교는 타종교와의 만남과 접촉 그리고 동양 종교들의 서구 유입으로 세계의 다종교 상황을 소박하게나마 새로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소박한 다종교 상황에 관한 인식은 20세기에 들어와 지구가 하나의 마을을 형성하면서 점점 더 강화되어 나갔다. 물론 근대 이전에도 어느 한 국가, 한 민족 또는 한 사회 안에는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했음이 틀림없지만, 그것이 지니는 의미는 단순히 세상에는 여러 종교들이 있다는 정도의 의식을 가지는 데 머물렀다. 그리스도교와 타종교들 사이에 접촉이 많지 않았고 서로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국부적이었고 지엽적이었으며 또한 종교들 상호간의 영향력이 확산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가 세계의 다종교 상황을 인식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큰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고 또 그 상황에 크게 구애받지도 않았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종교들이 서로 실질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다종교에 관한 인식은 단순한 여러 종교들의 공존에 관한 인식을 넘어서게 되었다. 특히 대중매체의 발달로 각각의 종교들에 대한 내용들이 전세계 지구촌을 향하여 급속하게 확산되었고 종교들 상호간에 미치는 영향력 역시 급증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발맞추어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여 변화한 상황에 적응하고자 노력하였고 그 결실은 문헌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새로운 천년대를 맞이한 그리스도교에게 세계의 다종교 상황은 더욱 절박하게 피부로 느끼는 문제가 되어 가고 있다. 정보 혁명을 통한 세계화는 이 지구를 그야말로 하나가 되게 하고 있다. 인류는 새로운 신대륙를 개척하여 디지토피아를 건설하고 있다. 지금까지 인간의 주된 공간은 현실 공간이었으나 지금부터는 가상 공간을 통해 더 확장되어 가고 있다. 대중매체와 이동 수단의 발전은 고전적 의미의 세계를 하나의 동네로 만들었지만 인터넷의 발전은 이 지구촌을 클릭할 수 있는 인터넷상의 한 점으로 응축하고 압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세계의 여러 종교들은 한 점에서 서로 만나게 되고 그 영향을 직접적으로 미치기에 그 어떤 종교도 자신에게 그 어느 때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다른 종교들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과거의 그리스도교는 나름대로의 피치 못할 역사적인 사정에 따라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이러한 입장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1)라는 신학 격언에 집약되어 있다. 이러한 신학 격언이 배타적으로 해석되어 가톨릭 교회만이 인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 세워진 유일한 교회로 간주되고 타종교는 정복되고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사는 이들이야말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을 뿐이고 그리스도교 이외의 신앙을 가진 이들은 우상숭배자로, 미신을 섬기는 자로 간주된 적도 있었다. 이때에는 교회가 선교를 하지 않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있게 되면 그들은 모두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확신감에서 그리스도교는 선교를 중요시하였다.

 

인간이 겪는 가장 심한 진통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는 것이고,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은 죄의 용서와 하느님의 자녀 됨이고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과 불행은 지옥에서 받는 영원한 형벌이다. 따라서 선교는 타종교인이 이교도적인 자신의 과거를 단호히 떠나 복음의 메시지를 조건 없이 받아들여 교회의 구성원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18-19세기의 그리스도교 선교는 식민국가의 종교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는 것을 의미하였고 선교 정책은 서구의 제국주의적 식민주의 정책과 맞물려 이루어졌다.2) 많은 경우 선교사들이 군대의 뒤를 따라 들어가 점령된 식민지 민족들을 개종시킴으로써 교회를 부식하고 그리스도교를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바로 이러한 제국주의적 선교 정책은 그리스도교를 전 세계로 전파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음에는 틀림없지만 오늘날 많은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후유증을 낳고 있다.

 

이러한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정복적 선교 정책은 오랜 기간 동안 교회 안에 그대로 유지되어 오다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하여 식민지 정책이 종식되고 서구로부터 식민지들이 독립하게 되자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54년 인도 정부는 개종을 주목적으로 삼는 선교사들에게 철수하도록 명령했으며, 이어서 선교사들은 중국, 앙골라, 아랍 세계 등지에서 동일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또한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이른바 '해방 신학'이 등장하여 이전의 식민적이고 제국주의적인 통치 하에서 행해진 선교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국가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류 공동체 안에는 종교적 신념에 따른 긴장, 갈등, 불화, 전쟁 등이 끊이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공의회는 타종교에 대한 배타주의적인 태도를 버리고 인류를 위해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과 구원 의지에 근거하여 비록 타종교를 신봉하는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 역시 구원의 가능성에서 배제되지 않음을 밝혔다. 타종교인들을 보는 시각의 중심이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배타적인 축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포괄적 축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 세워진 참된 교회요, 인류 구원을 위한 보편적 성사라고 규명하면서 타종교 특히 세계 종교라고 불리는 유다교,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등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인다. "가톨릭 교회는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과 행동의 양식뿐 아니라, 그들의 규율과 교리도 거짓 없는 존경으로 살펴본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면에서 서로 다르다 해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를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과 더불어 지혜와 사랑으로 서로 대화하고 서로 협조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생활을 증거하는 한편,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정신적 내지 윤리적 선과 사회적 내지 문화적 가치를 긍정하고 지키며 발전시키기를 모든 자녀들에게 권하는 바이다."3)

 

그러다가 20세기 말 새로운 쳔년대를 앞두고 '종교간의 대화'가 새로운 화두로 나타나면서 종교 다원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4) 종교 다원주의란 종교를 궁극자에 대한 다양한 인식과 개념, 또 그것들에 대한 실존적인 응답 또는 반응으로 보고 종교간의 서열을 매기는 태도에서 벗어나 모든 종교의 가치를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입장을 의미한다. 존 힉 같은 신학자는 그리스도교가 중심축이고 다른 종교들은 그 주위를 맴도는 주변적인 종교로 보았던 그리스도교 중심의 신학을 낡은 프톨레마이오스식 신학이라고 규정하고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주장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교회, 그리스도교 또는 그리스도 중심에서 벗어나 아도나이, 알라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지는 궁극적 실재로서의 신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파니카 같은 가톨릭 신학자는 "우리는 개종이라는 도전에도 직면해야 한다."5)라면서 종교간의 대화를 위해서는 타종교로 개종할 각오까지 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종교 다원주의자들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절대성을 믿는 것과 같이 모든 종교가 제각기 자기 종교와 신앙의 절대성을 믿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교만이 절대성을 지닌다는 우월감을 가질 수 없기에, 선교의 일차 목적은 타종교인의 개종 곧 우상숭배와 불신앙으로부터의 회개가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 곧 각 종교인들의 내적인 회개와 세계 평화 공동체의 형성이라고 여겨진다. 오히려 그리스도교가 서구인의 제국주의적인 종교적 침략과 지배욕의 종교에서 벗어나 사랑과 봉사의 종교로 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종교에서 종교로 이동하는 개종에 강조점을 두기보다 내적 회개와 세계 평화를 위한 종교간의 대화에 무게 중심을 강하게 둔다.

 

한편, 지난 9월 11일에는 역사상 초유의 테러 사건이 일어났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가미가제식 자살 특공대들이 민간 비행기를 납치하여 냉전 이후 유일한 초강대국이 된 미국의 힘과 부를 상징하는 국방부 건물과 세계 무역 센터 건물을 공격하여 수많은 인명 피해와 정신적 물질적인 피해를 입혔다. 이 사건을 두고 그 원인을 분석하자면 매우 복잡하여 어느 하나가 유일한 것으로 제시될 수 없겠지만 적지 않은 세계 지성들에게서 '힘의 불균형이 낳은 거대한 문명 충돌'이라는 견해가 나와 주목을 끈 적이 있다. 이러한 견해를 바탕으로 해서 종교적인 관점에서만 도식화해서 볼 때 세계 문명은 서구의 기독교 문명, 중동의 이슬람 문명 그리고 아시아의 불교, 유교 문명으로 분류될 수 있는데, 이중에서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이스라엘을 매개로 하여 충돌한 사건이 이번 뉴욕 테러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간의 평화 없이는 문명간의 평화는 없게 될 것이다. ......종교간의 대화가 없이는 종교간의 평화가 없게 될 것이다."6)라는 한스 큉 신부의 말이 새삼 생각나게 해 주는 사건 앞에서 그 자살 특공대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태도를 가질 수 있고 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으며 그들을 과연 개종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자위적인 의문이 생겨날 수 있다. 그들을 개종시키기는커녕 평화로이 공존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자칫 상대주의에 빠지기 쉬운 종교다원주의의 주장과 근본주의자들의 경악할 행동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다. 교회가 타종교들 안에서도 참되고 신성한 것들이 발견되고 그 종교들 역시 인간을 비추는 진리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인정하면서도 왜 선교를 해야하는가? 과연 유일성의 진리를 주장하는 그리스도교는 거의 같거나 더 강한 주장을 하는 타종교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나타낼 수 있고, 나의 믿음과 같거나 더 강한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등의 어려운 의문이 제기되고 이 질문에 대해 그리스도교 신학, 특별히 선교학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나름대로의 대답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2. 선교 개념의 분화와 심화 과정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선교를 '교회로부터 파견된 복음의 전파자들이 온 세계에 가서 복음 전파의 임무와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백성들과 집단에 교회를 부식(扶植)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독특한 사업을 '선교'(宣敎, Missiones)7)라고 정의한다. 이 문헌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점은 한국어로는 단순히 선교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이 선교가 복수형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공의회 이전 역사의 흔적으로 19세기경 선교라고 하면 서구를 중심으로 타민족들에 대해 펼쳐진 갖가지 외방 전교적인 선교 활동들을 지칭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복수적인 표현은 복음 선교의 풍부하고 복잡하고 동적인 참모습을 더 잘 함축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교회의 부식이다.

 

그리고 교황 바오로 6세는 사도적 권고에서 선교를 단순히 복음을 모르는 사람만을 상대로 하는 활동으로 이해하는 경향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 "교회의 복음화 활동에 있어서 각별히 유의해야 할 요소와 국면(局面)이 있습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만이 복음화 활동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로써는, 복음 선교를,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기타 다른 성사를 주는 것이라고 정의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선교의 풍부하고 복잡하고 동적인 참모습을 부분적 또는 단편적으로 규정할 때는 그것을 빈약하게 하거나 그르치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중요한 모든 요소를 한 가지로 포괄(包括)하지 않는다면 복음 선교를 파악하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8) 복음 선교를 단순히 교회의 부식으로만 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 암시된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이 문헌에서 시대의 신앙감에 맞게 선교의 개념을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면서 새로운 단어 "복음화"(Evangelizatio)9)를 사용하면서 그 활동을 하느님 백성들에게 권고한다. 이 권고에서 교황은 인간의 내적인 변혁에 초점을 맞추어 비복음적인 삶의 방식이나 태도 그리고 비구원적인 상황을 복음의 힘으로 바로 잡는 활동을 선교의 개념에도 포함시킨다. "복음 선교의 목적은 이 내적 변화의 성취에 두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해서 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신적 능력으로 모든 개인과 집단의 양심, 그들이 관계하고 있는 활동, 그들의 생활과 구체적 환경을 변혁시키려고 노력할 때 교회는 복음 선교를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0) "교회로서 복음 선교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보다 넓은 지역에서 혹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하는 것만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배반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 가치관, 관심의 초점, 사상의 동향, 사상의 원천, 생활 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逆戰)시키고 바로잡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11) 여기에서 선교는 비복음화된 사람들의 단죄를 피하기 위해 그들을 개종시키고 교회를 부식하는 과업일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과 모든 문화들을 복음 정신에 맞게 바꾸는 일도 포함된다.

 

그런데 최근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Redemptoris missio)에서는 선교의 고유한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단수형의 선교(Missio)라는 말을 사용한다.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되살리면서도 다른 한편 예외적으로 선교 활동의 역사적인 흔적을 되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구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 외에는 선교를 복수형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에서 선교를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의 선포와 지역 교회의 설립과 하느님 나라의 가치들의 추진"12)이라고 그 다양한 모습들을 요약하여 특징 지운다. 교황 바오로 6세가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배반되는 모든 인간적 사회적 가치들을 복음의 힘으로 역전(逆戰)시키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면, 요한 바오로 2세는 좀더 적극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증진하고 촉진시키는 데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부정적인 것의 역전과 긍정적인 것의 촉진이 대조적이다.

 

또한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에서 토착화(Inculturatio)13)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서 선교 활동을 토착화와 연관시킨다. 회칙에 따르면 "토착화는 인간 문화가 그리스도교에 수용됨으로써 그 문화의 참된 가치의 내적인 변모가 이루어지는 것과, 여러 가지 인간 문화 안에 그리스도교가 삽입되는 것"14)으로 정의된다. 선교는 토착화와 동반되며 토착화와 함께 추진된다는 것이다. 이 토착화라는 신조어의 활용은 많은 논쟁을 발생시켰다. 토착화라는 새로운 표현에서 사회학자들은 "교회가 주어진 문화 안에 삽입되는 과정" 또는 "각 나라, 각 지역 혹은 각 사회적 분야 안으로 교회가 자연스럽게 되는 것" 등으로 그 뜻을 제한하고자 함에 비해, 종교 전문가들은 선교와 관련하여 "특별한 문화 안으로의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삽입"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제부터 선교의 개념은 토착화라는 개념도 포괄하게 된 것이다.

 

또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같은 문헌에서 타종교와의 대화가 복음화 사명의 일부임을 선언15)하고 그 이유를 타종교 안에도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시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타종교와의 대화는 교회의 복음화 사명의 일부이다. 이 대화가 상호 인식과 상호 기여의 길이요 도구라고 생각한다면 외방 선교에 배치되지 않을뿐더러 선교와 특수한 관련이 있고 선교의 한 모습일 수 있다. 사실 선교는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모르고 많은 경우에 다른 종교에 속한 사람들을 상대로 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백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께로 부르시며, 당신의 계시와 사랑을 충만히 그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원하시고, 비록 결함과 부족과 오류가 섞여 있을지라도 그들 종교가 증거하는 영적 풍요를 통하여 각 개인과 민족에게 당신의 현존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내신다."16) 그리고 교황은 어떤 경우에는 대화의 길만이 유일한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많은 선교사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에게는 어렵고 때로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대화의 길만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17)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9월 2일부터 4일까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종교 지도자 200인 모임에 보낸 담화문에서 "다른 종교들간의 대화는 종교 분쟁을 불식할 수 있도록 해 줄 뿐만 아니라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시도해야 할 과제"라고 하면서 종교간의 대화가 매우 시급하고 중대한 일임을 밝혔다.

 

이렇게 볼 때 선교라는 개념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 강조점이 달라지면서 그 함축하는 내용이 매우 풍부하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선교를 복음 전파와 교회의 부식(扶植)으로 보았으나, 교황 바오로 6세는 복음 선교를 단순히 복음 전파와 교회의 부식으로만 보지 않고 복음화라는 새로운 단어를 사용하여 비복음적·비구원적인 상황의 역전 노력까지도 포함시켰다. 그리고 요한 바오로 2세는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증진하는 활동과 토착화 작업 그리고 종교간의 대화까지도 선교 활동과 연관시켰다. 고유한 의미에 있어 선교는 예비신자를 인도하여 개종하게 함으로써 교회를 부식하는 활동이지만 넓은 의미에서의 선교는 이미 교회의 지체가 된 사람들의 회개, 비복음적, 비구원적 상황의 역전, 복음 정신에 맞는 세상의 건설 또는 하느님 나라의 가치의 증진, 토착화, 종교간의 대화까지 모두 이르는 활동인 것이다. 그런데 선교가 담고 있는 풍부한 내용 중 어느 하나도 소중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근본주의와 다원주의가 판치는 다종교 상황을 염두에 둘 때 종교간의 대화가 세계 평화를 위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로 새로이 대두된다.

 

 

3. 한국 교회와 선교

 

한국 사회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전형적인 종교적 다원 사회이다. 그리스도교, 불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등 살아 숨쉬는 신앙 공동체들이 매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사회가 한국 사회이다. 한국 그리스도교는 다종교 상황을 피할 수 없고 운명적이기에 지금까지 서술한 모든 것이 한국 교회의 선교 활동에 모두 적용된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예비신자를 확보하는 새로운 양 모으기 운동, 냉담 신자들을 위한 잃은 양 찾기 운동, 신자 계속 교육을 통한 재복음화 운동, 복음 정신에 맞는 사회를 이룩하는 도덕성 회복 운동, 신앙의 토착화 운동 그리고 종교간의 만남과 대화 등을 모두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하지만 다종교 상황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놓고 보면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선교와 종교간의 대화가 더 큰 무게를 지니게 된다.

 

그리스도교가 이 땅에 전래될 때부터 다종교 상황 안에서 뿌리를 내려야 했고 아직까지 한 번도 소수 종교로서의 위치를 면해 본 적이 없다. 물론 한국 교회는 양적 질적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해 온 것은 사실이다. 1981년 140여 만 명이던 신자 수가 1986년 초에 200만 명, 1992년에 300만 명을 넘어섰다. 지난 2000년도의 통계를 보면 총인구 46,125,376에 신자가 4,071,560으로 총인구 대비 총신자의 비율은 8.8%이다. 교회의 피나는 노력으로써 한국 교회는 눈부시게 발전하였지만 한국 사회 안에서 가톨릭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은 신자 수에 있어 여전히 소수이다. 한국 사회에서 8.8%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무종교인이거나 타종교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전적 의미에서의 선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지상 명령이다. 교회가 선교를 해야 하는 것은 타종교인들에게 구원이 없어서이거나, 타종교 안에는 진리나 긍정적인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다. 교회의 선교는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의 대내적인 완전한 자기 통교를 바탕으로 한 파견에 그 기원을 둔다. 이 파견은 성부에 의한 아들의 파견이며, 아들에 의한 성령의 파견이며 이 파견과 연속선 위에 교회의 선교가 있기에 선교 활동은 교회의 깊은 본성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지 교회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선교는 교회에 첨가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신비의 심장에 있다. 교회는 선교적이거나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선교 사명은 사도들을 파견한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그래서 교회에게 선교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고 지상 명령이다. 선교의 모티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함께하는 그리스도교적인 삶을 모든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고, 성령의 숨결 아래 이미 출현한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인간들의 역사 안에서 증진시키고자 하는 열망이다. 좋은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기 위해 선교를 하는 것이다. 선교는 그리스도의 명령이신 이웃 사랑의 극치이다. 교회는 선교를 통해 삼위일체 하느님의 대내적 친교를 구성하는 사랑과 그리스도를 아는 기쁨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명시적이고 역사적이고 실천적인 방식으로는 타종교의 전통 안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함축적, 비주제적 또는 신비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지체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실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명시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함축적인 방식으로는 그리스도의 은총의 영향 아래 있는 타종교들이 구원에 긍정적 가치를 지니고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그 함축적인 성격 때문에 파편적이고, 불완전하고, 허약한 실재로 머문다. 하느님 나라의 표징인 교회는 인간 구원을 위한 효과적인 성사와 제도들을 잘 갖추고 있기에 함축적인 그리스도교 또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은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명시적인 그리스도교와 조우할 때 자신의 의미를 더 잘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앙이다.

 

그리고 종교간의 대화는 시대적 요청이다. 종교간의 대화 없이 종교간의 평화 없고 종교간의 평화 없이 세계 평화 역시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발맞추어 한국 교회는 종교간 대화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대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한국 주교회의 차원에서 교회 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회를 활성화시키고 각 교구별로도 전담 부서를 두자고 촉구한 것은 아주 시의적절한 요청이었다. 한국 주교회의는 그동안 부처님 오신 날에 불자들에게 경축 메시지를 보내는 등 종교간의 대화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지난 2000년 대희년 동안 미사 본기도 중에서 '다른 종교의 신자들과 만나 대화하고 화목하게 하시어'라는 내용을 넣어 기도로써 밑받침이 되도록 하였다. 사실 종교인들이 서로 화합하고 협력하지 않고서는 여러 가지 사회악 제거는 물론 우리 민족의 숙원인 지역 감정 해소 그리고 남북 화해를 이룰 수 없기에 종교간의 만남과 대화 그리고 협력은 더 절실하다. 최근 여러 종단들이 연합하여 사형 폐지 운동, 분단 극복을 위한 온겨레 손잡기 운동 그리고 새만금 살리기 운동 등을 벌이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그리고 종교간의 대화는 신앙의 토착화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토착화는 문화에의 토착화인데 우리 한국 문화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종교 문화이며 이 종교 문화의 이해 없이는 올바른 토착화가 이루질 수 없다. 그리고 다종교 상황에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타종교 문화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간의 만남과 대화가 요청된다. 종교간의 대화는 고전적 의미의 선교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한 설문 조사에서 '종교계에 바라는 사항'을 묻는 질문에 가장 많은 응답자가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을 버릴 것'을 주문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일반 국민이 종교인들에게 바라는 것은 종교간의 경쟁, 갈등 또는 싸움이 아니라 대화와 협력이고 이것을 잘하는 종교에 더 큰 호감을 가지기 마련이다. 종교간의 대화를 성실히 하는 것은 가톨릭 교회의 신앙이 참되다는 증거가 되며 그 자체로 하나의 선교가 된다. 이런 점에서 종교간의 대화는 단순히 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삶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기에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나오는 말

 

21세기 현대 사회는 고도의 지식 정보 사회로 시간적 공간적 격차를 뛰어넘어 다양한 신념 체계들이 공존하는 다원화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종교는 하나의 절대적 신념 체계이기에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이 신념은 자칫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으로 연결되기 쉽다. 특별히 유일신교의 신자들에게 이러한 종교적 신념 체계가 극단적인 방향으로 흐르기 쉬워 타종교의 상징물은 우상으로 간주되며 나의 신념 체계와 다른 사람들은 저주받은 자, 적, 또는 사탄이 된다. 그리고 적 혹은 사탄에 대한 공격은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한 충성 행위, 선택받은 자의 소명 또는 성스러운 과업으로 여겨지기에 행위자는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엄청나게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잘 모르면서 과격한 행동도 불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번 뉴욕 참사에서도 아주 잘 드러났다. 그러나 종교에서 제거되어야 할 적이나 타파되어야 할 우상은 인간을 고통 속에 빠지게 하는 여러 가지 사회악과 인간성을 유린하는 각종 관념이나 그릇된 가치관 곧 환경 파괴, 공해, 정보와 재화의 빈부 격차, 남녀 차별, 사회적 불평등, 부정부패, 살인, 강도, 생명 경시 풍조, 물신 숭배, 권력 숭배 그리고 성의 상품화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선교 활동도 이러한 맥락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고전적 의미의 선교이든 넓은 의미의 선교이든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선교이든 그 활동에 있어 가장 강조되어야 할 점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면서도 배타적이고 극단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늘날 다종교 상황에서의 그리스도교의 선교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배타적이지 않으면서도 상대주의적인 종교 다원주의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면서도 극단적인 근본주의에 빠지지 않는 변증법적인 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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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하권, [교회론] 제2편, 분도출판사, 1981년, 100-105면 참조.

2) 심상태, [그리스도와 구원], 성바오로 출판사, 1989년, 338-339면 참조.

3) 비그리스도교 선언, 2항.

4) 교황청은 종교적 다원주의와 관련하여 두 개의 문서를 내놓았다. 지난 1997년 국제신학위원회에서 "그리스도교와 세계 종교들"을 발표하였고, 지난 2000년 8월 6일 신앙교리성에서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Iesus)를 발표하였다. 이것은 종교 다원주의에 관한 교회의 관심이 큰 것을 잘 드러내 준다.

5) R. 파니카, [종교간의 대화], 김승철 옮김, 서광사, 1992년, 74면.

6) 한스 큉, "새 세계 질서를 위한 지구 윤리", [미래 사회와 종교], 정산종사 탄생 100주년 기념 국제 학술 대회 발표 논문, 원광대학교, 2000년.

7) 선교 교령, 6항 참조.

8) 바오로 6세,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 17항 참조.

9) [현대의 복음 선교]의 옮긴이는 '우리말 번역을 내면서'라는 글에서 번역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특별히 라틴어 Evangelizatio의 의미를 복음 선교, 복음화, 복음 선포, 전교, 선교, 복음화 활동 등으로 나열하면서 부득이한 곳을 제외하고는 복음 선교로 통일하여 번역하였다고 한다. 라틴어 어의 그대로 단순히 복음화로 번역하였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가지게 하는 번역이다.

10) 바오로 6세, 앞의 책, 18항.

11) 위의 책, 19항.

12)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 34항.

13) 토착화(Inculturatio)라는 표현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성 치릴로 선교 1100년을 기념하여 1985년에 발간한 회칙 [슬라브 민족의 사도]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슬라브 민족들이 사는 땅에 개척자적으로 행한 복음화 업적 안에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토착화라고 부르는 모델을 발견한다. 그것은 토착 문화에의 복음화 육화인 동시에 교회 생활 안에서의 이 문화들의 도입이다"(21항).

14) 요한 바오로 2세, 앞의 책, 82면.

15)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교 교령" 34항에서 종교간의 대화의 필요성이 이미 언급되고 있다. "선교 활동의 올바르고 질서 있는 실행은 복음의 일꾼들이 자기들의 임무 특히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나 문화와의 대화를 위해 학문적으로 훈련되고 또 그 실천에 있어서 효과적으로 도움을 받는 것이 요구된다."

16) [교회의 선교 사명], 55항.

17) 위의 책, 57항.

 

[사목, 2001년 10월호, 박태범(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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