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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考察]개신교 근본주의란 무엇인가? 카테고리 | 천주교
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1999-10-02 조회수1,369 추천수5 신고

 

 

 먼저 아래 451번 글에서 개신교 신자에게 답변을 해주고 싶어하셨던 형

 

제님에게 지금 올리는 글이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에 대해 이해를 할 수 있

 

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형제님처럼 개신교 근본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심적으로 불안해 하고 있을 지도 모를 가톨릭 신자분들께 다소나마 도움

 

이 되기를 바랍니다.

 

 

 

 

 개신교 성서 근본주의란 무엇인가?

 

 

 

 우선 이글을 통해 필자가 의도하는 바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개신교 근

본주의가 한국의 개신교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경향 -매우 위험하고 과격

한 경향을 띠고 있지만- 임에는 틀림없으나 개신교 신자 모두가 근본주의

자는 아니라는 사실과 아울러 가톨릭에 우호적인 선의의 개신교인도 분명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자들이 주변에서 흔히

부딪치는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의 가톨릭에 대한 비방과 중상모략으로 인

해 혹시라도 가톨릭 신앙의 참됨을 의심하거나 회의에 빠져드는 경우가

있다면 안되겠기에 이렇게 글을 올리게 된 것을 이해바랍니다.

 

 당연히 필자의 글은 그들의 허구성을 제압하거나 그들과의 교리 논쟁에

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게 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신앙의 문제는 반드시 진리의 확실성만 가지고 판가름나는 성

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논리 정연한 이성과 사물을 동감

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편견없는 지성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기계적 존재

가 아니라 뜨거운 살과 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필자가 경험해 본 바로는 또한 주위에서 보고 들은 것에 의하면 가톨릭

교리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고 하더라도 개신교 근본주의자들과의 대화에

서 그들에게 가톨릭 신앙의 ’참됨’을 ’증명’하기 위해 정연한 논리를

사용한다는 것이 마치 북한과의 제네바 회담처럼 별 성과가 없음을 이미

앞서 올린 글을 통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오히려 근본주의자들과의 대화에서 언성을 높여가며 행하는 가톨릭 신

앙의 변호는 이해와 관용의 결과를 맺기 보다는 상호 불신과 맹목적 적

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톨릭 신자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소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저들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이 가톨릭이

가르치는 바를 일부러 잘못 전하고서 진리의 왕이신 하느님께 대해서 올

바른 소리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허수아비를 세워 놓고 신이 나게 주

먹질을 한다고 해서 개신교가 세지지도 않을 것이며 그들의 헛소리에 가

톨릭이 약해질 리도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이제 필자가 의도하는 바를 (이미 아래 수차례 올린 글에서도 확

인이 되었겠지만) 밝히고자 합니다. 아래의 글은 근본주의자들을 마주 대

했을 때 늘 당황하고 언짢아하는 때로는 황당해하는 가톨릭인들을 대상으

로 한 것임을 밝혀두면서 다음의 세 가지 경우가 그 목적입니다.

 

 

 

 첫째, 근본주의자들이 일상생활에서 그들의 논리를 펼 때, 그들

논리의 근거를 좀더 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둘째, 성서에 대한 가톨릭과 근본주의자들의 이견을 살펴봄으로써

이 두 견해의 상이함을 이해하는데 개인의 주관이 아닌 성서학자들

의 공통된 의견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파악하도록 한다.

 

 

 셋째, 근본주의자들의 질문에 적절한 답을 구하는 가톨릭 신자들,

특히 예비자 교리를 막 끝낸 경우나 교리에 무관심한 신자들 가운

데 상당수가 근본주의자들의 논리에 무방비 상태에 있으며 이러한

상황이 가톨릭 신앙에 대한 저들의 비난과 오해를 가톨릭 신자들이

마치 진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를 없애며, 궁극적으로

이런 것들 때문에 개운치 않았을지도 모를 가톨릭 신자들을 안심시

킨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지만 개신교 근본주의자에 대해 말하면서 한 가지 말

씀드리고 싶은 것은 신앙의 문제를 놓고 이야기를 할 때 늘상 겪게 되는

것이지만 흔히 종교 진리에 대한 변호가 양비론자의 비난의 대상이 될수

도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지 개신교 근본주의

자마냥 성경 구절을 헌법 조문 해석하듯 벌이는 성경 퀴즈 시간이 아니라

는 점을 가톨릭 신자인 우리들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개신

교 근본주의자가 아니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만이 가톨릭이 지닌

진리의 우위성을 확보하는 길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사실은 이러한 근본주의자들의 모순을 폭로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가툴릭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증거하는 종교라는 것을

우리들 스스로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필자의 경험에서 말한다면 가톨릭의

교리에 대해 어떤 의심도 들게 하는 것을 여태껏 단 한 개도 아니 한 개

의 그림자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필자를 비롯한 개종자들을 가톨릭의 품안으로 돌아오게 한 결정

적인 계기는 살아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여주는 가톨릭 신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도저히 가톨릭 신자가 되

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바로 그것,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

도의 사랑을 몸소 보여주는 가톨릭 신자가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의 빗나간 생각과 행위로 인해 어지러워진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현하는 길이며 ’나’혼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사랑 자체이신 그분의

하늘 나라에서 평화의 안식을 누리게 되는 그날까지 가톨릭 신자에게 부

여된 신성한 의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의 서론은 접고 근본주의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한국의 개신교 근본주의는 모두 미국에서 수입된 것인만큼 미국에서의

개신교 근본주의파의 경향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말해둘 것은 다음의 글은 안토니 질리스 신부님

의 저서 ’가톨릭 신자가 알아야 할 개신교의 성서 근본주의’에서 발췌한 것

으로서 가톨릭 신자들이 주위에서 흔히 부딪치는 개신교 근본주의에 대해 정

확한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기서 근본주의(fundamentalism,복음주의)에 대해 정의를 내려보기로

하겠습니다. 근본주의란 근본 교리를 왜곡,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해석하

는 것을 말합니다. 근본주의자들의 경우 종교적인 교리에만 집착하므로

결국 이들에겐 교리만이 목적 자체가 되어버립니다. 즉 나무는 보되 숲

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기를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보고 있더라 하는 이야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가장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최근의 근본주의 예로는 이란의 아야톨리

호메이니의 종교체제를 들 수 있습니다. 호메이니 체제야말로 신의 이름

과 공정함을 빌려 글자 그대로 코란을 해석하고 그의 좁은 견해를 구체화

시킨, 실로 모든 면에서 근본주의자의 전형적 모습을 증명해주는 좋은 모

델입니다.

 

 이란에서는 도둑이 잡히면 그의 손을 절단하는 형벌을 내리고  간음은

사형에 처하며 여성들은 코란에 따라 그들의 ’수치스러운 몸’을 머리끝

에서 발끝까지 가려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것들에 대해 솔직하고 좀더 자유로운 사고를 한다면

-가톨릭이건 개신교이건 간에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만 빼고 - 그리스도

교의 전통에도 숱한 호메이니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자칭 크리스천이라고 떠벌리면서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보다 호메이니의 신앙 체제와 같은 순전한 개인의 기호와 주관에만 의존

하는 절대적 선악의 판단 기준 같은 것 위에 그들의 신앙을 두고 있습니

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말로는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외치지만 겉으로만

크리스천인 척할 뿐 속마음은 자신만의 외고집으로 일관하는 개인적 주관

의 신봉자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소위 ’크리스천’들은 기소된 범죄자들

에게 자비를 베풀기는커녕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형벌을 요구합

니다.  

 

 예수님이 바라셨던 대로, 적을 사랑하기보다 지구를 멸망시킬지도 모를

핵무기 전쟁에 있어 서로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다는 식입니다. 만일  

우리 자신을 냉철히 뒤돌아본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우리도 약간은

근본주의파들의 기질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래의 논의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근본주의 경향을 자성하

게 하고 개신교 근본주의의 위험성으로부터 가톨릭 신앙을 지켜내려는 데

그 목적이 있음을 다시 한번 밝혀둡니다.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의 세 그룹

 

 독자들은 주위에서 "의사도 의사 나름이고 변호사도 변호사 나름이다."라

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근본주의파도 근본주의파 나름입니

다. 가톨릭 신자들이 모두 다 같은 생각일 수 없듯이 그들도 마찬가지입

니다. 그런 이유로 이들 근본주의자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

다.

 

1. 극단적이며 광란적인 그룹

 

 - 이 그룹에 속하는 근본주의자들은 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만화책

인 ’잭 칙(JACK CHICK)’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만화를 본

적이 없는 가톨릭 신자들을 위해 이 만화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가

톨릭은 그리스도교가 아니고 모든 가톨릭인들은 지옥에 갈 것이라는 것

을 증명하려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인 구역질나고, 멍청하며, 편파적인 책

자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책자들은 가톨릭이나 일반 개신교에 관한 그들의 고질적

인 무지함을 단적으로 잘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들의 성서라고 할 수 있는 잭 칙의 만화책 중의 한 장면을 여기서 소

개합니다. 가장 유명한 ’알베르따’ 가운데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한 가

톨릭 여인이 임종하려는 장면에서 갑자기 그녀는 허공을 응시하며 괴물들

이 그녀를 잡으려 다가오고 있다면서 공포에 떱니다. 영원한 저주 -그녀

의 가톨릭 신앙의 대가로 하느님이 내리는 벌- 로인해 이 세상을 하직할

때, 그녀의 얼굴은 흠뻑 젖게 됩니다.

 

 이 간행물에 잘 쓰여지는 또 한 가지의 주제는 세계에 대항한 거대한 가

톨릭 교회의 ’모략’입니다. "알베르따"의 또 다른 장면에는 교황이 이 세

계의 모든 개신교 신자들의 이름과 주소 및 전화번호를 기록한 컴퓨터를

갖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면 사제들과 수녀들이 정

사를 벌인다고 알려진 사제관과 수녀원을 연결하는 지하 통로를 보여줍니

다. (그 지하 통로 옆에는 그들의 정사로 인해 생긴 아기들의 해골이 쌓

여 있습니다.)

 

 이러한 간행물들은 (일반 가톨릭 신자들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아주 많이

퍼져 있지만) 극단적으로 왜곡되고 편파적인 작가와 삽화가들의 졸작임을

보여주고 있는 수준 이하의 것들로서 광란적으로 가톨릭에 반대하는 개신

교 근본주의 그룹을 만족시켜 줍니다. 이런 책자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 즉, 과격 개신교 근본주의자들과 가톨릭 신자가 대화를 시도하는 것

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둘 사이에는 대화가 아니라 끝없는 적대감

과 증오만이 생겨날 뿐입니다. 오직, 잭 칙(Jack Chick)과 같은 가톨릭을

비방하는 서적과 매체를 발행하는 출판업자들과 그들을 열광적으로 지지하

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근본주의자들이 어느 나라에서건 아무런 정치

적 영향력을 갖지 못하게 되기를 바랄 수 밖에 없습니다.      

 

 

2. ’세련된 고집쟁이’ 그룹

 

 - 다음에 소개할 근본주의파들은 그들의 반 가톨릭 사상으로 수백만 달

러를 벌어들이는 사업가들, 즉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통해 복음을 전파

하는 유명인들입니다.

 

 이 두 번째 그룹에 속하는 근본주의의 예로서 달라스(Dallas)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 있었는데, 어떤 근본주의파 대학 당국이, 축구 경기를 하려던

상대방 대학이 가톨릭 대학인 것을 우연히 알고 축구 게임을 취소했던 일

이 있습니다.

 

 한 가지 의심스러운 것은 이들은 운동  경기에서 상대방이 가톨릭이라는

사실로 게임을 취소했다면 일상 생활 즉, 그 개신교 대학의 이사들이 그

들의 신조에 어김없이 그들이 경영하는 사업장이나 은행에 "우리는 가톨

릭인과 상종하지 않습니다."라는 간판을 내걸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두 번째 그룹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첫 번째 그룹의 대표들처럼 극단

적이고 광란적이지는 않지만 가톨릭인과의 대화가 불가능한 것은 마찬가

지입니다.  위에서 말한 두 종류의 근본주의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가톨릭

인들에게 너무나 강한 적의를 품고 있으며 그들의 믿음이 유일한 믿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비난에 많은 위협을 느끼기 때문에 공공연하게 가톨릭

을 비난하며 때로는 성당에 방화를 하기도 하며 가톨릭 신자들에게 테러

를 가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실례는 미국에서 노예 해방이 있기 전에 남부에서 가톨릭 신자인

이태리 이민들이 자신들의 농장에서 흑인들을 자유인으로 풀어줬다는 것

을 문제삼아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이 이태리인들에 대해 린치를 가하고 테

러 공격으로  살해한 데서도 잘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사실 필자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의문은 왜 한국인들

이 개신교 근본주의에 심취하는가? 하는 것과 그토록 개신교 근본주의에

열성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

궁 속의 수수께끼입니다. 필자가 알기로 한국인은 인종상 황인종에 속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인종주의적

인 경향의 개신교 근본주의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백인 우월주의 단체 K.K.K

나 네오 나치들의 기본 신조인 반가톨릭을 내세우는 극단적인 개신교 근본

주의가 한국에 와서 날개달린 듯 활개를 치고 있으니 이게 어인 일인지 도

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사상을 알면서도 한

국인들이 개신교 근본주의자가 되는 것인지 아니면 모르지만 그냥 남들이

우르르 몰려 다니니까 다른 사람 뒤만 쫓아 다니느라 그런 것인지 모르나

이러한 한국의 상황은 가톨릭인이든 아니든 간에 지각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비쳐질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차유리 또는 티셔츠에 노골적으로 새겨가지고

다닙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구원하시고, 교황은 속박한다" 이런 식

입니다. 이들에게 다가가 셔츠의 문구가 도전적이라 말하고, 그 셔츠를 입

지말아 달라고 부탁하게 되면 그들은 곧이어 기다렸다는 듯이 상투적 문

구, 진부한 슬로건, 외워 갖고 있는 허튼소리로 맞서곤 합니다. 그들은 그

들의 셔츠에 대한 상대방의 감정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상대방이 하는 이

야기를 들으려는 대신, 아무 관련도 없는 성경 구절을 길게 인용하며 상

대방이 지쳐서 자리를 피할때까지 계속해서 떠들곤 합니다.

 

 

 

3. ’상식적인 온건파’ 그룹

 

 -이 세 번째 종류의 근본주의는 위의 두 종류와 전혀  다르며 이 그룹의

대표자들과는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합니다.  두 번째 그룹과 마찬가지로

이 그룹 또한 매스컴의 유명인들이 대표하고 있으나, 이들은 매스컴을 그

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긍정적인  매개체로 사용합니다. 이들의

대표로는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빌리 그레함이나  팻 로버트슨 목사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그들 주장에 있어서는 앞의 두 그룹과 큰

차이가 없으며 단지 열성적이고 정직한 크리스천이라는 점은 다릅니다.

 

 이 세번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 자신을 복음선포자(Evange

list)라 칭하는 크리스천들입니다. (사실은 아무도 근본주의파라고 불리우

고 싶지는 않은 듯 싶습니다.) 이들 복음 선포자라 자처하는 크리스천들 중

대부분은 근본주의의 주장을 아무 비판없이 받아들이고 따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들과 처음 두 그룹의 근본주의자들과의 사이에는

교리적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차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선포자들은

가톨릭인들과의 관계에서 처음의 두 그룹들보다는 훨씬 더 크리스천답고

대체로 더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지식이 있는 편입니다.

 

 이 복음선포자들의 급증이 새로운 교파를 유래했는데 그것은 ’무교파적

교파(Nondenominational Denomination)’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최근에

아이러니하게도 무교파를 지향한다는 주장을 펴는 이 교파에 속한 교회들

이(한국의 대표적 개신교의 하나인 여의도 순복음 교회가 이 무교파적 교

파를 표방하는 근본주의 그룹의 대표적인 경우) 이곳 저곳에서 속속 생기

고 있으며, 그런 교회들이 오늘날 크리스천들의 실질적인 욕구들을 채워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지식 있는 복음선포자들의 사상에 관해서는 ’오늘의 그리스도교’라는 잡

지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잡지를 통해 논리적이며 잘 정리

된 복음선포적 근본주의파의 신조를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이 잡지가 가

톨릭을 받아들이지는 않더라도 경멸적인 투로 반가톨릭적이지는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가톨릭인과 대화하려는 개방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근본주의파들 대부분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과 대화

할 의사가 전혀 없으며, 이 안타까운 사실을 우리는 처음부터 깨달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비록 그들 대부분 근본주의파들이 가톨릭을 받아들이기

를 완강히 거부하지만 이 사실로 인해 "우리 모두가 하나되기를"(요한 17,

26) 요구하시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이루기 위해, 또 다른 일부의

근본주의파들과 대화하려는 노력마저 포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개신교 근본주의의 역사

 

오늘날의 개신교 근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근원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의 근본주의는 사실은 어떤 반동적 사건으로 시작되었습니

다. 19세기에 접어들며 몇몇의 새로운  사상들이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교

리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특히  다윈, 프로이드, 니체 그리고 마

르크스로 대표되는 무신론, 유물론 사상은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앙에 실

제적인 도전을 해왔습니다.

 

 다윈의 과학적 발견에 의하면, 지구는 성서가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

랜 역사를 가졌다고 주장했으며,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적 연구 방법은 윤

리 도덕을 상대적인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니체도 그의 ’모든 가치의 초

월적인 가치 판단’ 에 관한 가르침으로 절대적  가치, 특히 그가 그리스도

교 신앙에서 본 절대성을 없애려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내세를 향

한 믿음을 단지 부유계층이 시민계층을 억압하려는 방법으로 본 마르크스

는 계급 없는 사회 안의 현세 지상 낙원(유토피아) 건설을 주장했습니다.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앙을 향한 이 도전에 반응하여 현대파(Modernist)

라 불리우는 크리스천 사상가들의(가톨릭과 개신교인들) 학자가 생겨났습

니다. 가톨릭 현대파들은 솔직히 말해서 교황청에 의해 간단하게 저지당

했으며, 위에서 말한 네 가지 사상의 흐름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절충하려

는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교황청이 그러한 시도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규정하고 현대주의와의

절충을 제지한 이유는 가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세운 교회로

써 신적 기원과 권위를 가진 그르칠 수 없는 신앙을 전 인류에게 가르치

는 까닭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모험적입니다.

교회는 2천년의 원숙한 슬기와 아울러 젊은이의 불타는 정열을 동시에 지

니고 있습니다. 요즈음 신기하다고 법석대는 것도 알고 보면 벌써 15세기

전에 성교회로부터 갈라져 나간 열교(裂敎)들의 주장에 지나지 않는 것들

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면서 장터에 밀려드는 새로운

학설을 무턱대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내일 모레 과부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개신교의 현대파들은 성서의 전통적 이해를  적용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새로운 과학과 철학의 발견에 대해 더 절충적인  견해를 취하기 시작했습

니다.

 

 이러한 견해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예가 흔히 종교의 상대성 내지는 무차

별론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나면

서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종교의 창시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이었을 뿐이며

예수를 소크라테스보다는 좀 더 현명하고 솔로몬보다 조금 더 위대한 입법

가로, 또 플라톤이나 스피노자보다 조금 더 고상한 도덕가로, 그리고 예수

의 자비와 동정심을 최상급의 형용사로 칭찬하며 그의 겸손과 상냥함을 찬

양하면서 그리스도가 보여준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에 혀를 내

두릅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들 현대주의 신학자들은 그를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

장 고상하고  가장 착한 분으로  삼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현대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를 인간과 하느님과의 틈바구니를 건너지르는 바로 직전에

남겨 두고  하느님이라고 부르기를 조심스럽게  삼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

니 솔직히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부르기를 거부한다는 것이 옳은 표

현이 될 것입니다.

 

 근본주의는 개신교 내에서 현대파 신학자들의 이러한  운동에 대한 반동

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근본주의(Fundamentalism)란 이름은  1909년에서

1915년 사이에 몇 사람에  의해 씌어진 몇  권의 책자들에서 유래했으며,

이  책자들을 함께 묶어 ’진실에 대한 증언(The fundamentals)’이라고 부

릅니다.

 

 이 근본주의파들은 현대파의 도전에 정면으로  맞서며 다음과 같은 입장

을 철저히 고수했습니다 : 성서는 문자적으로 틀림이 없다는 점, 예수님의

동정 탄생, 예수님의 육신의 부활,  예수님 보속이 우리의 죄를  대신한다

는 논리, 곧 다가올 예수님의 실제적 재림이 그것입니다.

 

 미국에서 근본주의가 발생한 주 원인이 현대주의  신학에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다른 교파의 주장을 반대하기 위해 존재했습니

다. 그 후로도 계속 근본주의는 부정적 - 반대를  위한 반대 - 위치를 고

수해 왔습니다.

 

 미국의 근본주의 흐름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단계

라는 말은 그것이 한 기간이 끝난 후 또 다른 기간이 시작됐다는 것을 뜻

하기 때문에 그 말이 아주 정확한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검토할 세 단계의 특성은 사실, 오늘날의 개신교 근본주의에 아직도 존재

하기 때문입니다.

 

 (1) 제 1단계 : ’투쟁’ 의 정신 상태

 

 제 1단계는 1900년에서 1930년 사이에 일어났던 근본주의파들의 운동을

예로 들어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천막 속에서의 회합과 부흥

회들이 성행했고, 근본주의파들은 대다수의 전통적 개신교파들을 도매급으

로 한꺼번에 부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의 근본주의파들은 개방적인 개신교파들이 성서에 등을 돌리고

결과적으로 ’세속’에 물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물론 이러한 근본주의자

들의 비난의 주요한 대상에 가톨릭이 빠지지 않았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

습니다.)

 

 첫 번째 단계의 특성은 ’투쟁’의 정신 상태였는데 그 예는 테네시 주의

데이톤 시에서 있었던 ’The Scopes’ 공판이었습니다. 이 공판은 천지 창

조론 대 진화론의 문제를 놓고 처음으로 벌였던 논쟁으로도 유명하며 이

사건은 나중에 영화화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현

재도 어떤 부류의 근본주의파들은 이런 종류의 투쟁의 정신 상태를 주 특

성으로 하고 있습니다.

 

(2) 제2 단계 : ’무교파적 교파’

 

 1930년에서 1960년 사이의 두 번째 단계에서는  몇몇의 근본주의파 그룹

들이 그들의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비교적 높은 학력의 소

유자들로서 개신교의 신학 주류를 개방적인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무교파적 교파’라 불리우는 근본주의파들이 새로  생겨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근본주의파들의 분파는 복음성가, 성서대학, 라디오 전교

프로그램 등을 이용하여 발전하기에 이릅니다.  

 

 첫 번째 근본주의파들의 세대가 예수님의 곧 있을 재림과 그가 세상을 심

판하실 것을 열렬히 기다리며 세속을 멀리했던 반면에, 이 두 번째 세대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근본주의는 이

두 번째 단계를 통해 그들만의 영구적인 신앙체제와 신학을 서서히 발전시

키게 되었습니다.

 

(3) 제3 단계: 매스컴과 미국주의의 적극적 ’이용’

 

 이 단계의 근본주의는 1960년대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매스컴을 사용하는 전교가 그 특징입니다. 예를 들자면, 목사로서 오랄

로버트(Oral Roberts),  렉스 험버드(Rex Humbard),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과 같은 거대한 스타들의 출현을 생

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악하므로 피해야 한다’는 기본적 신조를 가진 근본주의자들이 그

들의 전교 사업을 위해 ’세상’의 발명품을 이용하는데 능숙해졌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입니다. 과학을 무서워하고 사탄의 도구라며 믿지 못하던

사람들이 현대의 기술과학을 이용하여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을 쟁취

했다는 것도 모순입니다. 이것이 근본주의자를 비난하려는 말은 아닙니다.

 (사실 가톨릭의 입장에서 보면 근본주의자들이 크게 성공을 거두고 있는

선교 프로그램과 같이 방송 매체를 통해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는 데 있어

큰 성과를 거두고 있는 프로그램은 하나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20세기의 세상에 속한 -1960년부터 현재까지 - 이 세 번재 정통 교리주

의는 Moral Majority (근본주의파들의 세력 안에 형성된  정치적 그룹)와

같은 로비스트들을 통해 정치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지구의 종말을

기다리며 세속과의 접촉을 피하는 대신, 오늘날의 일부 근본주의파들은 세

상의 흐름에 영향을 주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후반기의 근본

주의는 미국적이라면 전적으로 모든 것을 지지했고, 그들 자신을 미국적인

것에 적응시켰습니다. 지금은 하느님, 국가, 국기, 과학기술 그리고 돈버는

것들이 모두 근본주의 신학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위의 사실로 미루어 그들이 성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가톨릭의 기

본적 교리를 부정하는 것들 예를 들면 필자가 앞에서 올린 글을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교황의 교도권에 대한 이야기에서 국가의 주권, 가톨릭과 과학의

역사적 관계를 말할 때는 현재의 과학 기술을,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을

트집잡을 때에는 관련도 없는 구약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고 고대 근동 지

방의 여신 숭배에 대한 낭설을 갖다 붙이는 것과 가톨릭 성당과 개신교 예

배당을 비교해서 비난할 때는 말도 안되는 우상 숭배 운운하며 표면에 내세

워 비난하나 실상은 경제적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것과 같은 그들의 관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근본주의의 공통된 경향에 대해서’- 가 다음의 글에서 이어집니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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