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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성 아우구스티노(은총의 박사) 카테고리 | 천주교
작성자이수근 쪽지 캡슐 작성일2008-06-24 조회수522 추천수2 신고
+ 찬미 예수님.
 
 
 
가톨릭 출판사 입니다.
 
 
추천해드리고 싶은 책입니다.
 
 

 

St Augustine-FOPPA, Vincenzo

1465-70. Wood panel. Castello Sforzesco, Milan

 

축일: 8월 28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St. Aurelius Augustinus

St. Augustine of Hippo, Bishop and Theologian

Sant’ Agostino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Born:13 November 354 at Tagaste, Numidia, North Africa (Souk-Ahras, Algeria) as Aurelius Augustinus

Died:28 August 430 at Hippo

Canonized: Pre-Congregation

Agostino = piccolo venerabile, dal latino = small venerable person, from the Latin
Doctor of Grace

 

 

 

Vision of St Augustin (detail)-CARPACCIO, Vittore

1502.Tempera on canvas.Scuola di San Giorgio degli Schiavoni, Venice

 

서양 사상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며 그의 사상적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록 지대하다.

하지만 성인의 젊은 시절은 충분히 세인의 상상을 불러 일으킬만 하다.

그러나 그가 회개한이후로는 참회자들의 모범과 신앙의 변호자로

그리고 탁월한 사목자와 신비가로 여생을 보낸 것만은 확실하다.

 

영성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의 생애는 사도 성 바울로의 말씀처럼

죄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깊게 체험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전통적으로 그를 은총의 박사(Doctor gratiae)로 불러 왔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가 은총의 필요성을 변호하고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기도는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하느님의 완전성과 무한성을 인식할때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흠숭하고 그분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그분 안에서 즐기는(frui) 것이었다

 

아우구스띠노는 354년 북 아프리카의 타가스테(현제 알제리와 튀니지의 국경)에서

로마 제국의 말단 관리였던 아버지 파트리치우스(Patricius)와 어머니 모니카(Monica)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죽기 얼마 전까지도 외교인으로 살았으나 어머니는 열심한 그리스도인으로 일생을 보냈으며

아우구스띠노가 마니교에 빠졌을 때나 방탕한 생활을 할 때에도

아들의 신앙생활에 늘 관심을 가지고  격려와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 성녀 모니카 축일:8월27일. 게시판606번,1335번.

 

 

그는 어릴 때부터 신앙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비록 세례는 받지 못했으나 그가 얻은 기도의 체험은 어린 아이로는 대단히 큰 것이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기도하는 법을 배워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마다 기도를 드리곤 하였다.

어느날 배가 몹시 아파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기도를 하고 나자 갑자기 나은 적이 있었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평범한 학생으로서 겁이 많았기에 선생님께 매를 맞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하였다.

청소년기부터 다소 방탕한 생활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그래도 한 때는 정결을 지킬 수 있도록 절제의 덕을 청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때의 기도는 혼신의 정을 다 바쳐 의지를 움직일만한 강렬한 기도는 아니었다.

마치 사도들이 스승과 함께 한 시간 동안 깨어있기를 원했으나

그들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던 그런 경우와 비슷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절제의 생활이 먼 훗 날에 오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후 다소 쾌락을 찾는 생활과 마니교 사상에 빠져 기도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다가

삼십 대 초반에 이르러 세례성사를 준비하던 중 이앓이를 심하게 하고 있었는데

"건강의 임자이신 주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더니 즉시 나은 일이 있어

그는 기도의 효과를 이런 식으로 실감나게 체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도 체험은 바로 자신의 회개였다.

그는 자기 회개의 은혜를 어머니 모니카에게 돌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아들의 회개를 위하여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 끊임없이 청원을 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홈에서 www.osakorea.or.kr)

 

 

Baptism of St Augustine (scene 11, east wall)-GOZZOLI, Benozzo

1464-65,Fresco, 220 x 230 cm,Apsidal chapel, Sant’Agostino, San Gimignano

 

교회의 위대한 교부이며 영성가인 성 아우구스티노는 354년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에서 태어났다.

젊은이로서 사상에서나 윤리적 행위에서나 명예와 쾌락만을 추구하고  

 

불안정한 생활과 마니교에 빠져 있었으나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와 희생,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도움으로 회개, 387년 세례를 받았다.

본국에 돌아와 금욕 생활을 했다.

 

서른 일곱살에 사제로 추대되었고, 5년 후에는 히포의 주교로 서품되었다.

33년 동안 양 떼의 모범이 되고 강론과 저술로써 그들을 가르쳤다.

그 당시의 오류를 거슬러 용감히 싸웠고 올바른 신앙을 대가답게 전해 주었다.

72세에 선종하기까지 호교론과 신학, 철학에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는 틈나는 데로 글을 썼으며 그의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로는 [고백록], [신국]의 저술이다.

"은총의 박사"라고도 불리우는 그는 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이자 박사이며 영성가이다.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340?-397)축일:12월7일

 

 

 

 

아우렐리오 아우구스티노

(Aurelius Augustinus354-430) 성인.

 

히포의 주교. 교회학자. 축일 8.28일. 북아프 리카 타가스테 출신

모친 성녀 모니카가 그리스도교 신자였으므로 그는 신앙의 분위기에서 성장,

카르타고대학 에서 수사학을 공부했는데 이 당시 그리스도교를 떠나 정신적 방황을 하였다.

15년간 지속된 방탕생활에서 아데오다투스라는 아들을 보게 되었다.

 

치체로의 를 읽고 감명받았으며(373년), 마니교를 통해 진리를 얻으려고 9년 간이나 시도,

383년에는 수사학 교사로 로마에 갔다.

 

 

이듬해 밀라노로 이주, 성 암브로시오와의 해후로, 그의 영향, 신플라톤주의,

그리고 성 바울로에 대한 독서를 통해 개종을 결심,

카시치아쿰에서의 침잠 후 387년 부활 전야에 세례받았다.

388년 타가스테에 일종의 수도원을 세우고 유명한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규칙을 만들었다.

 

391년 고향의 연로한 주교 발레리우스에게서 서품, 수도원 생활을 계속하였으나

곧 아프리카 교회문제의 중요인물이 되어

395년 발레리우스의 보좌주교를, 396년부터 사망 때까지는 그 곳 주교를 지냈다.

 

그의 탁월성은 그리스도교 진리에 대한 날카로운 이해에 있다.

사제기간 중 크게 3가지의 이단 즉, Donatus 이단, Pelagius 이단, Manichaeism 문제와 대결,

이를 통해 자신의 신학을 형성하였다.

 

교회와 성사, 성사적 은총 등의 문제와 관련된 교의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이를 통해 서양 신학이 형성되었다.

그에 의하면, 교회는 구성원들의 상호 자선행위를 통해 하나를 이루며

그 구성원 때문이 아니라 목적에 의해 신성하다.

 

교회 안에는 선한 자와 악한 자가 모두 있으며 최후의 심판 때까지 악한 자는 남아 있을 것이다.

교회 밖에도 선한 이들이 있지만 죽기전에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구원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성사의 집행에 있어서의 `합법성’과 `규칙’사이의 구분을 발전시켰다.

속권을 신국의 일부로 받아들이나 그것은 진정한 신에 대한 숭배와 정의에 기초를 두고 있는 한에 있어서이며,

이단과 분열을 극복하기 위하여 국가의 조력을 인정하나 사형제는 간곡히 금하였다.

 

 

후기에는 펠라지오주의 논쟁에 종사, 타락과 원죄, 그리고 예정설에 대한 교의를 발전시켰는데

특히 예정설은 말기의 저서에서 형식을 갖추어

뒷날에 루터·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가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단과의 논쟁 을 통한 저서외에 <고백록>과 <신국론> 등의 대작이 남아있는데,

전자는 개종까지의 자서전이며,

후자는 로마가 알라릭에 의해 함락(410년)된 이후에 씌어진 최초의 역사철학서이다.

 

방대한 <삼위일체에 관하여>와 자신의 문학작품을 정리한 등도 전하고 있다.

후대 철학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노의 영향을 실로 지대하여서

중세기부터 13세기에 이르는 철학의 전 내용과 성야 신학의 현재의 모습을 결정 짓게 하였다.

(가톨릭대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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