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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에 대한 이해 카테고리 | 성경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6-08-13 조회수1,240 추천수0 신고

부활은 구약시대에는 없었나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이후로

믿는 사람에게만 부활이 있나요?

우리 인간은 언제부터 부활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우리가 부활에 대해서 이해를 하려면 아마도 성경 전반에 걸쳐서 우리에게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먼저 있어야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성경은 우리에게 끝내 부활하리라는 희망과 믿음을 주는 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부활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제가 그동안 공부하면서 이해한 하느님의 

나라는 성장하는 나라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나라는 작은 

겨자씨가 땅에 심어져서 싹이 나고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되면 수많은 공중의 새들이 

깃들이듯이 그렇게 겨자씨가 자라는 것처럼 자라는 나라라고 알려주시고 계십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것입니다."(에페 4,13-14)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기까지 성장해야 한다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에 대한 이해도 우리들의 영적 성장에 따라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개념 안에서 구약성경에서의 부활에 대한 이해를 말씀드리면, 구약성경은

에제키엘서 37장 1절이하에서 이스라엘의 부활 환시에 대해서 설명을 하시면서 마른 뼈들

이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선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뼈들은 온 이스라엘 집안으로서 유배

라는 죽음에 직면해 있지만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듯이 그렇게 다시 살아날 희망이 있다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2마카 7,4과 12,43-44절에 부활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그럼 마카베오서가 쓰이

기 전에는 부활이 없었을까요? 저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실 태초에 지구가 하느님

에 의해서 생겨날 때 지금처럼 둥글게 지음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한계가 고 정도여서 성경에 쓰여진 대로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또한 지구가 둥글다는 걸 주장했던 갈릴래이와 갈릴래오는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구가 둥글다는 걸 우리가 안 것도 사실 얼마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을 가지고

부활도 이해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부활이라는 단어가 없었다고 해서

부활이 없었을까?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부활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부활이 없었을

까?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지구는 둥글다는 걸 최근에 알았지만 처음부터 둥글었

을지도 모르는 것처럼 그런 개념 안에서 이해해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다른 사람들은 다 죽었다고 표현되고 있으나 에녹만은 죽었다는 표현이 없고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는데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것(창세 5,24 참조)라고 하십

니다. 다음은 엘리야 예언자인데 엘리야 예언자도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하고 신약성경에도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실 때 모세와 엘리야 예언자가 오셔서 함께 이야기하셨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또한 루카복음 16장 부자와 라자오의 비유에서도 보면 아브라함은 천국

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인물들을 통해서 볼 때 구약시대에 아직 부활에 대한 이해가 없었어도 부활은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고 저는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부활은 육신의 부활에 대한 이해

이고 다른 방향에서의 부활도 있다고 봅니다. 성경은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다가 죽은 이

후의 부활만을 이야기하시고 계실까요? 저는 죽은 이후의 삶도 중요하지만 성경은 오늘, 지

금 여기서의 부활을 더 중요하게 말씀하시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서 "오늘 저희에게"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의 부활이 중요하지 않다면 예수님께서 굳

이 이 땅에서 부활하셔서 당신의 제자들을 만나주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

수님은 왜 이 땅에서 부활하셨고 왜 제자들을 만나주셨을까요? 우린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부활의 삶으로의 초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을 때 하느님께서는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담을 당신 앞으로 초대하셔서 아담이 자신의 삶의 모습을

성찰할 수 있도록 초대하고 계신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카인에게도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죠. 이 말씀 또한 카인이 스스로 어떤 죄를 지었는 하느님 앞에서 성찰

하고 새로운 삶을 살라는 초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초대를 받은 이들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핑게를 댔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하느님의 부활의 삶으로의 초대는 인간의 거부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포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당신의 사랑을 계시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예언

자들도 보내셨고요. 그러나 그들은 예언자들도 죽였고 하느님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

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마지막 비장의 카드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지요.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사는 삶의 모습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이

고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인지 직접 삶으로 보여주셨습니

다. 많은 가르침도 주셨고요.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어둠은 빛을 거부하

였습니다. 곧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죄인이라고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사셨던 모든 삶이 하느님의 뜻에 가장 합당하다고 인정해

주신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 부활하고 싶으냐? 그럼 내

아들이 살았던 삶의 모습대로 그대로 살아라. 그러면 너도 부활할 수 있다." 이것을 증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부활의 삶이란 예수님께서 철저하게 보여주신 삶, 내 뜻을 내려놓고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사는 삶인데 그 삶은

죽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맛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자아를 죽이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뜻을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

도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라고 고백하셨듯이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셔야만 부활이 가능하다는 것입니

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부활시키시고 싶으신지 우리는 그 마음을 이제는 알아야 합

니다. 얼마나 우리를 부활시키고 싶으셨으면 당신 아드님을 보내셨겠습니까? 


당신 아드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일을 하시면 결국 어떻게 되시리라는 걸 다 아셨음

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부활을 위해 아낌없이 보내주셨습니다. 이 큰 사랑을 우리는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하지 못하

고 있다면 나는 부활을 맛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부활은 내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시면서 당신의 사랑으로

나를 이끌어 가실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듯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부활 또한 알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삶은 죽

음이 없고 부활하리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대한 이해는 사랑에 대한 이해 기반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감히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동반하는 사랑을 이해하고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때에

만이 부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나를 박해하는 사람까지도 일곱 번

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이라고 용서할 수 있는 사랑 안에서 부활은 이해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의로운 이들이나 불의한 자들이나 모두 부활하리라는 것입니다."(사도 24,15 참조)

그러니까 우리가 죽은 이후 최후의 심판을 받으려면 의로운 이들이나 불의한 자들이나 모두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아무튼 다 부활해서 의로운 이는

하느님과 함께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불의한 자들은 불붙는 지옥에서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루카복음 16장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 안에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실 것입

니다. 


부자는 분명 죽어서 저승에 갔고, 거기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알려주시고 계시기 때문입

니다. 죽은 이후 내가 없다면 어떻게 그동안 내가 살았던 나를 알 수 있으며 내 형제들을 어

떻게 알 수 있으며 고통을 어떻게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다 이해는 할 수 없지만 내가 

또는 나의 어떤 모습이 부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지요? 루카복음 16장 부자와 

라자로를 묵상해 보시면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부활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죽은 이후의 부활과 지금 여기 이 땅에서의 부활로 두

가지로 이해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관심은 죽은 이후보다 '오늘, 여기,

지금'이 더 소중하고 값지며 오늘, 여기, 지금을 부활의 삶을 산다면 죽은 이후의 부활은 자

동이지만 부활해서 라자로처럼 아브라함 품에, 하느님 품에 우리는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를 지금도 부활로 초대하고 계시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드립시다. 아멘.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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