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묻고답하기

제목 Re:창세기6장1~4절 카테고리 | 천주교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08-20 조회수480 추천수0 신고

왜곡된 혼인 관계와 심판

 

(창세6,18)

1 땅 위에 사람이 불어나면서부터 그들의 딸들이 태어났다. 2 하느님의 아들들이 그 사람의 딸들을 보고 마음에 드는 대로 아리따운 여자를 골라 아내로 삼았다. 3 그래서 야훼께서는 '사람은 동물에 지나지 않으니 나의 입김이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사람은 백 이십 년밖에 살지 못하리라' 하셨다. 4 그 때 그리고 그 뒤에도 세상에는 느빌림(네피림, 나팔족)이라는 거인족이 있었는데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들로서 옛날부터 이름난 장사들이었다. 5 야훼께서는 세상이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 차고 사람마다 못된 생각만 하는 것을 보시고 6 왜 사람을 만들었던가 싶으시어 마음이 아프셨다. 7 야훼께서는 '내가 지어 낸 사람이지만, 땅 위에서 쓸어 버리리라. 공연히 사람을 만들었구나.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모조리 없애 버리리라. 공연히 만들었구나' 하고 탄식하셨다. 8 그러나 노아만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

 

하느님은 출애굽기 25장에서 31장까지에서 하느님의 성막을 어떠한 양식과 재료로 지어야 하는지에 관해 아주 상세하게 지시를 하십니다. 그리고 그 중간 28장과 29장을 할애하셔서 제사장 옷의 재질과 양식에 관한 설명을 끼워 넣으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정확하게 성막을 짓는 천과 금은 재료들을 축소하여 제사장의 옷을 짓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왜 성막을 짓는 재료와 식양 사이에 제사장의 옷의 재질과 식양에 관한 설명을 끼워 넣었는지 아시겠어요? 성막과 제사장의 옷은 같은 상징을 담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보면 성막을 싸는 천과 제사장의 옷의 재질은 정확하게 같은데 그 지성소와 제사장을 감싸는 천의 순서는 정반대입니다.

제사장의 에폿과 겉옷과 속옷을 만드는 양식과 재질은 지성소를 감싸는 세 겹의 천의 식양과 재질과 같습니다. 그런데 성막에서는 그 천들이 하느님의 영광의 임재가 나타나는 지성소 안의 법궤를 감싸고 있는 반면에 제사장의 옷에서는 지성소에 해당하는 열 두 보석으로 만들어진 제사장의 흉패가 가장 밖으로 나와 있고 그 아래에 에폿이 있고 다시 그 아래에 겉옷과 속옷이 위치 해 있습니다.

이렇게 성막과 제사장의 옷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감싸고 있는 것들이 정확하게 거꾸로 배열이 된 것은 성막이 하느님의 영광을 감싸고 있는 것이라면 제사장의 옷은 하느님의 영광을 밖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사장의 옷은 에제키엘서에서 보았던 것처럼 하느님의 혼인 계약 하에 있는 신부의 옷차림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삼단 논법에 의해 어린양의 신부인 성도들이 입고 있는 새하얀 세마포 옷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입고 그들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을 뿜어내는 존재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성경이 어떻게 정의하지요?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 하느님의 성품 등 하늘의 것들이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것을 하느님의 영광이라 한다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린다거나 하느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내어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성품, 즉 성령의 열매들이 향기로 풍겨져 나오게 될 때 그것이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내 는 것이며,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요.

그 말은 단순히 순종이나 복종의 차원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당신이 누리고 계신 좋은 것을 나누어주시고 공유케 하신다는 의미에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느님의 거룩한 것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문득 문득 보여 질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느님의 것들이 우리에게서 나타나게 될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것이고 그 때를 가리켜 하느님의 나라가 임했다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성도(聖徒)가 신부의 옷, 즉 하느님의 영광을 입게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인 성도는 선하시고 크시고 존귀하신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부어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당신의 생명력, 하느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그 분의 영광과 존귀와 기쁨과 행복을 동일하게 함께 나누는 존재가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의 신부가 되어 하느님과 한 몸이 되는 혼인 계약의 비밀인 것입니다. 마태복음으로 가보세요.

 

(마태19,56) 5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 고 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하고 대답하셨다.

 

이 구절은 단순히 이혼을 금()하는 사회법상의 경고가 아니라, 이 구절의 내용은 하느님의 혼인 계약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하나가 되셔서 당신이 누리시는 것을 모두 누리게 해 주실 것이라는 희망의 계약이며 그 계약은 반드시 이루어 질것이라는 복음의 메시지가 담긴 경고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신부가 입고 있는 그 영광의 세마포를 입게 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인지 성경에서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신부의 옷은 제사장의 옷이 담고 있는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고 제사장의 옷은 성막이 담고 있는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라 했지요? 따라서 우리는 먼저 제사장의 옷이 담고 있는 내용을 찾아서 성도가 입게 되는 세마포 옷의 의미를 밝혀 보겠습니다. 제사장의 옷에 관한 내용은 출애굽기 28장과 29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 중에서 출애굽 기 28장의 몇 구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출애28,13) 1 너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너의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나답, 아비후, 에르아잘, 이다말을 불러 내어 나를 섬길 사제로 삼아라. 2 아론이 입을 거룩한 옷을 영광스럽고도 아름답게 지어라. 3 내가 슬기로운 생각으로 가득 채운 재간있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 다가 사제로서 나를 섬길 성직자 아론의 옷을 지으라고 하여라.

 

여기 보면 제사장의 옷이 의미하는 것이 몇 가지로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의 옷은 하느님의 영광의 처소인 성막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따라서 첫 번째로 제사장이 하느님의 영광의 처소인 성막을 입고 있다는 것은 제사장들이 하느님의 처소를 자신의 처소로 삼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사장이 하느님이 임하시는 성막을 그들의 옷으로 입고 있다는 것은 하느님과 제사장이 함께 한 처소에 머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대 제사장은 하느님의 성막에 임하게 하고 따로 처소를 주지 않은 것입니다. 이 말은 대 제사장의 옷과 같은 신부의 세마포를 입고 있는 우리 성도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하신 하느님과 영원히 함께하게 될 것임을 미리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서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신랑이신 하느님의 신부로 서게 될 자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특권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2절을 보면 제사장의 옷은 그 제사장들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하느님은 우리 성도들을 당신의 옷자락으로 덮으셔서 그들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만드실 것이라는 상징인 것입니다.

영화롭다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나는 것이라 했지요?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의 선하시고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성품과 그 분이 누리는 모든 것들을 나누어 받게 되어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추하고 더러운 모습이 다 사라지고 아름다운 하늘의 것들로 다시 재창조 된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로 3절을 보면 제사장은 제사장의 옷을 입음으로 해서 그들이 다른 이들과 구별되어 거룩하게 됩니다. 제사장이 다른 이들과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제사장은 그렇게 제사장의 옷을 입음으로해서 세상에서 거룩하게 구별되어 하느님의 영광의 보좌인 지성소까지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대 제사장 이외의 세상은 지성소 안에 들어가게 되면 즉사(卽死)하게 됩니다. 유일하게 제사장 예복을 올바로 갖춰 입은 대 제사장만이 일 년에 단 한번 속죄일에 하느님의 영광이 임재하시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대 제사장은 그 순간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자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린양의 신부인 우리도 신부의 옷을 거룩하게 차려 입고 그렇게 하느님의 보좌에까지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3절이 함의(含意)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제사장의 옷을 차려입은 제사장에게는 기름이 부어집니다. 구약에서 성막의 기름, 성전의 기름은 항상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성도들에게 성령이 부어져서 영원히 하느님과 우리가 한 영으로 묶이게 됨 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하느님이 누리시는 모든 것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제사장 옷과 신부의 옷이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하느님의 신부들을 창조하셔서 그들과 당신이 누리시는 모든 선하고 좋은 것들을 나누실 것이라는 하느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에서부터 설명해 나가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가 된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바로 하느님의 신부인 교회의 모형으로 이 땅에 창조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존재했던 것은 하느님의 영광 이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 때에 하느님의 영광이 거처소(居處所)는 하느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물질과 공간을 만드시고 그 속에 존재하는 것들에게 하느님의 영광을 보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물질과 공간인 우주를 당신의 처소로 삼는 것을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천지 창조입니다.

그 중에서도 상징적인 하느님의 처소가 바로 에덴동산입니다.

하느님은 그 곳에서 아담과 하와와 함께 계시며, 말씀하시고, 교제하시고, 그들을 이끄시며 당신이 누리시는 모든 것을 함께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담에게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상징적인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나와 같은 왕이 라는 말이지요.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와 생명나무열매를 주심으로 해서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게 되면 하느님의 영광이 그들에게서 지속적으로 함께하게 됨을 암시해 주셨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명령을 지키면, 다른 말로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게 되면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되어 영원히 하느님과 함께 동행 하며 살 수 있다는 상징이 선악과와 생명나무 열매에 담겨 있는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백성들은 전지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게 되면 그 하느님의 성품과 하느님의 선한 것들을 그들에게서 반사하여 하느님처럼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곳을 우리가 하느님 나라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 때 인간은 하느님의 영광이 계시는 처소를 자신의 처소로 삼아, 다른 말로 하느님을 자신의 처소로 삼아 살게 되는 것이고, 그들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때에 인간은 자신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 하게 되는 것이고 그 말은 곧 聖徒가 하느님의 處所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최종 목표는 하느님이 인간의 처소가 되어 주시고 인간을 당신의 처소로 삼아 하느님께서 누리시는 모든 성품과 하늘의 좋은 것들을 공유하시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union christ 라 하지요.

그런데 인간들이 하느님 앞에서 네피림이 되고, 용사가 되고, 유명한 자가 되어 보겠다고 불순종의 길을 택하게 되자 그 모든 것들이 틀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은 그들에게서 떠나가고 인간은 혼돈과 공허와 암흑 속에서 죄와 허물로 죽은 자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인간과 우주의 역사를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림으로 보여주시고 그들에게 人生이라는 것을 허락함으로 해서 하느님의 은혜(恩惠)를 떠나게 되면 어떠한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인간들에게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느님 주신 믿음과 삶의 경험을 통하여, 성경에 기록된 불순종의 역사와 심판의 역사를 보면서 하느님께 순종하여 사는 길만이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인생과 역사와 신앙생활의 참 의미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믿음으로 하느님께 순종할 수 있게 된 자들을 모으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시고 그 곳에서 영원히 반역과 불순종을 모르는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하시는 하느님 나라를 향한 커다란 청사진을 가지고 이 역사와 우주를 경륜(經綸)해 나가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제사장의 옷은 하느님의 영광의 거처인 성막의 축소판이며 그 옷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성도가 입는 화려한 신부의 옷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확인해 둘 것이 있는데 그 것은 이 땅에 지어졌던 성막은 하느님 계시는 하늘 처소의 그림자이며 상징적인 것이었던 것이지 그 제한된 공간에만 하느님이 하신다는 그런 의미의 처소는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열왕상8:27) 27 그러나 하느님, 하느님께서 이 땅에 사람과 같이 자리잡으시기를 어찌 바라겠읍니까? 저 하늘, 저 꼭대기 하늘도 주를 모시지 못할 터인데 소인이 지은 이 전이야말로 말해 무엇하겠읍니까?

솔로몬이 참으로 멋지게 성전을 완성하고 나서 하는 말입니다. 자신이 그토록 멋진 聖殿을 지어놓았지만 어찌 하느님께서 그 성전(聖殿)에 한정된 거처(居處)를 가지시겠느냐는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의 성막(聖幕)과 성전(聖殿)은 하늘의 것의 모형으로 주어진 것일 뿐입니다. 성막과 성전이 하늘의 것을 상징으로 담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들은 실체가 오게 되었을 때 진짜가 아니라 모형(模型)’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반드시 무너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그 모형인 성막과 성전이 무너지고 진짜 하늘의 성막과 성전이 내려와 성도들에게 입혀지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영원하신 계획이라는 것을 신약과 구약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림자나 모형은 빛과 원형이 오게 되면 자연스럽게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을 잘 보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어떠한 실체의 모형으로, 그림자로 주셨던 것을 그 실체가 온 뒤에 파기해 버리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막과 성전이 그러한 것이고 희생 제사와 여러 가지 율법이 대표적인 것이지요. 희생 제사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 되심과 유일한 중보자로서의 제사장 되심으로 하느님 백성들의 죄가 사()해지게 되는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는 것 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은 희생 제사를 통하여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연성을 배워 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골고다 언덕에 그 희생 제사의 실체가 드려졌을 때 그 희생 제사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잘 나와 있지요? 그러므로 그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 드려지는 희생 제사는 오히려 하느님의 십자가를 모욕하는 무서운 죄가 되는 것이지요.

성막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막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미쉬칸이라는 단어가 70인 역에서는 그리스(헬라)스케네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은 그 스케네라는 단어를 장막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하느님의 백성들이 옛 장막을 벗고 새로운 장막을 덧입는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고후5:15) 1 우리가 들어 있는 지상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들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워 주시는 집입니다. 2 지금 육신의 장막을 쓰고 사는 우리는 옷을 입듯이 하늘에 있는 우리의 집을 덧입기를 갈망하면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3 우리가 그것을 입으면 벌거숭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4 이 장막에 머물러 있는 동안 우리는 무거운 짐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장막을 벗어 버리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늘의 집을 덧입음으로써 죽음이 생명에게 삼켜져 없어지게 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5 이런 일을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며 그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이 땅에서 장막을 입고 있는데 그러한 이 땅의 장막은 하늘의 장막, 즉 하늘의 처소로 덧입혀지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목표 지점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구약의 장막, 즉 율법과 하늘의 장막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네피림으로, 용사로, 유명한 자 되려는 모든 시도들을 다 벗고(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르겠다는 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옷을 입으라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하느님의 형상을 모형으로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모형을 반드시 벗고 진짜 원형인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비로소 복을 누리며 행복하게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의 참 장막은 이미 성도들에게 입혀져 있고 그 사실을 보증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라고 5절이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지금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그 하늘 제사장의 옷을 이미 입고 있는 것이고 어린양의 신부로서 그 화려한 세마포 옷을 이미 입고 있다는 말이며, 이미 하느님의 처소를 입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짜 성전, 진짜 장막, 진짜 하느님의 처소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2,1921) 19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20 그들이 예수께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 육 년이나 걸렸는데, 그래 당신은 그것을 사흘이면 다시 세우겠단 말이오?' 하고 또 대들었다. 21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그렇지요? 성경은 우리 성도들이 덧입고 있고, 덧입어야 하는 하늘의 처소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자신들이 하느님 앞에서 네피림으로, 용사로, 유명한 자로 서려고하는 율법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은혜를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이 입고있는 제사장 옷, 신부의 세마포, 하늘 처소, 하늘 성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 후의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을 볼까요?

 

(묵시21,14) 1 그 뒤에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2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맞을 신부가 단장한 것처럼 차리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3 그 때 나는 옥좌로부터 울려 나오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4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성된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어 하느님께서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장막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1,14) 14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여기서 계시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스케노오천막을 치다’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의 단어예요

그러니까 주님은 독수리 날개가 새끼들을 덮어 황무지에서 인도하고 보호하듯 당신의 백성들을 당신의 장막으로 덮어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며 하느님 나라에서도 영원히 우리를 당신의 장막으로 덮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성도들이 입고 있는 순결한 세마포를 가리켜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묵시19,8) 8 하느님의 허락으로 빛나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게 되었다. 이 고운 모시옷은 성도들의 올바른 행위이다.'

우리 성도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옳은 행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한 것들을 우리가 입고 하느님 앞에 선다면 우리가 정말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서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악취 나는 누더기를 입고 있는 자로 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입고 선 빛나고 깨끗한 옳은 행실이라는 세마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한 삶을 우리가 덧입고 만군의 왕 하느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우리를 목숨을 걸고 당신의 뜻에 순종한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아들 예수로 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한 삶을 사신 분이십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바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분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지옥의 무서운 저주를 홀로 받아 내셨습니다.

성부의 뜻이 곧 성자의 뜻이었고 성자의 뜻이 곧 성부의 뜻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가리켜 성자가 성부 하느님 안에, 성부 하느님 이 성자 안에 계시는 것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다른 말로 성자 하느님의 완전한 순종에 의해 성자 하느님과 성부 하느님의 뜻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상태를 서로가 서로에게 하는 상태인 처소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14,1011) 10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완성된 하느님 나라에서는 바로 우리 성도들이 이렇게 하느님 안에 하게 되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하시는, 완전한 뜻의 일치를 이루는, 온전한 순종을 하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사셨나요? 10절을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과 말이 전부 아버지 하느님께서 그 아들 안에서 행하시고 말씀하신 것으로 표현을 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바로 그렇게 아버지 하느님의 뜻 이 나의 뜻이 되고 아버지의 말이 나의 말이 되는 삼위 일체 속으로 초대가 된 자들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어떤 존재들이 서로 서로 상대방 속에 거하는 일체의 상태를 가리켜 서로가 서로를 가장 사랑하는 상태라고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아가6,3,7,10) 3 임은 나의 것, 나는 임의 것, 임은 나리꽃밭에서 양을 치시네. 7 너울 뒤에 비치는 그대의 볼은 쪼개 놓은 석류 같아라. 10 '이는 누구인가? 샛별처럼 반짝이는 눈, 보름달처럼 아름다운 얼굴, 햇볕처럼 맑고 별떨기처럼 눈부시구나.'

서로가 너무 너무 사랑해서 상대방의 뜻을 나의 뜻으로 기쁘게 받아들이고 서로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는 진정한 혼인 관계 속의 사랑을 가리켜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있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러한 하느님과의 혼인관계 속으로 들어가 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성도들은 하느님의 성품과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하느님의 사랑하심과 하느님의 선하심등을 우리 안에서 뿜어내며 하느님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15,5)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느님의 성품인 성령의 열매들은 이렇게 하느님의 내주(內住)하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옛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종종 우리 안에 하시며 우리를 조명하시는 성령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하며 자주 실패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러한 실수와 실패 속에서 우리가 영원 속에서 입게 될 새로운 몸을 대망(待望)하게 되는 것이고 결국 우리는 영원속에서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새로운 몸을 입고 하느님이 내주하시는 거처(居處)가 되어 그 분이 우리 안에서 맺으시는 열매를 아무런 저항 없이 주렁주렁 맺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새 창조를 반드시 이루어 내실 것이라는 것을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느님의 기운의 모습에서부터 차근차근 그림으로 성도들에게 계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한 천국의 현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임했습니다.

 

(요한14,20) 20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여기서 그 날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된 우리는 이미 하느님 안에 하는 들이 된 것이고 하느님은 그들을 거처로 삼아 그들을 통치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묵시록 21장의 새 하늘과 새 땅의 혼인잔치가 성령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이렇게 영적으로 이미 완성이 되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들어가 하나로 연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가 성도, 하느님의 백성, 왕 같은 제사장, 어린양의 신부 등 여러 가지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은 이미 영적으로는 하느님과 연합된 하느님의 신부요 거처가 된 것이고 지금 이 땅에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처소로, 장막으로, 그 분의 영광이 하심으로 그 분의 영광이 반사되어질 수 있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묵시13,6) 6 그래서 그 짐승은 하느님을 모독하기 시작했고 하느님의 이름과 하느님의 집을 모독했으며 하늘에서 사는 자들에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여기 보면 성경이 하느님의 장막은 곧 하늘에 하는 자들이다 라고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순결하시고 무흠(無欠)하신 하느님께서 기쁘게 하실 수 있는 하느님의 처소로, 장막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에페2,2122) 21 온 건물은 이 모퉁이돌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22 여러분도 이 모퉁이돌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져서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확실하지요? 그런데 그 일은 이미 운명적으로, 신분적으로, 영적으로 완성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실패하고 실수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또 일어서서 그 분의 처소로 지어져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 다. 그 말은 또 하느님께서 우리를 처소로 삼으셔서 당신의 영광을 우리를 통해 드러내시겠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고요.

그 부분에 관해 조금만 더 부연(附椽)을 해보면, 출애굽기에 보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는 이유가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출애15,13,17) 13 당신께서 손수 건지신 이 백성 아, 당신은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고, 힘있는 손으로 그들을 당신의 성소로 인도해 주십니다. 17 당신께서는 그들을 데려다가 당신의 산 위에 심으십니다. 야훼여, 이 곳이 바로 당신께서 계시려고 마련하신 곳, 주여, 당신께서 손수 지으신 성소가 아닙니까?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는 것은 그들을 하느님이 만들어 놓으신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라고 13절에 나오지요? 그런데 17 절에 보면 바로 그 일이 이스라엘 백성을 주님의 처소를 삼기 위함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영원한 처소를 주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처소로 삼는 다는 말과 동의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시고 신명기로 가보겠습니다.

 

(신명33,27) 27 태고적부터 계시는 너희 하느님, 너의 피난처, 당신의 영원한 팔을 아래로 뻗으시고 네 앞에서 원수를 몰아 내시며 '진멸하라' 하고 외치신다.

조금 전 읽었던 출애굽기에서는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는 이유를 하느님이 마련하신 처소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하셨는데 신명기에서는 바로 그 처소가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출애굽기 1517절로 가면 그 것이 바로 하느님이 우리를 처소 삼는 일이라고 합니다. 머릿속으로 그림을 잘 그려보세요. 하느님께서 우리의 처소가 되시고 우리가 또 하느님의 처소가 된다는 말이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처소를 주기 위함이라 해놓고 그 처소가 바로 하느님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를 그 분의 처소로 삼으시겠다고 하세요. 서로가 서로를 거처로 삼게 된다는 그 말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 삼위 일체 하느님 속으로 끌어넣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시편 91,9) 9 야훼를 너의 피난처라하고 지극히 높으신분을 너의 요새로 삼았으니

(시펀132,13) 13 야훼, 시온을 택하시어 여기에 계시기로 정하시며 이르시기를,

여기도 동일한 말씀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의 성품에 참여한 자로 성숙시켜 가시며 하느님과 연합할 수 있는 자로 만들어 내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계신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이루 시고자 하는 목표 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우리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하느님의 뜻을 나의 뜻처럼 순종하게 되는 현실을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 ‘새 사람을 입는다.’ ‘장막을 입는다.’ ‘처소를 덧입는다.’ ‘신부의 옷을 입는다.’ ‘제사장 옷을 입는다.’ ‘영광으로 옷 입는다’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옷 입는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옷 입는다’ ‘신의 성품에 참여 한다등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이미 그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 있는 자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장막으로 안전하게 덮여 보호를 받고 있는 자들, 그 분의 신부로 지키심을 받고 있는 자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어야 옳을까요? 이사야서 59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이사59,1618) 16 그의 눈엔 사람다운 사람 하나 보이지 아니하고, 중재하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으니 기막힐 수밖에, 그리하여 야훼께서는 당신의 팔만 믿고, 당신의 정의만을 집고 일어서신다. 17 몸을 감싼 갑옷에선 정의가 뻗어 나고 머리에 쓴 투구에선 구원이 빛난다. 몸을 감은 속옷에는 응징이 숨어 있고 그 걸친 겉옷에선 열성이 흩날린다. 18 사람의 소행대로 갚으시고 적들에게 진노하시어 원수를 갚으시리라.

 

이 구절은 중재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전투하는 병사의 옷차림에 비교하여 묘사를 해 놓은 장면입니다. 仲裁者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스스로 자기 의를 의지하시며, 그 자기의 의를 호심경(흉패)을 삼아 구원을 투구로 쓰시고 보수로 속옷을 삼으시고 열심으로 겉옷을 삼으시며 대적들과 전쟁을 하십니다.

속옷, 겉옷, 호심경(흉패) 투구(모자) 이게 누구의 옷차림입니까? 제사장의 옷차림이지요? 그 제사장의 옷차림을 전투하는 병사의 전신 갑주로 바꾸어 표현을 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유일한 중보요 제사장으로서 대 제사장의 의복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제사장의 옷을 입으시고 전쟁을 하십니다. 바로 우리 성도들의 죄와 싸우시고 그 죄에게 보복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보면 하느님께서 성도들에게 이러한 똑같은 옷차림을 요구하십니다.

 

(에페6,1117) 11 속임수를 쓰는 악마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12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 13 그러므로 지금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그래야 악한 무리가 공격해 올 때에 그들을 대항하여 원수를 완전히 무찌르고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14 그러므로 굳건히 서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15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고 16 손에는 언제나 믿음의 방패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 방패로 여러분은 악마가 쏘는 불화살을 막아 꺼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17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1데살5,68)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 있읍시다. 7 잠자는 사람들은 밤에 자고 술마시는 사람들도 밤에 마시고 취합니다. 8 그러나 우리는 대낮에 속한 사람이므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믿음과 사랑으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구원의 희망으로 투구를 씁시다.

이사야서에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옷과 동일한 옷입니다. 성경은 우리 성도들에게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으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들은 지금 우리 성도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촉구하는 것입니까? ‘너희는 이미 하느님의 신부로 혼인 계약이 되어 있는 자들이니 예수께서 의 흉배와 구원의 투구를 쓰시고 죄와 싸우셨듯이 너희의 삶을 정결하게 하라, 죄와 싸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죄와 싸우신 것은 죄라는 것이 예수님의 싸움 상대가 되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우리 하느님은 죄와는 전혀 공존할 수 없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종국(終局)에는 그렇게 죄와는 전혀 공존(共存)할 수 없는 온전히 순결하고 온전히 깨끗한 자들로 완성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지점을 목표지점으로 삼아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전신갑주를 입고 우리에게 덕지덕지 붙어 있는 불순종의 죄, 성공주의, 물질주의, 네피림의 망상, 거인 숭배 사상, 기복주의 등과 전투를 벌이는 군사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과 힘의 과시(誇示) 그로부터 얻는 비열한 쾌감, 이런 것들과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과 정혼한 이들의 올바른 이 땅에서의 삶인 것이고 그 삶을 가리켜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혼인 관계 속에는 하느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느님의 신실하신 계약이 담겨 있는 것이고 그 혼인 관계 속에 있는 하느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하느님께 순종하고 복종하는 하느님의 처소로 지어져 가는 삶을 살도록 되어 있기에 하느님 앞에서 네피림으로, 용사로, 유명한 자로 서려는 자들을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라는 혼인 관계의 왜곡으로 묘사를 한 것이고 그들이 저주의물, 심판의 물인 홍수로 다 멸해지는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 모습을 보면 우리가 하느님이 계시는 처소로 완성이 되어 하느님의 영광을, 하느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삶을 살 게 될 것이라는 것이 참으로 불가능 할 것 같고 희망이 없어 보이지요?

그래서 성경이 예수님께서 새로운 옷, 부활의 몸, 새로운 장막, 하느님의 처소로 옷을 입으시고 하느님의 영광의 보좌 앞으로 들어가신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히브9,1114) 1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존재하는 모든 좋은 것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사제로 일하시는 성전은 더 크고 더 완전한 것이며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창조된 이 세상에 속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창조된 이 세상에 속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12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 가셔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히 속죄받을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13 부정한 사람들에게 염소나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뿌려도 그 육체를 깨끗하게 하여 그들을 거룩하게 할 수 있다면 14 하물며 성령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흠없는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데나 죽음의 행실을 버리게 하고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하는 데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입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 장막, 참 처소, 참된 신부의 옷, 참된 제사장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이렇게 부활의 몸인 새로운 옷을 입으시고 하느님의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따라서 그 예수로 옷 입고 있는 우리들도 반드시 새로운 옷을 차려입고 하느님 처소로 들어가 하느님의 영광이 계시는 처소로 서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더러운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순결하고 아름다운 신부로 멋진 향기를 뿜어내며 하느님이 누리시는 모든 것을 함께 누리는 하늘의 백성들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 희망을 바라보며 오늘을 열심히 삽시다.

 

*참고로 공동번역성서를 사용하였습니다.

 원하시는 답 전체를 알려드리지 못했네요. 일부만 참고하시고요

다른 분께서 보완 답글주시기를 바랍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