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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신약 성경의 인물: 믿음과 신앙의 표상, 토마스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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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10-24 조회수1,425 추천수0

[신약 성경의 인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믿음과 신앙의 표상, 토마스 사도

 

 

열두 사도 가운데 의심과 불신, 불신앙의 대표자. 이는 토마스 사도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토마스 사도의 그런 인상에 곁점을 찍는 듯합니다. 오죽하면 영어 표현에 ‘의심 많은 사람’이나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의 ‘a doubting Thomas’라는 관용어까지 있을까요. 부족한 믿음과 의심, 불신으로 대표되는 토마스 사도입니다.

 

 

성경과 교부들이 전하는 토마스 사도

 

초대 교회 학자인 오리게네스의 증언에 따르면 토마스 사도는 고대 이란의 파르티아 왕국에서 설교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III,1 참조). 예로니모 성인은 토마스 사도가 파르티아와 여러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했으며, 인도에서 순교했다고 전합니다(「사도들의 생애」, 5장 참조).

 

인도인들의 칼과 창에 순교했다는 교부들의 증언에 따라 토마스 사도는 1972년 바오로 6세 교황 때 인도의 사도로 선포됩니다. 인도에서 왕궁을 건축할 때 목수로 일하며 많은 이에게 선교했다고도 전해지는 토마스 사도는 건축가와 목수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예수님께서 언제 어디서 그를 뽑으시어 사도로 삼으셨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공관 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열두 사도의 이름을 나열할 때 그의 이름이 언급되지만(마태 10,3; 마르 3,18; 루카 6,15; 사도 1,13), 토마스 사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나 내용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에 대해 좀 더 정보를 알 수 있는 복음서는 오직 요한 복음뿐인데 모두 네 차례 토마스 사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세 장면에서 토마스 사도가 어떻게 예수님의 사도로 변화되고 성장해 가는지 알립니다.

 

요한 복음에서 토마스 사도는 가장 먼저 “쌍둥이”(11,16; 20,24; 21,2)라고 소개됩니다. ‘토마스’라는 이름 자체에 히브리어로 ‘쌍둥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토마스 사도가 실제로 쌍둥이인지, 쌍둥이라면 누구와 쌍둥이인지는 복음서에서 더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요한 복음에서 가장 앞서 만나는 토마스 사도의 모습은 11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에서 나타난 일곱 표징 가운데 마지막에 해당하는,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이야기가 그 배경입니다. 복음서의 위치로 보면 중간쯤에 해당하지만, 이미 예수님에 대한 주변의 시선은 상당히 냉랭합니다.

 

베타니아의 라자로가 중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이 예수님께 전해집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오빠 라자로가 중병을 앓자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11,3)라고 전하며 예수님께서 어서 오시기를 희망합니다. 이처럼 마르타와 그 여동생 마리아, 오빠 라자로는 예수님과 각별한 사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11,5 참조).

 

하지만 웬일인지 사랑하는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예수님께서는 계시던 곳에 계속 머무르십니다(11,6 참조). 이틀이 지나고 나서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 유다로 가자.”(11,7)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 사이에서 난리가 납니다.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11,8)하며 떠나시려는 예수님을 말립니다. 이미 유다인들, 특히 유다 백성의 지도층들이 예수님을 해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한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라자로와 두 자매가 사는 베타니아는 유다 지역의 마을로 예루살렘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예루살렘 근처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극도로 위험한, 곧 죽음도 감수해야 할 상황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예수님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안위도 걱정되어 유다로 가시려는 예수님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11,11)하시며 재차 떠날 모습을 보이십니다. 이에 제자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습니다.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11,12). 계속해서 예수님을 설득하려는 제자들의 모습에서도 그곳으로는 가고 싶지 않은 마음, 예상되는 사건을 되도록 피하고 싶은 마음이 엿보입니다.

 

바로 이때 토마스 사도가 등장합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처럼 그 두려움 앞에서 물러나거나 망설임이 없습니다. 오히려 정확하게 자신의 결의를 밝힙니다.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11,16). 모두가 망설일 때 그는 결의에 찬 목소리로 다른 제자들을 독려합니다.

 

이런 토마스 사도와 견주어 베드로 사도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마르 8,29; 루카 9,20)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확신에 차 고백하던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분명 진실했었지만, 그 자신이 온전히 그 뜻을 알고서 표현한 고백은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토마스 사도 또한 굳은 믿음으로 제자들을 독려했던 외침은 틀림없겠지만, 예수님과 함께 죽을 각오로 외쳤던 말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전혀 알지 못하고 했던 말일 것입니다. 죽음으로 향하는 예수님의 수난 여정 안에서 다시금 깨닫게 될 고백입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두 번째로 만날 수 있는 토마스 사도의 모습은 최후의 만찬 때입니다. 최후의 만찬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십니다. 그리고 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당신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되었음을 제자들에게 설명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14,4). 예수님께서 제자들도 그 길을 가도록 초대하시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에 대하여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거듭하시니 당연히 제자들의 마음은 심란합니다. 바로 이 다음 상황에서 토마스 사도는 그런 제자들을 대신하여 솔직히 고백하듯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14,5)

 

토마스 사도의 물음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14,6-7). 곧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당신을 통해서만 아버지께로 갈 수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또한 앞으로 제자들이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인지 알리고 계시지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세 번째 모습에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보여 주려는 토마스 사도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예수님의 부활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자신들도 그런 운명에 처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을 피해 함께 모여, 있던 곳의 문도 모두 잠가 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안에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20,24). 바로 토마스 사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던 그의 말처럼 토마스 사도는 유다인들이, 또 죽음이 두렵지 않았던 걸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잃게 되어 두려움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상실감이 컸던 것일까요? 성경에서는 토마스 사도의 부재만 전할 뿐,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두려움도 없을 것처럼 보였던 토마스 사도도 예수님께서 붙잡히는 순간에는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쳤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현실로 다가온 죽음이 두려웠던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어찌하지 못하는 자신과, 두려워 떨고만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때의 토마스 사도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복잡한 심경으로 번민에 싸였을 그를 짐작해 봅니다.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으시고,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20,21-22 참조). 그리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토마스 사도를 만났을 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20,25) 하고 증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제자들의 증언을 토마스 사도는 곧이곧대로 듣지 않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20,25) 하며 제자들의 증언을 강하게 거부합니다.

 

여드레 뒤, 이날도 제자들은 문을 다 잠가 놓고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 사도도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때 다시 오신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이르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0,27).

 

사실 이를 표현한 많은 성화와는 다르게 성경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토마스 사도가 자신의 손가락을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직접 넣었다는 구절은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따라가 보면 예수님의 말씀 뒤로 토마스 사도가 자신의 손가락을 예수님의 상처에 넣는 것이 아니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0,28)이라는 고백이 뒤따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0,29)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나 강해서 이 때문에 토마스 사도가 의심과 불신의 상징으로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사도가 했던 이 고백에 머물러 봅니다. 비록 그는 제자들의 증언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을 직접 만난 순간 더 이상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에 대해서 그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란 그의 고백은, 사실 토마스 사도가 최초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한 사건입니다.

 

곧 예수님을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최초의 영예가 바로 토마스 사도에게 있습니다. 또한 토마스 사도의 이 고백은 복음서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 예수님의 말씀 바로 앞에 자리합니다. 그만큼 요한 복음사가가 토마스 사도의 고백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또 그의 고백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려고 했는지를 보게 됩니다.

 

다른 성경의 인물들처럼 토마스 사도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하며 예수님의 참모습을 알아보았고, 또 이를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 속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당신과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 토마스 사도의 그 모습을 다시금 마음속에 새겨봅니다.

 

* 최광희 마태오 - 서울대교구 신부.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을 담당하고 있다.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 대학원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하였다.

 

[경향잡지, 2018년 10월호, 최광희 마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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