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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인간의 시간, 하느님의 시간: 뜻을 이룰 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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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12-11 조회수317 추천수0

[경향 돋보기 – 인간의 시간, 하느님의 시간] 뜻을 이룰 이때

 

 

끝에서 나온다

 

날이 저물고 해가 저문다. 쏜살처럼 내달리는 시간의 실상을 아찔할 정도로 생생히 느끼고 있다. 곳곳에 과속 방지 턱이라도 세웠을 것을 하는 후회가 밀려들지만, 시간의 주인은 정속 주행의 원칙을 어긴 적이 별로 없으실 게다. 미련을 떨치고 보내 주는 것이 상책이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끝이라서 그렇지만 그보다는 끝이 잉태하고 있는 뜻밖의 신비 때문이다.

 

시작이 있어서 마침이 있으니 시작이 먼저요, 마침은 마지막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끄트머리에 가서 나와야 할 것이 비로소 나온다. 메시아도 이사이의 썩은 그루터기로부터 나온 새싹이었다. 구약이 끝나서 신약이 나온 것도 같은 이치다. ‘끝+나다’라는 우리말에는 이와 같은 인생의 경험과 철학이 담겨 있다. 그래서 동양의 지혜는 사유종시(事有終始), 물유본말(物有本末)을 말한다. 일에는 끄트머리와 시작이 있되 끄트머리가 있어서 시작이 있으므로 사유종시라 하는 것이다. 물건에는 밑동과 끄트머리가 있어서 ‘물유본말’이다. 맨 아래 밑동은 뿌리와 같고, 맨 끝인 끄트머리는 곧 머리와 같아서 모든 것은 여기서 시작된다.

 

끝에서 처음을 발견하던 놀라운 기쁨을 신영복은 이렇게 노래 불렀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예수님의 탄생도 어두컴컴한 밤이었더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인생에 아무리 짙은 먹구름이 몰려와도 ‘새날은 해 저무는 저녁 무렵에 시작된다.’는 사실만 알면 능히 헤쳐 나갈 수 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

 

사람은 태어나면서 제각각 세 가지를 받는다. 시간, 공간, 인간이다. 첫째, 영원한 시(時)의 어느 한 ‘틈’[間]을 받는다. 둘째, 가없고 무한한 허공[空] 가운데에서 어느 한 ‘틈’[間]을 받는다. 그리고 셋째, 먼저와 있던 사람들[人]이 그 틈[間]을 받는다. 예수님의 강생도 시간, 공간, 인간이라는 틈새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아무도 이 세 선물을 스스로 정할 수 없다. 영원한 시간, 무한의 공간, 그리고 무수한 인간 가운데 특정 ‘사이’[間]가 무작위가 아닌 섭리에 따라 지정되었다면 지금과 여기,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가!

 

모쪼록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사이’란 두 지점 간의 거리를 뜻한다. 좁은 공간에 무릎을 맞대고 모여 있어야 유쾌한 사이도 있고, 되도록 멀리 떨어져 있어야 편한 사이도 있을 것이다. 가까이 있어야 편한 사이가 ‘좋은 사이’고 가까이 있으면 불편한 사이가 ‘나쁜 사이’일 터. 영원과 무한과 무수 사이에서 옷깃을 스쳤다면 이만저만 대단한 인연이 아니다. 한 번 가면 다시 올 수 없고, 언제 떠날지 모르는 인생에게 새해가 주어진다면 어찌해야 도리이겠는가. 너와 나, 우리 사이는 한사코 좋아야만 한다.

 

 

오늘을 알면 시간과 공간, 인간이 달라진다

 

한편 성경은 처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마지막 날에 대한 이야기로 끝맺는다. 그런데 성경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날은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오늘’이다. 오늘보다 더 중요한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구세사의 모든 사건은 오늘의 사건이다. 천사가 목동들에게 알려 준 구세주 탄생의 날도 오늘이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나셨으니 …”(루카 2,11). 주님께서 친히 밝혀 주신 그날도 오늘이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시편 2,7).

 

하느님의 음성이 들리는 날도 오늘이요, 그래서 조심해야 하는 날도 오늘이라고 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시편 95,7-8). 예수님이 자캐오의 집에 들어가신 날도 오늘이었고(루카 19,5), 그 집에 구원이 내린 것도 오늘이었다(루카 19,9 참조). 성경에서 오늘이라고 한 말은 우리에게도 해당된다고 똑똑히 씌어 있다(히브 3,13 참조).

 

도대체 오늘이 어떤 날이기에 성경의 그날은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하필 오늘이라고 하는가? 오늘이란 영원이 오롯이 담긴 하루라서 그렇다.

 

하나의 물방울이 온 하늘을 담고 있듯이 하루 속에는 영원이 깃들어 있다. 지금은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하면서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종당에는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하루를 갖지 못하여 사라지고 말 것이다. 오늘 하루를 길게 다 살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을 흘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루’, 평범하나 경이로운 말이다. 하루라는 말, 흔하지만 무섭다. 다석 류영모 선생은 오늘을 “오, 늘이여!”라며 자주 감탄하였다. ‘오’는 감탄사, ‘늘’은 영원이란 뜻이다.

 

 

영원한 하루의 모범

 

오늘 하루를 잘 지내면 얼룩졌던 어제라도 밑거름이 되고, 막막하던 내일에 징검다리가 생긴다. 요한 복음이 전해 준 예수님의 첫 하루를 들여다보자. 카나의 혼인 잔치(요한 2,1-13)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오늘’을 대하는 태도가 참으로 비범하다.

 

신나는 혼인 잔치에 그만 술이 떨어졌다. 어머니 마리아가 남의 위기를 자신의 안타까움으로 끌어안고 아드님에게 도움을 청한다. “포도주가 없구나.” 아들이 해결해 줄 것을 내심 바란 것이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잖아도 속 깊고 사리 분명한 아들이 어렵기만 했는데 이 정도 반응이었다면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마리아는 고개를 돌려 일꾼들에게 말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시든지 마시든지 그건 알아서 하십시오.’라는 뜻이다. 꽉 붙잡고 목청을 높이는 대신 맡겨 드리고 기다려야 그분의 때가 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심전심, 예수님께서는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이르시며 행동에 나서신다. 조금 전만 해도 아직 아니라더니 어찌된 일인가? 하느님의 때는 째깍째깍 흐르는 그런 시간이 아니다. 그분의 때는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이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올 수도 있고, 아니 오기도 한다.

 

‘살든지 죽든지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이는 예수님 평생의 기도였고 지상 최후의 기도였다. 그리스도의 기도였으므로 그리스도인이 날마다 바쳐야 하는 기도다. 살려 달라는 기도는 믿지 않아도, 배우지 않고도 누구나 바칠 수 있지만, ‘뜻대로 하소서.’는 결코 아무나 바칠 수 없다.

 

술이 떨어졌다면 흥이 식어 버렸다는 말이고, 살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는 소리다. 이런 상황에서 남의 문제를 자신의 곤란으로 부둥켜안고 집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달려갔던 지혜로운 마리아. 손가락을 넣어 휘휘 저은 것도, 무슨 주문을 왼 것도 아니었는데 ‘부어라!’ 하면 붓고, ‘주어라!’ 하면 갖다 준 슬기로운 일꾼들이 아니었으면 그날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팍팍한 세상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준 기적은 일어날 수 없었고, 주님의 때도 아직 멀리서 서성거렸을 것이다. 이거야말로 나의 문제라고 부둥켜안을 때, 제 주관을 앞세우는 일 없이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단순하게 움직일 때 주님의 때가 차오른다.

 


무엇을 끝낼 것인가

 

한때는 꽃자리, 그러다 꽃 진 자리에 열매가 달리듯 끝낼 것을 끝내야 새것이 나온다고 했다. 영원의 한 조각인 시간, 광대무변의 한 지점인 공간, 그리고 그와 같은 시간과 공간을 나누고 있는 너와 나, 인간. 강생의 신비가 벌어진 이 경이로운 틈새에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끝내서 무엇을 오게 할 것인가. 각자 알아서 해야 할 일이겠지만 다만 한 가지. 시간과 공간과 인간을 무디게 만드는 타성은 끊어서 끝내고, 끝내서 꼭 없애도록 하자.

 

더러운 것인데도 더러운 줄 모르고, 부끄러운 것인데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무서운 것인데도 무서운 줄 모른다면 그 시간과 공간과 인간은 송두리째 쓸모가 없게 된다.

 

옛사람들과 다르게 우리 삶에서 점점 고갈되어 가는 능력이 있다. “감동하고 감사하고 감내”(박노해, ‘하루’)하는 힘이다. 속으로 안으로 이 셋을 길러 하루하루 감동하고 감사하고 감내함으로써 주님의 때, 주님의 날, 하느님 나라에서 살아가 보자. 다른 것 말고 이 세 가지를 서로 빌어주며 다 함께 새날을 맞이하자.

 

[경향잡지, 2019년 12월호, 김인국 마르코(청주교구 연수동 본당 주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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