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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인간의 시간, 하느님의 시간: 새롭게 다르게 하느님이 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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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12-11 조회수319 추천수0

[경향 돋보기 – 인간의 시간, 하느님의 시간] 새롭게 다르게 하느님이 오신다

 

 

성경의 시간관을 되짚어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복음의 기쁨」이었다. 가톨릭 교회의 21세기를 열어젖힌 문헌에서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하다”(222항 소제목)는 말을 접했을 때부터 아둔한 머리에 생각이 가득찼던 것이다. 공간보다 위대한 시간이라면 과연 성경의 시간이란 어떠한 것일지 궁금했고, 마침 구약 성경의 독특한 시간관을 되짚어 볼 기회가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구약의 시간관만 잘 이해해도 구약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현대인의 공간적 시간관

 

흔히 시간은 ‘흐르는 강물’에 비유된다. 이것은 시간이 일직선의 공간에서 순서대로 흐른다는 생각이다. 이를 ‘선형적’ ‘공간적’인 시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에 관한 말은 ‘공간에 빗댄 것’이 많다. 이를테면 ‘시점’(時點)이란 말은 특정한 시간을 마치 공간의 한 점(點)에 빗대는 말이다. ‘시간’(時間)이나 ‘시차’(時差)도 그렇다. 공간적 의미의 ‘사이’[間]나 ‘차이’[差]라는 표상으로 특정한 시간의 양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시간을 우리 앞에 놓인 공간처럼 이해한다. 우리 앞에는 이런 공간들이 계속해서 놓여 있을 것이다. 특정한 시간을 통과하면 그 다음에는 다른 시간이 나오고, 그런 식으로 끊임없이 미래의 새로운 공간이 내게로 와서 과거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며 산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그래서 ‘앞’은 ‘미래’고 ‘뒤’는 ‘과거’로 표상된다. 이렇게 시간을 이해하는 데는 오늘날 동양과 서양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동시성, ‘지금 여기’에서 체험되는 역사

 

그런데 구약 성경의 히브리인들은 시간을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히브리인들은 역사를 연대순에 따라 직선적으로 건조하게 나열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에 체험한 중요한 사건의 의미를 지금 다시 체험하는 것이 역사다. 그래서 과거의 체험은 특정 시점에 일어나서 완료되어 버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는 지금 체험되는 현재적 사건이다.

 

예를 들어 보자. 신명기 31장에는 모압의 계약 갱신식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주님과 맺었던 계약을 후대에 이르러 상기하거나 갱신하는 의례에서 낭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후대에 이 이야기를 듣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들은 과거 시점에 주님과 모세가 맺었던 흘러간 사건에 관한 기록을 그저 듣고 있을 뿐이라고 느꼈을까?

 

아니다. 독일의 성경 학자 노트(M. Noth)는 “언제나 마치 이스라엘 청중들이 율법을 처음으로 듣는 듯이” 그 이야기를 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명기 5장의 십계명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마치 그들 자신이 호렙 산에 올라가 있듯이 옛 이스라엘과 동일시되었다.”고 보았다. 시간은 과거에 흘러가 버린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생생히 체험되는 사건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그들에게 과거 사건은 흘러가 버린 것이 아니다. 모압의 계약 갱신식 이야기나 십계명 이야기가 낭독될 때,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그때의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오셔서 가르침을 주신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차원의 트라우마를 떠올려 보면 이런 시간관을 이해하기 쉽다. 한 개인이 유년기에 겪은 깊은 상처는 그 사람에게는 그저 과거의 흘러간 옛 사건이 아니라, 마치 1분 전에 일어난 사건처럼 그 사람의 일상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다고 한다. 현대 한국인들은 과거 일제 강점기의 치욕적 사건을 여전히 현재 진행의 사건으로 생생히 받아들이지 않는가? 유다인들은 나치의 홀로코스트 대학살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히브리인들에게 역사란 본질적으로 신의 구원사이며, 그것은 ‘현재에 체험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역사적 체험이란 현재적인 사건이기에 ‘동시적인 사건’이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속한다. 이스라엘의 독특한 종교는 그들의 독특한 시간관이 배경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선형적 시간관의 위험성

 

영국의 성경 학자 스캇(B. Scott)은 구세사를 지나치게 선형적이고 공간적으로 사고했을 때,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나 신학적 진화론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예컨대 창조, 홍수, 창세기의 선조들, 탈출, 십계명, 판관, 임금, 예언자, 유배, 귀환, 예수님 시대, 그리스도교 시대 등을 저마다 독립되고 개별적 공간으로 이해한다면 성경의 가르침을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시기들은 뚝뚝 끊어져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런 모든 시기에, 곧 인간 역사의 모든 세대에 인간에게 다가오셔서 체험을 통해 가르쳐 주신 분은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런 시기들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것을 봐야 한다. 이 모든 세대를 하나의 하느님, 하나의 가르침, 하나의 역사가 꿰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하느님과의 관계는 시대마다 현상적으로는 구별되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창조의 하느님께서 탈출 사건을 일으키셨던 것이며, 바로 그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가르침을 주셨고, 외아들 예수님도 보내셨던 것이다. 교회사를 통해 활동하셨던 분도 바로 그분이시며,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시다.

 

 

순환성, 우리 앞에 있는 과거

 

히브리적 시간관의 둘째 특징은 순환성이다. 현대인들은 미래는 앞에 그리고 과거는 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독일의 성경 학자 보만(T. Boman)은 히브리적 표현이 이와 정반대임을 지적하였다. 히브리어 ‘케뎀’(םדק)은 공간적으로 ‘앞’(in front of)을 의미하지만, 시간적으로는 ‘과거’(past)를 의미한다. 히브리인들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보고 서 있는 셈이다. 히브리어 ‘아하르’(רחאַ)는 공간적으로 ‘뒤’(behind)나 시간적으로 ‘다음’(after)을 의미하지만 이 말에서 파생된 추상 명사 ‘아하리트’(תירחאַ)는 ‘가장 끝’을 의미하여, ‘결과’, ‘후손’, 그리고 시간의 가장 끝인 ‘미래’(future)를 뜻한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들은 그저 ‘과거의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앞에 있는 이들로서 일종의 선구자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을 뒤쫓아 가는 사람들이다. 이런 식으로 사고하면 후손이란 우리 뒤를 쫓아오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후속 세대’, ‘후계자’ 등의 일부 우리말 표현에도 이런 식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어, 한국인들은 히브리적 시간관을 조금 용이하게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시간의 순환성은 시간의 동시성과 짝을 이룬다. 과거 사건은 단순히 흘러간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사건이며(동시성),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사건은 미래에 그렇게 체험될 사건이 된다. 그렇게 계속해서 동시적으로 체험되기에 시간은 순환적이다. 창세기의 선조들과 예언자를 부르신 바로 그 하느님께서 역사에 여러 번 오셔서 현상적으로는 조금 다르게 보일지 몰라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가르침을 계속해서 주셨고(순환성), 미래에도 그분께서 오실 것이다. 자비로운 하느님께서는 각각의 시공간에 가장 적절한 가르침으로 인간을 가르치실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열린 미래

 

이제 독자들은 ‘미래는 우리 앞에 놓여 있으나 우리 뒤에 온다.’는 역설적 표현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히브리적 시간관에 따르면 이 말은 전혀 어렵지 않다. 과거는 우리 앞에 있다. 과거는 완결되고 폐쇄된 것이 아니라, 순환적으로 지속되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사건이 지금 일어나며(동시성) 앞으로도 하느님께서 계속해서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가르쳐 주실 것이기에(순환성) 우리의 미래는 과거와 같이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과거도 미래도 열려 있다. 과거 사건의 어떤 의미라도 미래에 새롭게 다시 드러날 것이다.

 

 

새롭다는 것

 

구약 성경에서 ‘새롭다’는 것은 무엇일까? 히브리어로 ‘새롭다’를 뜻하는 ‘하다쉬’(שׁדח)에서 초승달을 의미하는 ‘호데쉬’(שׁדוֹח)라는 말이 나왔다. 호데쉬와 하다쉬의 관계를 잘 보면, 구약 성경에서 ‘새로움’이 어떤 의미인지 깊이 깨달을 수 있다. 히브리적 사유에서 새롭다는 것은 마치 한 달에 한 번씩 새 달이 뜨는 것과 같다. 새로 뜨는 달은 사실 한 달 전에 떴던 바로 그 달일 뿐이다. 시간이 흘러 새롭게 드러날 뿐, 달의 본질은 그대로이다. 다만 새로운 맥락에서 새 모습으로 드러날 뿐이다.

 

주님의 거룩함을 예로 들어 보자. 하느님의 거룩함은 완전하시고 영원하시다. 태초의 창조와 이집트 탈출 사건, 시나이 산의 계약 등에서 이미 거룩함이 완전하고 충분하게 드러났다. 그러므로 앞으로 새롭게 드러날 거룩함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부족한 인간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깨닫지 못하고 죄에 빠진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인간과 역사를 함께하시면서 자애로운 부모님처럼 계속해서 ‘하다쉬’하게(새롭게) 가르쳐 주신다. 하지만 하느님의 하다쉬(새) 가르침은 사실 태초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 백성의 임무는 역사에서 맞닥뜨리는 새 문맥에 적절하게 ‘새로운 다름’을 정의하고 실천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분의 가르침을 잘 식별하고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공간보다 시간에 초점을 두면서 또 한 번 새해를 맞이해 보자.

 

*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고대 근동과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평신도 신학자이다. 주교회의 복음선교위원회 위원이며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 위원이다. 저서로 「구약 성경과 신들」, 「신명기 주해」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9년 12월호,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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