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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하느님 뭐라꼬예?: 바벨탑, 그리고 아브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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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4-02 조회수609 추천수0

[하느님 뭐라꼬예?] 바벨탑, 그리고 아브라함

 


바벨탑의 배경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창세 11,4)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바벨’이라는 말은 본디 히브리어로 ‘밥 일라니’, 즉 ‘하늘의 문’이라는 뜻의 단어에서 유래하는데, 여기 바벨탑 이야기에서는 ‘뒤섞다’, ‘어지럽히다’, ‘혼란하게 하다’는 뜻을 지닌 동사 ‘발랄’과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비롯한 모세5경이 기원전 597-538년 바빌론 유배 기간에 기록되었다고 볼 때, 이 바벨탑 이야기는 ‘바빌론제국’을 염두에 둔 것으로 여겨집니다. 바빌론은 당시 많은 나라를 수중에 넣고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망을 지닌 대제국으로서 탑과 같은 높은 건축물로 유명했던 나라였습니다. 또 “그리하여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11,3ㄴ)고 한 성경본문대로 건축용 석재는 부족했지만 대신 벽돌과 역청이 풍부한 나라였습니다.

 

“온 세상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들을 쓰고 있었다.”(11,1) 창세기의 저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언어를 쓰는 꿈과 같은 이상(理想)’을 바벨탑의 배경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러한 이상이 현실과는 너무나 다른 이유, 곧 인간이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많은 언어를 사용하게 된 원인으로, 교만한 인간이 하느님을 모르는 채 높은 탑을 세워서 그러한 분열의 결과로 이어졌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외면한 사람들의 꿈과 이상(理想)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창세 11,4) 같은 말을 쓰는 인간들이 서로 흩어지지 않고 함께 살고자 하였습니다. 공생(共生)과 일치(一致)를 향한 인간의 꿈과 이상은 우선은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보라, 저들은 한 겨레이고 모두 같은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일 뿐, 이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11,6-7)

 

창세기는 마치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일치와 그 일치로 인한 행동을 두려워 한 나머지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고 성읍을 세우던 일을 그만두게 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심술쟁이라서 그러하셨다는 것입니까? 창세기의 저자는 하느님의 존재를 무시한 채 자기 나라들만의 번영을 꾀한 사람들의 잘못된 욕망을 지적하고자 한 것입니다. 나아가 그는 하느님 없는 일치를 추구하고자 한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질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추구하는 번영은 하느님의 존재를 무시하고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세상의 발전은 하느님에 대한 인식과 긍정 안에서 이루어질 때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진정한 발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망각하고서 추구하는 신앙인들의 행복과 발전, 그리고 하느님을 외면하고서 시도하는 신자들의 일치와 친교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나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레지오 단원들과 쁘레시디움의 진정한 일치와 발전도 2차 주회와 같은 회식과 단합에 있기보다도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기도와 복음나누기, 곧 복음적 친교와 같은 ‘신앙의 시간’(信仰時間)에 있음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느님의 부르심

 

창세기 12장부터 믿음의 성조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일흔다섯 살이었다.”(창세 12,1-4)

 

아브라함은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낯선 지역으로 길을 떠나야 했는데,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가족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길을 떠나, 마침내 약속의 땅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란에서 가나안에 이르는 길은 약 500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500킬로라면 오늘날 차로 가도 만만한 길이 아니죠. 그러하니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멀고도 험한 길이었고, 뿐만 아니라 위험천만한 길이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아브라함은 늙은 나이로, 기력이 약한 몸으로,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길을 나서야 했던 것이지요.

 

하느님의 말씀만을 믿고 목숨을 걸고 길을 나선 아브라함에게서 우리 신앙의 모범을 봅니다. 우리의 신앙도 아브라함처럼 목숨을 걸고 길을 나서는 여정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훗날의 영원한 생명을 내가 믿고 희망한다면, 그를 위해 지금의 목숨을 거는 투신의 생활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의 응답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창세 12,7)

 

“그는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창세 12,8)

 

자신의 정든 고향과 친족을 남겨두고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던 아브라함의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던, 위험이 가득했던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길을 떠난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으로 이어지게 될 땅의 상속을 약속하셨습니다. 그토록 험한 길을 걸었건만, 그렇게 힘든 길에서도 주님께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고 그분을 찬양하는, 곧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다 맡겨드리는 자세를 잃지 않았던 아브라함, 그런 그에게 하느님은 풍성한 축복을 내리셨습니다.

 

‘네 목숨을 걸고 길을 나서라’ 하셨던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한 축복의 약속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건 여정의 곳곳에서도 감사의 제사를 봉헌하며 당신의 길에 변함없는 충실을 보인 아브라함에게 하느님께서는 축복으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아브람은 복을 받으리라. 적들을 그대 손에 넘겨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창세 14,19) ‘조카 롯과 그 일행들’을 적들의 손아귀에서 용감하게 구한 아브라함에게 한 살렘 임금 ‘멜키체덱’의 말씀이 그러한 하느님의 축복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찬미받으소서’는 히브리말로 ‘복을 받으리라’와 같은 말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나의 응답으로 이루어집니다. 나의 목숨을 걸고 미지의 세계로 길을 나서는 자세가 그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본받아 신앙의 응답에 충실한 내가 될 때, 훗날 하느님의 크신 축복이 함께 할 것입니다. 내 삶의 순간순간에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에 나는 어떤 응답을 드릴 것입니까?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4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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