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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재 게시] 성직자의 독신 생활은 바람직할까?-----현정수 신부 카테고리 | 천주교
작성자유타한인성당 쪽지 캡슐 작성일2017-01-27 조회수7,270 추천수0

 

 

q 성직자의 독신 생활은 바람직할까?---현정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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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타한인성당 [kccu] 쪽지 캡슐

2012-07-22 ㅣ No.9731

성직자의 독신 생활은 바람직할까?

 

 

구원의 진리를 설교하는 사람이자 덕행의 모범자인 성직자는 그 직무를 완전히 수행하기 위해서 일생을 독신으로 보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교회법으로 성직자에게 일생을 독신으로 지낼 것을 엄명합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성직자가 복음전파와 신자들을 가르칠 직무를 완수하려면 반드시 동정의 정결을 지켜, 그의 영혼은 물론 육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 참조)


성서적 논거

예수께서 몸소 동정의 모범을 보이신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하늘나라를 위해 동정을 지키는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처음부터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또 하늘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들여라" (마태오 복음 11장 11-12절)

즉, 하늘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동정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으니 할 만한 사람은 실행하는 것이 좋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누구나 다 의무적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숭고한 목적을 위하여 금욕생활을 지망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한 권고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일생동안 동정을 지켰고, 또 그것을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습니다.

"
나는 여러분이 아무 걱정 없이 지내기를 바랍니다. 결혼을 안하는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의 마음에 들까 하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결혼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아내의 마음에 들까 하고 세상 일을 걱정합니다." (고린토 전서 7장 32-33절)

예수께서는 동정을 귀하여 여기셨습니다. 자신이 몸소 일생을 동정으로 지내셨고 동정녀 마리아를 어머니로 삼으셨고, 동정인 세례자 요한을 선구자로 정하셨으며, 제자들 가운데서 정결의 덕이 뛰어난 사도 요한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주 예수께서는 지상에서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도 동정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
그들은 옥좌 앞에서,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노래는 땅으로부터 속량된 십사만 사천 명 외에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다. 그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는 이들이다. 사실 그들은 숫총각들이다.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니는 이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과 어린양을 위한 맏물로서 사람들 가운데서 속량되었다." (요한 묵시록 14장 3-4절)

사도들도 베드로 외에는 결혼하였다는 증거가 없으며, 베드로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는 아내와 별거하였습니다. 그가 주께 대한 충성을 말할 때,

"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랐습니다." (마태오 복음 19장 27절)

라고 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아내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모든 것을 다 버렸다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가 이 말을 한 바로 뒤에, 주께서는 당신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데, 버리기가 어려운 대상 중에 ''아내''를 포함시키셨습니다.

"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아내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태 19,29)

베드로가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버렸다는 말은 아내와도 헤어졌다는 말입니다.(개신교 측에서 한국어판 성서에는 ''아내''라는 말이 삭제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대처(帶妻)주의를 변호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있던 아내도 주님을 위하여 떠나 보내기도 하는데, 하물며 성직을 맡으려는 사람으로서야 처음부터 동정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예수께서 독신을 강요하신 것은 아니지만, 말씀과 행동으로 이를 적극 권장하셨으므로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를 점차 성문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결혼한 사람도 성직을 맡아 볼 수 있었지만, 한 번 사제직에 서품된 후에는 별거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2세기의 성 이냐시오, 유스티노, 티치아노, 3세기의 테르툴리아노와 오리제네스, 4세기의 에우세바노와 치릴로 등의 서간 및 저서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로니모는 "주교나 신부나 부제는 미혼자나 홀아비 가운데서, 적어도 사제직에 서품된 뒤부터는 앞으로 계속해서 동정을 지킬 수 있는 사람 가운데서 선택되었다" (Ep. ad pammach)라고 하였습니다. 또 요비니안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주교 재직 중에 자식을 낳게 되면 계속 주교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줄 압니다. 만일 그가 이로써 유죄판결을 받게 되면 그는 남편으로서 존경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간음자로서 단죄를 받을 것입니다"(Adv. Jovin., lib I) 그는 또 덧붙여 말하기를 "여러 동방 교회와 이집트와 로마성좌 아래 있는 여러 교회에서는 반드시 미혼인 사람 가운데서 성직자를 등용합니다. 기혼자일 경우에는 그 날부터 결혼생활을 중지해야 합니다."(Adv. Vigilantium)라고 말했습니다.

성 에피파니우스도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은 교회의 차부제, 부제, 사제, 주교직에 임명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초창기에는 미혼인 사람 중에 소명이 드물었으므로 기혼자를 성직에 임명한 일도 있으나, 그들이 서품된 후에는 별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사실을 여러 교회법 조문에 의거하여 알 수 있습니다.

동방 교회의 일부 성직자들에게 이 규정이 어느정도 완화된 것은 사실입니다. 즉 서품 전에 아내가 있는 사람은 그대로 동거하라고 허락한 것입니다. 그러나 서품 후에는 결혼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물론 동방 교회에서도 동정인 성직자가 아내가 있는 성직자보다 더 큰 존경을 받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교회 역사상 문란한 사회 풍조의 여세가 성직계를 침범한 사실도 있었습니다. 즉 의지가 약한 몇몇 성직자가 감히 계율을 어긴 생활을 한 때도 있었고, 루터처럼 교회에서 이탈하여 결혼을 한 자도 있었습니다. 극소수의 일시적 타락 현상으로 교회사 2천 년 동안 정결을 지켜 온 사실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가톨릭 교회에서 성직자의 독싱생활 제도를 세운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성직자는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입니다. 주 예수의 거룩한 사업을 계승하여 복음전파와 성사집행, 성체와 성혈축성, 미사집전, 신자들에게 성체를 분배해 주는 것 등이 성직자의 직무입니다. 지극히 정결하신 하느님이시니 정결한 시종들의 받듦을 받으시려 하지 않겠습니까? 유다의 사제들은 짐승을 제물로 바치면서도 재계근신하여 아내를 멀리하였는데, 하물며 지극히 거룩하신 어린 양을 매일 제헌하는 신약의 사제는 일생을 정결히 지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윗과 그 부하들은 사흘 동안 여자를 멀리하지 않고는 거룩한 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1사무 21,4-5 참조) 성체성사의 표상에 불과한 거룩한 빵을 받기 위해서도 그만한 근신과 정성이 필요하다면 실제로 산 하느님의 성체를 매일 받아 모시는 신약의 사제들의 영혼과 육신은 과연 얼마나 더 순결하여야 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의 십계를 받기 전에 모두들 사흘 동안이나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여자를 멀리하였다면(출애 19장 참조), 일생동안 하느님의 십계를 강론하고 주님의 복음을 가르치는 성직에 있는 신부는 평생 여자를 멀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유명한 개신교 목사 톤다이크(Thorndyke)도 그의 저서에서 성직자들의 독신생활에 대하여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과 여러 교부들의 말을 인용하는 동시에, 바오로 사도는 비록 부부 사이일지라도 기도를 위하여 한동안 동침하지 말도록 권하였으니(1고린 7,5 참조), 지극히 거룩한 미사를 날마다 거행하는 사제들은 일생을 동정으로 지냄으로써 정결한 생활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Just Weights and Measures, p.239)

또한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가 되려면 먼저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마르 8,34 참조) 즉 극기고행을 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
나는 내 몸을 사정없이 단련하여..."(1고린 9,27)

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욕정을 극복하는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극기고행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자신의 지조가 고결하여지고 의지가 강해지며 이웃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열정이 솟아나는 법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신자들에게도 자기 희생을 요구하셨는데, 주님의 대리자로서의 권위를 띠고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성직자에게야 얼마나 더 높은 정도의 희생이 요구되겠습니까?

십자가의 길을 부르짖는 성직자로서, 부부간의 향락과 단란한 가정생활의 감미로움을 즐겨가면서 어떻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어떻게 자기 몸을 사정없이 단련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
말에나 행실에나 사랑에나 믿음에나 순결에 있어서 신도들의 모범이 되시오."(1디모 4,12)

라고 한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실현하여 신도들의 신임과 존경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를 위한 일의 업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가정이 있는 교역자는 가족부양이라는 무거운 짐에 눌려 교회를 위하여 온 힘을 쏟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번거러움이 없는 가톨릭교회의 독신성직자들은 모든 시간과 온 힘을 오직 하느님과 교회를 위하여 바칠 수 있습니다. 성 토마스는 "결혼 생활은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섬기는 데 장애가 된다.

그 이유는 부부생활에서 오는 쾌락과 처자식에 대한 걱정과 집안 관리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직자 뿐 아니라 가톨릭의 남녀 수도자들도 하느님을 전심전력으로 섬기기 위하여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지냅니다.

또 경제적인 측면으로도 생각해 봅시다. 가정이 있는 교역자의 생활비가 독신자보다 많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밖의 자녀 교육비 등 모든 생활비를 합해 보면 독신자의 생활비보다 몇 배나 됩니다. 그러므로 결혼한 어떤 교역자들은 장사 등으로 생활비를 보태기도 합니다.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지내는 가톨릭성직자는 돈에 대한 번뇌가 있을 리 없습니다. 오직 청빈한 생활오 일생을 보냅니다. 한 사람의 교역자도 이러한 데 교회 전체를 비교 통산한다면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또 교역자들의 생활비는 결국 신도들이 부담해야 하는 것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하느님과 교회를 위하여 모든 인간적인 향락을 다 버리고 청빈으로 온 생애를 희생하기로 맹서하고 오로지 성무에 전진하는 독신 사제의 생활상과, 결혼 생활의 즐거움을 마음껏 즐기며 언제나 퇴직할 수 있는 자유를 유보하고 있는 직업의식이 짙은 개신교 목사의 생활상을 눈에 그리며,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한 자기 희생과 성화의 정도와, 인류에 대한 봉사 실적 등을 냉정히 대조하여 비판하여 보십시오. 어느 것이 과연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주 예수를 따르는 바른 길의 실천인가를. 목사들은 베드로 사도와 같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할 수 있는 용기와 열성을 가지려 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결혼 생활을 변호하기에 급급할 뿐입니다.

감히 묻겠습니다. 만일 개신교 교회 당국에서 모든 교역자들에게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들처럼 독신 생활을 요구한다면 자진하여 여기에 쾌히 응할 목사가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은 교직을 버릴망정 그토록 애착하는 결혼 생활을 떠나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일생을 미혼으로 지낼 사람 외에는 신학교에 입학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들의 신학교는 대부분 폐교 상태에 이를 것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직자 뿐 아니라 100만에 이르는 남녀 수도자들 역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성화 만을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한 폐병원, 시료원, 요양원, 양로원, 고아원, 감화원 등엔 물론, 각종 교육, 문화, 전도, 구제 사업에 엄격한 수도 규칙을 지켜가며 일생 독신 생활로 봉사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개신교 계열에서 이런 복음 사업을 위한 단 하나의 수도원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영구 儀禮派 성공회에 극소수의 수도원이 일을 따름.)

이는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정통교리를 멀리 떠나 가장 중요한 7성사의 대부분(특히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을 폐기한 만큼, 은혜의 원천이 고갈되어 수정(守貞) 생활로 주님을 위하여 봉사할 원동력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
그 행위를 보아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마태7,20)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됩니다.


독신 성직자들의 위대한 공훈

가톨릭 교회가 가는 곳 마다 맹렬한 반대와 박해를 당하면서도, 이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기적적인 성과를 거둔 비결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이 문제야 말로 흥미를 끄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교회 조직이 완벽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교회 당국자들의 달관적인 예지(叡智)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가톨릭 교회가 이 정도의 강대 세력을 얻게 된 것은 성직자의 독신 생활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독신 생활로 시종 일관하는 가톨릭 성직자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같이, 다른 사물에 마음이 분산되지 않고 전 생애를 오로지 하느님을 섬기는 일과 신자들을 위하여 아무 꺼리낌 없이 바치고 헌신적으로 착한 목자의 직분을 다하기 주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멀리 사도 시대로부터 영웅적인 기개로 온갖 어려움과 싸우며 전세계에 주님의 복음을 선포한 대표적인 선교사는 모두 독신 성직자입니다. 동방교회의 중견이던 콘스탄티노플의 크리소스토모, 이집트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노, 이탈리아 밀라노의 대주교 암브로시오, 프랑스의 영계(靈界)를 개척한 레미지오, 독일의 사도 보니파시오, 아일랜드의 성조(聖祖) 패트릭이 모두 독신 성직자들이었습니다.

동방의 사도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가 만일 처자를 거느린 몸이었다면, 수만 리 망망 대해에 일엽편주를 저어 가는 고통과 외로움을 겪어 가며 칠석 같은 신앙과 불길같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도, 중국, 일본의 수십만 영혼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한국에 처음 들어온 중국의 周文謨 신부와 그 뒤 들어온 프랑스 신부들도 결혼한 몸이었다면 목숨을 걸고 한국에 들어오지는 못하였을 것이고, 들어왔다 해도 사경을 헤메는 고난을 겪어가며 전교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중국에 출전하였던 여러 일본 장교들의 말에 의하면, 일본군이 진격했던 지역의 여러 교회당의 개신교 목사들은 다 피난하였지만 오직 가톨릭 신부들만은 의연히 성당을 사수하며 신자들과 생사를 같이할 각오로 끝까지 버티었다고 합니다.) 가톨릭 성직자들이 가는 곳마다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오직 복음 선포에만 몸 바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독신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이 신자들의 지극한 존경과 사랑과 신임을 받게 되는 것도 그들의 정덕(貞德)이 그 주요 원인의 하나입니다.


반대설에 대한 반박

어떤 사람들은 고린토 전서 9장 5절을 들어 성직자의 독신 생활을 무모하게도 반대하려 듭니다. 개신교 측에서 사용하고 있는 성서에는 ''아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원문의 ''자매인 여인''이라는 단어를 그들이 일부러 아내라는 말로 잘못 옮겨 적은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내가 없는 독신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해석은 결혼을 허용하는 그들의 의도적인 곡해일 뿐 아니라 모순까지 범한 것입니다. 없는 아내를 어떻게 데리고 다니겠습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여인이란, 사도들이 전교하는 데 협력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따라 다니는 신앙이 열렬한 부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바오로 사도의

"
감독(주교)은 ... 한 여자만을 아내로 가져야 하고 ..."(1디모 3,2)

라는 말씀을 들어, 주교는 반드시 결혼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 자신이 주교로서 일생을 독신으로 지낸 사실만 보아도 그 말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뜻은 재혼한 사람은 주교에 서임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초대 교회때는 교직이 부족하여 독신자 중에서 뿐만 아니라 결혼한 사람 가운데서도 주교를 선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재혼한 사람에게는 그런 자격을 주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직자의 독신 생활을 반대하는 근거로 바오로 사도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기도 합니다.

"
훗날에 사람들이 거짓괸 영들의 말을 듣고 악마의 교설에 미혹되어 믿음을 버릴 때가 올 것이라고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런 교설은 거짓말쟁이들의 위선에서 오는 것이고 이런 자들의 양심에는 사탄의 노예라는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결혼을 금하고 어떤 음식을 못 먹게 합니다."(1디모 4,1-3).

그러나 이 말씀은 혼인을 죄악시하는 에비온파, 그노시스파ㅡ 마니교파들의 이설(異說)에 대한 말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혼인을 정당하다고 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성사(聖事)의 지위에 올려놓고,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성덕(聖德)의 최고봉에까지 도달할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욕이란 인간의 본능 중 가장 강한 것으로서, 이를 억제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독신생활을 반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이 무엇인지, 그리스도교의 성덕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의 말입니다. 따라서 소위 기독교인으로서 이런 말을 했다면 이것은 자기 본위의 말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이 독신 생활을 실천하셨고 또 권장하셨으며, 그 후계자인 수백만 가톨릭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2천년 동안이나 끊임 없이 실천하여 온 이 엄연한 사실을 누가 모른다고 하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이라면 그리스도께서 권장하셨을 리가 있겠습니까. 또 사도 시대 이래 무수한 실천자를 낳을 수 있었겠습니까. 물론 이것은 사람의 힘 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극기 고행과 끊임없는 기도와 성사로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은총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가톨릭 교회의 신앙, 성사, 은총 등 심오한 진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은 저의 이러한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독신생활을 강요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가톨릭교회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결코 이것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각자 자유 의사에 맡길 뿐입니다. 다만 사제직에 오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를 필수 또는 선결 조건으로 요구합니다. 독신생활을 감당하지 못할 사람은 신학교에 입학하지 않으면 됩니다. 신학교에서는 신앙과 성품에 대한 소속 본당 주임 신부의 추천을 받은 자에게만 입학을 허락하는 법입니다. 신학생에 대해서는 엄정한 선발을 거친 뒤에도 양보다 질에 치중합니다. 성직에 부적격한 자라고 인정될 때는 언제든지 그를 퇴학시킵니다. 이것은 오직 신학교 당국자의 재량에 달렸습니다. 신학생 역시 소년기든 청년기든 언제든지 자유의사로 중도 퇴학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입학 후에는 중등과정 이상의 예비교육과 철학, 신학을 비롯하여 성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학문을 깊이 있게 연구하며, 엄격하고 신성한 제도 아래서 성덕을 수련하고 나서도, 성직 생활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야만 비로소 자진해서 동정 서원을 할 수 있는 결정 단계에 이를 수 있게 됩니다. 결코 동정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 문제가 강압으로 이루어질 일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성직자와 독신생활은 자손을 낳아 번성시키라고 하신(창세 1,20 참조)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 하신 명령이지, 그 후의 억만인에게 일일이 명령하신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주 예수께서 사제의 동정 생활에 대해 말씀하셨을리 없고, 따라서 바오로 사도도 오류를 범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가톨릭 성직자 외에도 노총각 노처녀로 일생을 지내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다고 누가 이들을 하느님의 계명을 어긴 죄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적 견지에서 볼 때, 독신 제도가 인구 증가에 장애가 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것은 기우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마치 몇 개의 음악학교나 미술학교를 세우는 것을 보고 이 때문에 농업과 공업이 부진한 상태를 초래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헛된 걱정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신부의 수는 인구비례로 볼 때, 그야말로 소수에 불과합니다. 또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향락을 희생하는 사제 성직을 지망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 리도 없으며, 교회에서는 필요 이상의 성직자를 양성하여 지나친 짐을 질 리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국가의 융성에 이바지하는 신부들의 숨은 공적을 눈이 있는 사람은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부는 하느님의 진리로 국민을 가르쳐 국법의 권위에 복종할 줄 알게 하고, 신부 자신은 성직 수행을 위하여 독신생활을 일관하지만 일반 신자들에게는 결혼 생활의 신성성을 가르치며, 부부의 올바른 길을 가르치는 동시에 이혼, 산아제한, 낙태 등 큰 죄악을 엄금한다. 그러므로 가톨릭 교회의 교화를 깊이 입은 지역일수록 모범 국민이 많으며 인구 증가율이 높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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