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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판관기 개관 (참고로 보세요) 카테고리 | 천주교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2-12-20 조회수1,030 추천수0 신고

 

 

공동번역성서

(1) 판관기 開館, 하느님이 붙이시는 전쟁 (판관1,1-10)


(판관1,1-10)

1 여호수아가 죽은 뒤, 이스라엘 백성은 어느 지파가 가나안족을 치러 앞장서 올라 갈 것인가를 야훼께 물었다. 2 '유다 지파가 올라 가거라. 내가 이제 이 땅을 그들의 손에 붙인다.' 이러한 야훼의 분부를 받고 3 유다 지파는 동기인 시므온 지파에게 제안하였다. '우리에게 몫으로 돌아 온 지방으로 너희도 함께 올라 가 가나안 사람들을 치자. 그리하면 우리도 너희에게 몫으로 돌아 간 지방으로 함께 진군하리라.' 이리하여 시므온 지파도 함께 진군하게 되었다. 4 유다 지파가 쳐올라 가는데, 야훼께서 가나안족과 브리즈족을 그들의 손에 붙여 주셨으므로 베젝에서 일만 명이나 무찔렀다. 5 그 곳 베젝에서 그들은 아도니베젝과 접전하여 가나안족과 브리즈족을 무찔렀던 것이다. 6 도망치는 아도니베젝을 뒤쫓아 가서 사로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자, 7 아도니베젝이 이렇게 탄식하였다. '내가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고 내 상 밑에서 부스러기를 주워 먹게 한 왕이 칠십 명이나 되더니, 하느님께서 내가 한 대로 나에게 갚으시는 구나.' 그는 예루살렘으로 끌려 가 거기에서 죽었다. 8 유다 자손은 예루살렘을 쳐서 칼로 무찔러 점령하고는 그 성에 불을 놓았다. 9 그리고 나서 유다 자손은 산악지대와 네겝 지방과 야산지대로 내려 가 거기에 사는 가나안족을 쳤다. 10 다시 유다 지파는 가나안족이 사는 헤브론으로 진군하였는데, 헤브론은 일찌기 키럇아르바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거기에서 그들은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무찔렀다.

 

오늘부터 판관기를 통하여 구원을 얻은 성도들이 이 땅에 침노해 들어온 천국을 어떠한 모양으로 살게 되는지를 조명해 보려고 합니다.

판관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에 들어간 뒤의 삶에 대해 기록을 하고 있는 책입니다. 물론 약속의 땅은 궁극적으로 완료된 하느님 나라를 지칭하는 것이지만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육신을 입고 이 땅을 사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 땅에서 살게 될 은닉되어 있는 천국의 모습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판관기를 공부하면서 성도가 이 땅에 들어와 있는 천국을 살면서 어떠한 전쟁을 어떻게 치러내야 하는지를 상세하게 공부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판관기를 읽다보면 마치 무슨 여흥구처럼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판관기의 저자를 사무엘이라 추측을 합니다.

하느님을 왕 삼아 살아야 하는 이스라엘이 진짜 왕이신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살다가 결국 사무엘에게 와서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 달라(사무상8)’는 요구를 하지요? 사무엘이 바로 그러한 지경까지 이르게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판관기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판관기는 하느님을 왕 삼아 살아야 하는 자들이 하느님을 왕으로 대접하지 않고 사는 와중에 하느님께서 스스로 그들의 왕이 되셔서 그들의 삶을 어떻게 끌고 가시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아주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 책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판관기를 통하여 우리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낱낱이 폭로당하게 될 것이며 그러한 어두움을 덮으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은혜의 깊이를 풍성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건 비단 판관기만의 내용이 아니라 모든 성경의 내러티브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격적인 판관기 강해에 들어가기에 앞서 성경이 어떻게 이 판관기까지 흘러오게 되었는가에 대해 사전 지식을 확보시켜 드린 뒤에 본격적인 판관기 공부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절대 어렵지 않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성경은 크게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지지만 그 전체를 하나로 묶으면 ‘언약’이라는 우산으로 묶여지는 책입니다. 그 언약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잘 표현을 해 놓은 곳이 출애굽기 19장입니다.

 

(출애19:5-6) 5 이제 너희가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계약을 지킨다면 너희야말로 뭇 민족 가운데서 내 것이 되리라. 온 세계가 나의 것이 아니냐? 6 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 줄 말이다.'

 

이건 하느님께서 세우신 만고불변의 언약입니다. 그 언약이 창세기에서는 어떻게 주어지죠? 선악과를 먹으면 죽고 선악과를 먹지 않으면, 다른 말로 ‘내 말을 잘 듣고 순종하면’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영생을 하게 된다는 언약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피조물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을 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제시하신 몇 가지 항목을 지켜내는 것 정도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느님 앞에서 티끌에 불과한 자기의 존재를 자각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완전히 비워진 그릇에 하느님이 담기는 것을 연합이라 하고 그걸 순종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 때에 피조물은 비로소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상태를 살아있는 상태라 하고 그 나머지 상태를 죽은 상태라 말합니다.

따라서 존재란 하느님과 연합이 된 상태에서만 존재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에게는 하느님과 완전하게 연합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피조물이 하느님께 온전히 순종을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 측에서 그분의 전지전능하심으로 피조물의 삶에 개입을 하셔야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의 힘으로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있다고 하는 인간의 교만을 부수어 버리시고 인격과 이성을 소유한 채 하느님 앞에서 납작 엎드리게 만들어 버리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야기의 시작이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입니다. 첫 번째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반드시 죽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치마가 등장하고 그 치마에 의해 인간의 죽음이 덮여지게 됩니다.

 

(창세3:10) 10 아담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알몸을 드러내기가 두려워 숨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 앞에서 벌거벗은 무력한 존재로 살도록 지어졌습니다. 그걸 인정하고 하느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로 설 때 하느님은 그에게 義의 옷을 입히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앞에서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합니다. 아담은 지금 ‘저는 하느님께 벌거벗은 제 몸을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도 자존심이 있으니까요’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罪라하고 그 상태를 죽음이라 합니다. 아담은 이미 하느님 앞에서 죽은 것입니다. 그 때 하느님은 그 인간의 실패를 무상으로 덮어 버리십니다.

 

(창세3:21) 21 야훼 하느님께서는 가죽옷을 만들어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

 

이게 덮으심의 은혜인 것입니다.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느님의 언약에 의해 반드시 죽어야 할 자들의 사망이 하느님의 은혜로 그냥 덮여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가 성경 전체의 내러티브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아담과 하와를 통해 하느님 언약 성취의 은혜성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하시고 그 아담의 자손을 통해 다시 한 번 덮으심의 은혜를 설명해 주십니다.

 

(창세3:23) 23 에덴동산에서 내 쫓으시었다. 그리고 땅에서 나왔으므로 땅을 갈아 농사를 짖게 하셨다.

 

타락하여 저주받은 인간에게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십니다. 그것은 ‘너희가 내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한시도 잊지 말라’는 하느님의 배려였습니다. 그래야 순종이 가능하거든요. 그래서 흙에서 만들어진 티끌 같은 자들에게 흙을 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티끌 됨을 인정하며 하느님 앞에서 순종하는 자로 살아야 할 아담의 장남 카인이 자신의 제사를 지키겠다고 동생을 죽여버리는 사건이 터집니다. 아벨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nothing’이지요. 근본된 토지를 가는 자들의 자아 인식이 바로 ‘아벨’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제사를 지키겠다는 ‘있음’의 대명사 카인이 ‘없음’을 때려죽이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인간 세상에 존재하게 될 두 종류의 인간이 확연하게 분리가 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허락하신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살게 되는데, 그 ➀한 종류는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이웃을 살해하는 부류의 사람들이고, 다른 ②한 종류는 그들에 의해 맞아 죽지만 하느님의 덮으심의 은혜에 의해 그 무력함의 자리에서 부활의 몸으로 살아나게 될 은혜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전자는 그렇게 살다가 영원한 死亡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고, 후자는 맞아 죽어서 살아나는 역설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셔서 세상을 이용하여 그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처절하게 경험하게 하시고 그 처참한 죽음의 현장에서 당신의 은혜의 덮으심으로 그들을 살려내시는 일을 역사 속에서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노아라는 한 인물과 그의 가족들을 통하여 다시 한 번 덮으심의 은혜를 설명해 주십니다. 노아와 그의 식구들을 제외한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하느님 앞에서 전부 네피림, 용사, 유명한 자로 삽니다.

 

(창세6:4~8) 4 그 때 그리고 그 뒤에도 세상에는 느빌림이라는 *거인족이 있었는데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들로서 옛날부터 이름난 *장사들이었다. 5 야훼께서는 세상이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 차고 사람마다 못된 생각만 하는 것을 보시고 6 왜 사람을 만들었던가 싶으시어 마음이 아프셨다. 7 야훼께서는 '내가 지어 낸 사람이지만, 땅 위에서 쓸어 버리리라. 공연히 사람을 만들었구나.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모조리 없애 버리리라. 공연히 만들었구나' 하고 탄식하셨다. 8 그러나 노아만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모든 인간들이 전부 네피림, 용사, 유명한 자를 추구하며 사는데 노아라는 사람만 하느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가 120년간 어떻게 삽니까?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어 삽니다. 노아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러한 노아만 살려내십니다. 네피림, 거인, 용사, 유명한 자들은 전부 죽여 버리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이 세상의 힘을 소유하고 그 힘을 의지하는 자들은 절대 자신들의 연약함의 폭로를 전제로 해야 하는 하느님의 은혜를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바벨탑 사건을 통하여 인간 측에서의 가능성과 열심을 또 한번 박살을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택하여 하느님의 구원이 어떻게 하느님의 은혜로만 주어지게 되는지를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십니다. 구원의 시작과 끝이 모두 하느님이심을 아브라함의 생애가 보여줍니다.

구원은 우상이나 만들어 팔던 불가능한 자에게 하느님께서 먼저 찾아가심으로 시작되어 모리아 산에서의 예수 그 스도의 십자가로 완료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아브라함은 계속 실수와 실패의 삶만 내어 놓습니다. 계속해서 하느님은 그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통하여 구원이란 무엇이며 영생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시기 위해 그의 후손들을 애굽으로 들여보내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애굽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하느님은 거기에서도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에게 하느님의 백성들이 맞아 죽는 모습을 연출해 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백성들을 두들겨 패던 세상의 장자들이 모두 살해를 당하고, 그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애굽의 군사들이 홍해에 모두 빠져 죽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던 하느님의 백성들이 하느님의 덮으심의 은혜에 의해 거저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한 것은 불평과 원망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덮으심의 은혜가 그렇게 패역한 자들을 살려내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40년 간 광야에서 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광야로 보내신 계기가 된 사건이 뭡니까?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고, 다른 말로 자기들의 판단을 유보하고 하느님의 명령을 들어야하는 하느님 백성들이 가나안에는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자신들은 절대 그곳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고 지레 겁을 먹은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건 그들을 이끌고 계신 하느님에 대한 불신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판단보다 자신들의 판단을 더 의지했던 것입니다. 그게 뭐라고요? 선악과 따먹은 아담입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아담들을 광야로 내몰아서 그들이 얼마나 무력한 자들인지를 직접 체험케 하신 것입니다.

 

(신명8:1-3) 1 너희는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계명을 성심껏 지켜야 한다. 그래야 너희는 행복하게 살며 번성할 것이고 야훼께서 너희의 선조들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 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 2 너희는 지난 사십 년간 광야에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어떻게 너희를 인도해 주셨던가 더듬어 생각해 보아라. 하느님께서 너희를 고생시킨 것은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인지 아닌지 시련을 주어 시험 해 보려고 하신 것이다. 3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고생시키시고 굶기시다가 너희가 일찌기 몰랐고 너희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 주셨다. 이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광야 인생을 허락하신 것은 그들이 자력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지켜낼 수가 없는 자임을 폭로시키시기 위함 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은 끊임없이 세상의 빵떡을 구하는 삶을 사는데, 하느님은 그 세상 빵떡의 무용함과 허황됨을 체험케 하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쫒아 순종하는 티끌로 사는 것이 진짜 복인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광야를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건 모든 하느님 백성들이 다 거쳐야 할 과정이며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관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테파노는 그 광야의 이스라엘을 광야 교회라고 부른 것입니다(사도행전7:38). 광야의 이스라엘은 교회의 모형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광야 교회에게 율법이라는 것을 주시고 제사 제도라는 것을 주십니다. 그것은 광야 교회가 율법을 전혀 지켜낼 수 없음을 깨닫게 해주심으로 해서 희생 제사로 상징이 되는 십자가 제사의 필연성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과 제사가 함께 주어진 것입니다. 율법에서 제사의 필연성을 깨달아 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 백성들의 삶은 전부가 다 자신들의 티끌 됨을 폭로당하고 하느님의 은혜를 붙드는 용도로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광야에서 자신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첫 세대 장정 60만의 몰살로 확증을 받은 이스라엘은 순전히 은혜로만 요단강을 건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줄거리가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리고는 가나안 정복 전쟁을 기록한 여호수아서를 지나 오늘부터 우리가 함께 공부할 판관기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판관기는 그렇게 하느님의 은혜만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온 성도들이 어떻게 그들의 삶 속에서 십자가 복음을 실재화하여 살아내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책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판관기를 공부하면서 역시 하느님 백성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 그리고 그것을 덮으시는 하느님의 은혜를 더욱 선명하게 배우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에 지도자가 없다는 것으로 판관기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판관기는, 보이는 하느님의 모형으로 나타났던 모세와 여호수아가 사라지고 이제 본격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이끌고 가실 것인가에 관한 책인 것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두말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런데 모세도 실패를 하고 여호수아도 실패자로 죽습니다. 둘 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그 역할을 마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얼마나 미완료적 존재이며 불가능한 존재인지까지 보여주고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는 이제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어떻게 완료된 승리의 지점으로 끌고 가시는지를 판관기를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하느님이 여호수아의 후계자를 세우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느님은 유다 지파에게 전쟁을 명령하시고 시므온 지파를 따라붙게 만드십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가나안 정복전쟁을 수없이 치러온 상태입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땅을 정복한 상태이고 얼마 남지 않은 잔당들만 처리하면 되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다윗의 때까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가나안 땅을 모두 정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 끊임없이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며 그 하느님 나라 전쟁의 내용에 대해 체험학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판관기의 서론 부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잘 읽어보면 판관기 전체의 내용이 훌륭하게 요약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고많은 지파 중에 왜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가 판관기 서론에 등장할까요?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의 참 왕이 나올 지파이고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에 의해 저주를 모면하는 그러한 교회의 모형으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창세기 49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창세49:8-11) 8 유다, 너는 네 형제들의 찬양을 받으리라. 네 손은 원수들의 멱살을 잡겠고 네 아비의 자식들이 네 앞에 엎드리리라. 9 유다는 사자새끼, 아들아, 너야말로 짐승을 덮쳐 뜯어 먹고는 배를 깔고 엎드린 수사자라 할까? 10 왕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지휘봉이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참으로 그 자리를 차지할 분이 와서 만백성이 그에게 순종하게 되리라. 11 포도나무에 나귀를 예사로 매어 놓고 고급 포도나무에 새끼 나귀를 예사로 매어 두리라. 포도주로 옷을 빨고 포도의 붉은 즙으로 겉옷까지 빨리라.

 

다른 지파의 왕의 지팡이를 쥐고 지휘봉을 간직한 채, 메시아가 오기까지 그 메시아의 모형으로 살게 되는 지파가 유다 지 파입니다. 그리고 그 유다 지파에서 참 이스라엘의 왕 예수 그리스도가 나귀를 타고 옷을 포도주에 빨며 나타나 십자가를 질 것이라는 유언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판관기 1장에서의 유다 지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시므온 지파는 어떤 지파였지요?

 

(창세49:5~7) 5 시므온과 레위는 단짝이라, 칼만 잡으면 사나와져 6 나는 그들의 모의에 끼어들 생각도 없고 그들이 모이는 자리에 섞일 마음도 없다. 홧김에 사람을 쳐 죽이고 닥치는 대로 소를 박살하는 녀석들! 7 저주받으리라. 화가 나면 모질게 굴고, 골이 나면 잔인해지는 것들! 내가 그들을 야곱의 자손 가운데서 분산시키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흩뜨리리라.

 

자신의 자존심과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느님의 언약의 징표인 할례를 이용하여 살인을 저지르는 죄인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이 시므온 지파입니다. 그래서 시므온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지는, 다른 말로 하느님의 백성에서 제외되는 저주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흩어져 버려야 할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의 유산을 잉여로 받게 되어 살아나게 됩니다.

 

(여호수19:1) 1 둘째 몫은 갈래를 따라 시므온 후손 각 지파에게 돌아 갔다. 그들의 유산은 유다 후손의 유산 한복판에 들어 있다.

 

보다시피 시므온 지파는 유다 자손의 유산을 잉여로 나누어 받아 살아나는 하느님 백성의 모형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잘 보면 유다 지파가 가나안과 전쟁을 하러 나가는데 시므온 지파가 함께 전쟁에 나갑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가 전쟁을 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기사가 반복되어 나오는데 시므온이 그 전쟁에 어떤 도움을 주었다는 대목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습니다.

지금 판관기 기자는 시므온이라는 저주받을 백성들이 유다 지파에 의해 잉여의 선물을 받고 있는 모습을 그렇게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라는 잉여 증폭기에 의해 구원의 선물을 받는 성도의 이야기가 판관기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판관기가 여호수아서의 마지막에 나오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언약에 이어지는 것임을 놓치면 안 됩니다.

 

(여호수24:15-16,19) 15 만일 야훼를 섬기고 싶지 않거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여러분이 오늘 택하시오.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에서 여러분의 조상들이 섬기던 신을 택하든지, 여러분이 들어 와서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인의 신을 택하든지 결정하시오. 그러나 *나와 내 집은 *야훼를 섬기겠소.' 16 백성들이 대답하였다. '우리가 야훼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다니 될 법이나 한 말입니까? 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야훼께서 얼마나 준엄하신 하느님이신데, 여러분이 감히 그를 섬기겠소? 그분은 질투하는 신이오. 여러분이 고의로든 실수로든 *죄를 지으면, 그것을 *용서하시지 않으실 것이오.

 

마치 창세기에서 하느님과 아담과의 언약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으세요? 이렇게 철저하게 하느님과 언약을 한 이스라엘이 질투하시는 하느님과의 언약을 하나도 지키지 않는 것이 판관기 전체의 내용입니다. 하느님은 그들이 하느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못할 것임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남은 가나안 족속들을 모두 다 쫓아내지 않으셨다고... 하느님께서 친히 말씀을 하십니다.

 

(판관2:16~17, 21-22) 16 야훼께서는 판관들을 일으키시어 약탈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 내시곤 하셨다. 17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자기들을 이끄는 판관들의 말을 듣지 않고 다른 신들에게 몸을 팔아 그 신들을 예배하였다.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야훼의 계명에 순종하며 걸어 온 길을 그대로 살지 못하고 그렇게도 쉽사리 떠났던 것이다. 21 그러므로 나는 여호수아가 채 몰아내지 못하고 죽은 민족들을 이 백성 앞에서 결코 몰아내지 않으리라. 22 그들을 시켜 이스라엘을 시험해 보리라. 이 백성이 조상들처럼 내가 가르쳐 준 길을 명심하고 바로 가는지 시험해 보리라.'

 

마치 신명기 8장의 그 광야 교회의 이유와 똑같은 이유가 적혀 있는 것 같지 않으세요? 내 말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아보려고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허락하셨다는 하느님께서 가나안에서도 똑같이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아보시기 위해 그들의 對敵을 남겨 두셨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성도의 인생을 통하여 성도의 티끌 됨을 낱낱이 폭로하시고 성도의 항복을 받아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생의 실체를 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세요.

 

(판관2:1-4) 1 야훼의 천사가 길갈에서 보김으로 올라 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를 에집트에서 이끌어 내었고, 너희 조상들에게 주겠다고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이렇게 이끌어 들였다. 나는 너희와 맺은 계약을 영원히 깨뜨리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2 그러므로 너희에게 이 땅 주민과 계약을 맺지 말고 그들의 제단을 헐어 버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어찌 이럴 수 있느냐? 3 내가 다짐한다.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않으리라. 그들은 너희를 잡는 그물이 되고 그들의 신은 너희를 옭아 매는 올무가 될 것이다.' 4 이스라엘의 온 백성은 야훼의 천사가 하는 말을 듣고 일제히 목놓아 울었다.

 

마치 출애굽 때에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데리고 나왔느냐?’ 고 항의를 하던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으세요?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게 판관기 내내 이스라엘은 티끌로 폭로를 당하고 하느님의 은혜는 그 티끌로 폭로된 이스라엘을 다시 새 창조의 창조물로 만들어 내시는 것이 판관기 전체의 내용인 것입니다.

 

(신명9:5) 5 너희가 착하고 마음이 곧아서 그들의 땅에 들어 가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백성들이 나쁘기 때문에 너희 하느님 야훼게서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 내시는 것이다. 야훼께서는 이렇게 하여 너희 선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약속을 이행하시는 것이다.

 

보세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은 하느님의 전쟁에 의한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며, 그것도 하느님의 언약 때문에 주어지는 무상의 수여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 은닉되어 들어온 하느님 나라에서 치르는 전쟁은 전부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것이 하느님 나라 전쟁이라는 것을 아는 전쟁인 것입니다. 그걸 자기부인의 전쟁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기부인에서, 오직 하느님만이 전쟁의 주체이시며 승리자이심을 뼛속 깊이 새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진군을 할 때 유골을 앞장세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창세50:24~26) 24 요셉이 일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제 죽을 터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너희를 찾아 오시어 이 땅에서 이끌어 내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에게 주시마고 맹세하신 땅으로 올라 가게 하실 것이다.' 25 다시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서약을 시켰다. '하느님께서 너희를 반드시 찾아 오실 것이다. 너희는 그 때 여기에서 내 뼈를 가지고 그리로 올라 가거라.' 26 요셉이 백십세에 죽자 사람들이 그를 썩지 않게 만들어 관에 넣어 에집트에 모셨다.

 

(출애13:18~19) 18 그래서 하느님은 그들을 홍해바다에 이르는 광야길로 돌아 가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단단히 무장하고 에집트 땅에서 나왔다. 19 이 때, 모세는 요셉의 유해를 모시고 떠났다. 요셉이 '하느님께서 너희를 돌보아 찾아 오실 터이니, 그 때 너희는 내 뼈를 여기에서 옮겨다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단히 다짐해 두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무력함과 연약함을 폭로당하면서 요셉의 유골을 앞세워 들어가게 되는 땅이 약속의 땅이라는 것입니다. 유골(해골)을 헬라어로 바꾸면 ‘골고다’입니다. 골고다의 공로에 의해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약속의 땅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유다가 열심히 전쟁을 하여 예루살렘을 정복하지요? 예루살렘은 약속의 땅의 심장입니다. 그 약속의 땅의 심장을 유다가 공격을 하여 함락을 시켜 버립니다.

 

(판관1:8) 8 유다 자손은 예루살렘을 쳐서 칼로 무찔러 점령하고는 그 성에 불을 놓았다.

 

그런데 다윗의 시편을 보면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은혜로 세워지는 것이라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시편51:18) 18 어지신 마음으로 시온을 돌보시어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쌓게 하소서.

 

그러니까 이 판관기에 등장하는 모든 판관들은 전부 이스라엘의 진짜 왕이시요 진짜 판관이신 하느님의 모형인 것이고, 모든 전쟁들 또한 하느님이 치르시는 하느님의 전쟁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스라엘의 무력함이 함께 폭로가 되는 것일 뿐입니다.

 

(판관11:27) 27 나는 너에게 잘못한 일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네가 나에게 악의를 품고 전쟁을 걸어 오다니 어찌 된 일이냐? 심판자 야훼께서 오늘날 이스라엘 백성과 암몬 백성 사이를 판가름해 주시기 바란다.'

 

수많은 판관이 등장하는 판관기에 갑자기 ‘심판자 야훼’라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이렇게 판관들의 이야기인 판관기는 진짜 판관(judge)이신 야훼 하느님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이 가나안 정복전쟁의 시작이 어떻게 진행이 되어졌는지를 살펴보면서 오늘의 판관기 개관에 확인 도장을 찍고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예리고 城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예리고 성이 어 게 무너졌습니까? 이스라엘이 손 하나 까딱했습니까? 이스라엘은 망치질 한 번 안하고 그 철옹성 예리고를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지요? 하느님께서 언약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전쟁은 그렇게 하느님께 순종하는 전쟁인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도저히 불가능하다 판단이 되는 것도, 그 판단을 유보한 채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 백성들의 존재 양태이기에 그 엄청난 예리고를 마냥 돌기만 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다소 이해가 가지 않아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이스라엘, 즉 교회의 전쟁은 하느님께 불순종하는 ‘나’를 쳐서 하느님 앞에 순종하게 하는 전쟁인 것입니다. 거기에 예리고는 그저 소품으로 등장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 번째 전쟁에서 발생을 합니다. 예리고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한 아이城에서 이스라엘이 대패를 하게 됩니다. 그때 여호수아가 어떻게 하는지 보세요.

 

(여호수7:7) 7 여호수아가 울부짖었다. '나의 주 야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하여금 요르단강을 건너게 하시고는 이제 아모리 사람들 손에 붙이시어 멸망시키려고 하십니까? 차라리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살게 해 주셨더라면 좋았겠습니다.

 

홍해 앞에서의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은 투정을 하지요? 판관기에서도 똑같은 투정이 나왔다는 건 조금 전에 보셨고요. 이렇게 인간들은 절대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께 순종할 수 없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아이城에서 패배를 한 것입니까?

 

(여호수7:1,11) 1 이스라엘 백성이 모든 부정한 것을 없애라는 명을 어겨 죄를 짓는 일이 생겼다. 유다 지파 가운데 제라의 증손이자 잡디의 손자이며 가르미의 아들인 아간이 부정한 것을 가졌던 것이다. 이 일 때문에 야훼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몹시 노하셨다. 11 이스라엘은 죄를 지었다. 내가 분부한 지시를 어기고 부정한 것을 가졌다. 그리고 그것을 훔쳐다가 자기 행낭에 숨겨 두었다.

 

이스라엘이 아이 城에서 대패를 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예리고에서 취한 전리품은 하나도 빠짐없이 하느님의 창고에 들이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여호수6:18~19) 18 너희는 깊이 명심하여라. 없애 버리게 되어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탐내지 말라. 없애 버리게 되어 있는 것을 가지지 말라. 그랬다가는 전멸당하는 운명을 이스라엘 진영에 스스로 불러 들이게 된다. 19 은이나 금이나 동제품이나 철제품은 모두 야훼께 드릴 거룩한 것이다. 그러니 야훼의 금고에 넣어야 한다.'

 

여기에서 ‘드릴 물건’ 혹은 ‘바칠 물건’이라고 번역이 된 ‘헤렘’이라는 히브리어는 ‘완전히 멸하기로 정해진 것, 완전히 바쳐지기로 정해진 것’이라는 뜻을 가진 명사입니다. 그런데 .완전히 멸해지기로 정해진 것이 조금 남겨져서 아간이라는 사람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하느님께 바쳐져서 진멸되어져야 할 것과 그 물건을 바치는 자가 하느님 앞에서 동일시되어 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7:12) 12 그리하여 저희들이 스스로 부정한 것이 되었다. 이스라엘군이 원수들과 맞설 수 없게 된 것은, 원수들에게 등을 보이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너희 가운데서 그 부정한 것을 치워 버려라. 그렇지 아니하면 다시는 내가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니까 하느님께 바쳐져야 할 것은 우리가 가진 소유나 힘 정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서의 순종이란 ‘나’라는 존재가 하느님 앞에 바쳐져서 진멸되어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그런 존재임을 인정하고 수긍하여 하느님 앞에 완전히 비워져서 철저한 항복 선언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안 되는 자는 하느님 나라의 전쟁에서 패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망에 처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서 ‘나’라는 존재의 가치 챙기기나 영광 챙기기가 조금이라도 남아있게 되면 그들은 아이 성 앞의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불순종의 죄인을 불살라 버리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여호수7:15) 15 부정한 것을 가지고 있다가 잡힌 자는 그 식구와 함께 화형을 당하리라. 그가 나 야훼의 지시를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못할 짓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간은 저주의 불에 타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 아간이 전리품을 숨길 때의 모습이 이렇게 그려져 있습니다.

 

(여호수7:21) 21 제가 전리품 중에서 시날에서 난 좋은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나가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는 그만 욕심이 나서 가졌습니다. 그것들은 제 천막 땅 속에다 은을 밑에 깔고 묻어 두었습니다.'

 

여기에서 ‘보고’라고 번역이 된 단어 ‘라아’는 창세기 3장에서 ‘보암직도 하고’의 그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선악과 사건이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주 이스라엘의 범죄를 아담의 범죄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호세6:7) 7 이 백성은 아담에서 이미 계약을 깨뜨렸다. 거기서 벌써 나를 배신하였다.

 

그렇게 성경은 하느님께 불순종한 저주받을 인간과 그를 은혜로 구원해 내시는 하느님의 이야기로만 점철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아간이 누구라는 말입니까? 바로 ‘나’인 것입니다. 아담이 그러했듯이 아간 안에 들어 있는 ‘나’도 아간처럼 그렇게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구체적인 구원 방법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잘 보면 아간이 뽑히는 과정을 성경이 이렇게 기록을 합니다.

 

(여호수7:16~18) 16 여호수아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지파별로 나오게 하였다. 그 가운데서 유다 지파가 뽑혔다. 17 유다 지파를 갈래별로 나서게 하였더니 제라 갈래가 잡혔고, 제라 갈래를 가문별로 나서게 했더니 잡디 가문이 뽑혔다. 18 다시 여호수아가 잡디 가문의 장정을 차례로 나서게 했더니 유다지파, 제라의 증손이요 잡디의 손자며 가르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다.

 

저주의 불에 타 죽어야 할 자가 뽑히고 뽑히는데 하필 유다 지파에서 뽑힙니다. 그리고 그가 아골 골짝에서 죽은 후 이스라엘이 아이 성에서 승리를 하는 것입니다. 조금 감이 잡히세요? 다시 여호수아 7장 1절로 가겠습니다.

 

(여호수7:1) 1 이스라엘 백성이 모든 부정한 것을 없애라는 명을 어겨 죄를 짓는 일이 생겼다. 유다 지파 가운데 제라의 증손이자 잡디의 손자이며 가르미의 아들인 아간이 부정한 것을 가졌던 것이다. 이 일 때문에 야훼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몹시 노하셨다.

 

아간 하나가 범죄를 했는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를 하신다고 하지요?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은 개별자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이라는 집단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 아담, 한 사람 아간이 범죄를 했는데 하느님은 그를 대표로 한 모든 집단을 다 저주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걸 로마서가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로마5:19)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한 사람 아간이 범죄를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이 다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간이라는 사람이 죽자 이스라엘이 저주에서 풀려 승리를 하게 됩니다. 물론 아간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뽑히고 뽑힌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자가 죽었는데 이스라엘이 살아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 중에서 뽑히고, 뽑히고, 또 뽑힌 죄인 중의 죄인인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 대신 유다 지파에서 뽑히고 뽑히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바로 그 아간이 되셔서 대신 죽어 주시는 방법으로 죽어야 할 아간들을 살려 내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십자가 구원의 이야기가 아이 성 전투 속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여호수7:25~26) 25 여호수아가 말하였다. '어쩌다가 네가 우리에게 이런 참혹한 일을 당하게 했느냐? 너도 오늘 야훼께 참혹한 일을 당하리라.' 이 말이 떨어지자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무더기로 만들었다. 또 그의 일족을 불사르기도 하고 돌로 쳐죽이기도 하였다. 26 그들이 그 위에 쌓아 올린 큰 돌무더기는 오늘까지 남아 있다. 그제야 야훼의 극렬한 분노가 걷혔다. 이런 사연이 있어서 그 곳 이름을 오늘날에도 아골 골짜기라 부르는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 완전히 드려져야 하는 자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이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 자기의 자존심과 가치와 영광을 챙기려는 그 상태가 이렇게 돌에 맞아 죽고 불에 살라져야 할 상태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자리로 내려 가셔서 우리에게 쏟아진 저주를 풀어버린 것입니다. 이건 단순히 저의 추론이 아닙니다. 그 아간이 맞아죽은 그 아골 골짜기를 성경이 어떻게 표현하는지 보세요.

 

(이사65:10) 10 사론 평야는 양들이 풀을 뜯는 목장이 되고 아골 골짜기는 *소들의 휴식처가 되리라. 나를 찾는 나의 백성에게 이렇게 해 주리라.

 

(호세2:17) 17 거기에 포도원을 마련해 주고 아골 골짜기를 *희망의 문으로 바꾸어 주리라. 그제야 내 사랑이 그 마음에 메아리치리라. 에집트에서 나오던 때, 한창 피어나던 시절같이.

 

아골 골짜기를 희망의 문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스라엘 중에서 죄인으로 뽑히고 뽑힌 자가 죽은 곳이 희망의 문이 됩니까? 이러한 구절들은 여호수아서의 아간의 이야기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고는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는 구절들입니다. 하느님은 아간의 이야기를 통하여 죄의 실체와 그 죄에 떨어지게 되는 하느님의 저주와 그 저주가 해결되는 방법까지 아울러 설명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아간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보세요. 아간이 죽고 아골 골짜기가 생기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시는데 완벽한 승리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 승리는 하느님의 승리라는 것도 잊지 않으시고 설명을 해주십니다.

 

(여호수8:18,24-26) 18 야훼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에 든 창을 아이 쪽으로 내뻗어라. 이제 내가 저 성을 네 손에 붙인다.' 여호수아는 손에 든 창을 성 쪽으로 내뻗었다. 24 광야 벌판에서 이스라엘을 쫓던 아이 주민은 그 광야 벌판에서 다 죽었다. 그들이 한 사람 남김없이 칼날에 쓰러지자 온 이스라엘은 아이로 돌아 가 그 백성을 도륙하였다. 25 그 날 쓰러진 아이 사람은 남녀 합해서 모두 만 이천이나 되었다. 26 여호수아는 아이 주민을 전멸시키기까지 창을 내뻗었던 팔을 거두지 않았다.

 

여호수아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고 있는 동안 하느님께서 전쟁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승리를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승리의 현장에서 우리가 많이 보던 장면이 연출이 됩니다.

 

(여호수8:28~31) 28 여호수아는 아이를 불질러 영원한 폐허로 만들었다. 그래서 오늘까지 그 곳은 돌무더기로 남아 있는 것이다. 29 그는 아이 왕의 시체를 저녁때까지 나무에 달아 두었다. 여호수아의 명령을 따라 해질 무렵에 그의 시체를 나무에서 끌어내려 성문 어귀에 내던지고 그 위에 큰 돌무더기를 쌓아 올렸다. 그것이 오늘까지 그대로 있다. 30 그 후 여호수아는 에발산 위에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 바치는 제단을 쌓았다. 31 그는 야훼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한 대로 하였다. 그들은 모세의 법전에 기록된 대로 쇠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생돌로 제단을 쌓고 그 위에다가 야훼께 번제물을 올리고 친교제물을 잡아 바쳤다.

 

사탄의 나라를 상징하는 아이 성의 왕이 나무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그 시체가 해질 때에 나무에서 내려집니다. 그리고는 그 시체가 돌무덤에 갇힙니다. 어떠세요? 어디서 본 그림이지요? 예수님도 나무에 달리셨지요? 왜 나무에 달리셨습니까?

 

(신명21:22~23) 22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을 처형하고는 나무에 달아 효시할 경우가 있다. 23 이렇게 *나무에 달린 시체는 *하느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니, 그 시체를 나무에 단 채 밤을 보내지 말고 그 날로 묻어라. 그렇게 두어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 유산으로 받은 너희 땅을 더럽히면 안 된다.

 

예수님은 저주받은 죄인 중의 죄인이 되셔서 나무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의 나라 왕으로 상징이 되는 아이 성의 왕도 나무에 달리고 돌무덤에 갇힙니다. 무엇을 이야기 하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가 사탄의 나라 왕과 같은 죄인 중의 죄인이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사탄나라 왕이 되셔서 죽으신 것입니다.

아간의 이야기가 여기에서 한 번 더 재연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아간과 같이 아이 성의 왕도 자기들의 죄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돌무덤은 아직도 그들을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돌무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흘 뒤에 열렸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필립2:8) 우리의 불순종을 은혜로 덮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의 실체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반복적이며 점층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대표의 원리와 은혜의 현실을 기록하고 있는 로마서 5장 19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로마5:19)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주의나, 율법주의, 인본주의는 자존심이 상해서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약속의 땅에서, 우리는 왜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가를 처절하게 삶으로 배우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간의 범죄가 우리의 삶 속에서 들켜지기도 하고, 아이 왕의 행사가 우리에게서 나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난 이렇게 돌에 맞고 나무에 매달리고 불에 타 죽어야 하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느님께서 은혜로 날 덮으셨다’는 은혜의 복음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자존심과 자만감이 해체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성경이 자기부인이라 하는 것이며 그것을 또한 성도의 영적 전쟁이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 은혜의 복음을 믿지 않고 자신들의 노력과 행위를 의지하는 자들은 어떻게 되는지가 오늘 본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판관1:7) 7 아도니베젝이 이렇게 탄식하였다. '내가 엄지손가락과 엄지 발가락을 자르고 내 상 밑에서 부스러기를 주워 먹게 한 왕이 칠십 명이나 되더니, 하느님께서 내가 한 대로 나에게 갚으시는 구나.' 그는 예루살렘으로 끌려 가 거기에서 죽었다.

 

가나안 왕 아도니베젝이 그의 행한 대로 갚음을 받아 손발의 엄지가 끊긴 채로 죽습니다. 은혜를 아는 자들은 아도니베젝의 상황이 되면 ‘나는 그런 악한 일을 행했지만 하느님의 은혜가 그 악행을 덮으신다’라고 당당하게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도니베젝처럼 하느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나의 행한 대로 내가 갚음을 받는구나’하고 절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대주의, 인본주의, 알매니언 주의의 종말인 것입니다. 그것을 요한묵시록이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묵시22:12) 12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 내가 곧 가겠다.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자기 행적대로 갚아 주기 위해서 상을 가지고 가겠다.

 

이게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들의 결국인 것입니다. 행한 대로 갚음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갈라3:13~14) 13 '나무에 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 받을 자다' 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14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이방인들에게까지 미치게 되었고 우리는 *믿음으로 약속된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는 믿음이라는 배짱으로 하느님의 심판을 미리 받은 자로 하느님 앞에 서면되는 것입니다. 그게 가나안 정복 전쟁이며 판관기 전체에서 기술되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어떠세요? 판관기. 기대가 되지 않으세요? 우리는 앞으로 판관기 공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더욱 더 선명하게 이해를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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