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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 복음서 해설: 갇힌 믿음에서 열린 믿음으로(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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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1,602 추천수0

[요한 복음서 해설] 갇힌 믿음에서 열린 믿음으로(5,1-18)

 

 

예전 중·고등학교 시절에 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기껏해야 영·수 학원이었고, 대개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을 복습하는 수준이었다. 만일 지금의 광기 어린 사교육 현장을 그 시절 사람들에게 제안해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미쳤다.” “애가 무슨 죄냐?”라고 비난하지 않았을까. 프랑스 유학 시절 우리나라 고3 학생들의 하루 일과를 프랑스 국영방송에서 다큐 형식으로 보여 준 적이 있다. 함께 지켜본 프랑스 신부들의 반응은 이러했다 “울랄라! 미친 짓이다!” 왜 우리는 ‘미치게’ 되었을까?

 

신부인 내가 사교육 현장을 비판하면 ‘현실을 몰라서 그렇다’는 반응이 돌아온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이를 낳아 보지도 키워 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낳고 키운 아이들을 입시지옥에 밀어 넣고, 그 이유를 현실 때문이라 자위하는 부모들의 이유치곤 비겁하다.

 

예수님 시대에도 현실을 핑계로 비겁하게 사는 이들이 많았다. 아픈 이들이 많았고, 그들을 대하는 ‘정상적’인 사람들은 비겁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이들을 죄인으로 취급했고 접촉하고 소통하는 데 주저했다. 현실이 그렇다는 이유였다.

 

아픈 이들에겐 희망이 없었다. 소외된 삶의 경험칙은 스스로의 존재 가치와 이유를 내팽개치게 했다. 어떻게든 ‘다른’ 이가, ‘정상적인’ 이가 있어야만 병든 이가 살 수 있는 ‘현실’이 아픈 이에겐 ‘비현실적인’ 망상이었다.

 

예수님께서 병든 이에게 던지신 질문을 보자. 병든 이의 ‘원의’를 물으신다. “건강해지고 싶으냐?”(6절) 병든 이의 답을 보자.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7절). 의지는커녕 낫고자 하는 원의조차 가지지 못한 병든 이는 병과 하나였고, 그것이 그의 전부였다. 본연의 자신이 아닌 그는, 아픈 채 머물고 머문 채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 세월이 38년이었다(이스라엘의 광야 체험 역시 38년의 세월을 필요로 했다. 신명 2,14 참조).

 

상황은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8절). 예수님의 말씀은 병든 이의 원의나 의지, 그렇다고 간절한 청원에 의한 것이 아니다. 공관 복음서에서는 병든 이들의 간절함을 본 예수님께서 치유를 베푸셨다. 요한 복음서의 예수님은 당신을 거부하는 세상에 끝까지 들어와 살이 되어 죽어 가셨다. 그래서 ‘파견된 이’로 그려지신다(1,14.18 참조). 단순히 하느님과 같은 분이시라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님은 뱀의 유혹처럼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게 아니라(창세 3,1 이하 참조), ‘일’을 통해 하느님을 이 세상에 소개하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드러내기 위해 움직였고 가르치셨다. 그것이 그의 권위이자 권능이었다. 세상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예수님은 이 지상에, 이 어둠에 하느님을, 빛을 드러내는 데 그의 삶을 온전히 봉헌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현실에 억눌려 화석이 된 믿음을 열린 믿음으로 바꿔 놓는다. 우리는 예수님이 치유하셨다는 데 이야기의 초점이 있다고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야기에서 치유와 관련된 표현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공관 복음서에 흔히 등장했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치유의 확인조차 절제되고 있다. 그저 그분 말씀이 전부고, 이 말씀 하나로 현실이라는 감옥에서 서로의 족쇄가 되었던 병든 이와 벳자타 못의 지긋지긋한 연결고리가 끊어진다. “가거라.” 병든 이는 가야 한다. 그가 그이기 위해서, 그가 그로 살기 위해서.

 

문제는 이런 기적이 일어나도 좀처럼 변하지 않고 ‘완고한 신앙’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낫기를 바라며 벳자타 못에 줄곧 머물던 이들 중에 하나가 예수님을 통해 낫게 된 새로운 사건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케케묵은 그러나 여전히 포기할 수 없었던 안식일 논쟁을 끄집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안식일 논쟁은 예수님과 당시 기득권 세력 간의 주요 다툼 중에 단연 최고였다(마태 12,1-14; 마르 2,23-3,6; 루카 6,1-11 참조). 종교적 시간에 얽매어 있는 종교 지도자들은 시간 너머 태초부터 계셨던 하느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시간 속에 갇혀, 안식일의 본디 의미인 하느님과의 연결고리를 도무지 찾지 못한다(탈출 31,12-14 참조). 하느님이 당신의 일을 보여 주셨는데도, 인간은 하느님의 계명을 핑계로 하느님을 밀어낸다. 믿는다 하면서, 믿고 보고 깨닫는다 하면서 자신의 기존 가치에 대한 합리화에 급급한 게 사람이다. 사람들이란 늘 그렇다.

 

병든 이가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안식일 논쟁의 본질적 허구가 드러난다. 안식일에 하지 말라는 것을 행한 이유에 대해, 그 책임에 대해 병든 이는 맞서야 했다. 예수님이 오셔서 무엇이 새로워졌는지 그가 누구인지, 병든 이는 이야기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비켜 간다. 예수님에게 이유와 책임의 짐을 떠넘긴다. 안식일 계명을 핑계로 진짜 하느님을 버린다. 배운 사람이든 아니든 율법을 들고, 전통을 들고, 법을 들고 나오는 이들의 한계는 늘 ‘사람다운 관계 형성’을 거부하는 완고함에 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런 세상과 사람을 먼저 ‘찾으신다.’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 나서신다.’ 성전에서 병든 이를 먼저 보고 찾은 분은 예수님이셨다(14절 참조). 나타나엘의 경우가 그랬고(1,48 참조), 눈먼 이의 이야기에서도 그랬다(9,35 참조). 지금 이야기의 장소는 성전이다. 아픈 이, 병든 이가 들어갈 수 없었던 곳에 병든 이였던 그가 버젓이 와 있다. 비정상인이었던 그가 정상인이 되어, 다수가 ‘현실’이라는 세상 안에 살아 들어와 있다. 그럼에도 병든 이는 여전히 예수님을 모른다. 은총은 주어지되,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은 더디기 마련이다(루카 17,17-18 참조). 다수가 ‘현실’이라고 하는 자리는 예수님을 만나는 데 비현실적인 자리다. 여기는 성전이다.

 

하느님은 예나 지금이나 줄곧 일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이 쉼 없이 지금 여기에서도 일하신다는 생각을 수시로 잊어버린다. 인간이 세워 놓은 전통과 그것으로 지시하고 규정하는 현실이 지금 여기에서 너무나 막강하게 작동되기 때문이다. 전통과 현실을 핑계로 하루하루 흘러가듯 안온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거부되고 소외된다. 예수님은 현실에 함께 있되, 인간은 그 현실을 예수님 없이 살아가는 데 너무 익숙하다.

 

‘현실이 그렇잖아!’라는 말만큼 신앙에 위협적인 말은 없으리라. 고작 이 현실에 적응하려고 수고롭게 신앙을 갖는 것이라면, 우린 참 서글프지 않을까. 예컨대, ‘대수천(대한민국 수호 천주교 신자모임)’이라는 모임이 만들어졌다는 오늘의 현실이 서글프다. 오히려 ‘하수천(하느님 나라 수호 천주교 신자모임)’을 만들어 이 ‘현실’을 이겨 내고 고쳐 가야 하는 게 믿는 자의 도리가 아닐까.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사제품을 받은 후 2009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과 대중 강연,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0월호(통권 475호), 박병규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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