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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 복음서 해설: 참된 예수, 참된 신앙(4,4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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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2,001 추천수0

[요한 복음서 해설] 참된 예수, 참된 신앙(4,43-54)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들은 역사에서 수없이 많았고 지금도 많을 테다. 다만 예수님에 대한 개념이 뒤틀렸던 적 또한 수없이 많으니, 참된 예수님을 고백하는 일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가 없다. 이를테면 우리 교회는 성지 탈환을 목적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신앙을 지킨다는 미명 아래 마녀사냥을 자행했다. 이 모든 일이 참된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들이 저질렀던, 그분에 대한 개념을 왜곡한 행태다.

 

오늘 복음은 왕실 관리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갈릴래아 지역의 분위기를 언급한다. 갈릴래아는 예수님의 고향 지역이지만 예수님 스스로 예언자가 존경을 받지 못하는 곳이라고 지적하신 바 있다. 그런데 요한 복음서가 전하는 갈릴래아 사람들은 사뭇 다르다. 다른 복음서에 나타난 갈릴래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인식하고 그분의 입바른 소리에 그분을 죽이려고 덤벼들기까지 했다(마르 6,1-6; 루카 4,16-30 참조). 하지만 요한 복음서는 이러한 갈등을 비켜 간다. 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도 예수님께서 축제 때 예루살렘에서 하신 행위를 보고 놀랐기 때문이다. 갈릴래아에서 예수님은 예언자로서가 아니라 신기한 일을 하는 마술사로 맞아들여진다. 예수님을 직접 보고 그분 말씀을 직접 듣는 갈릴래아 사람들에게 그분은 개념 왜곡의 대상이었던 셈이다.

 

왕실 관리 역시 믿기지 않는 일이 예수님을 통해 자신에게도 일어나길 간절히 바랐을 터다. 죽을 위험에 처한 아들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은 믿음의 주체가 아니라 기적의 주체가 되어야만 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을 기적의 요행쯤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부정적 평가를 내리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기적을 바라본다. 예수님의 말씀부터 들어보자.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48절). 표징과 이적을 믿음의 문제로 연결시키는 이 말씀에서, 요한 복음서는 표징과 이적은 거부되는 게 아니라 믿음을 갖는 데 소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끄집어낸다.

 

오늘 복음에서 보여 주는 예수님의 치유 행위와 닮은 이야기가 유다이즘에도 있다. 라삐 가말리엘은 아들이 아프자 제자 둘을 라삐 하니나 벤 도사에게 보내어 아들을 고쳐 달라고 청하였다. 라삐 하니나는 기도를 올렸고 그 시간에 라삐 가말리엘의 아들이 나았다고 한다. 표징과 이적은 신앙에 어긋나는 게 아니라 신앙을 북돋우는 도구로 인식되던 유다 사회였고, 요한 복음서도 같은 맥을 짚어낸다.

 

요한 복음서의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치유 행위가 특이한 것은 왕실 관리의 출신 성분 때문이다. 그 관리는 이방인이었다. 지난 호에 읽었던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에서도 이방인으로 취급받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믿게 되었음을 보았다. 이방인들에게는 예수님이 예언자인지 기적쟁이인지, 아니면 메시아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방인들, 특히 왕실 관리에게는 간절한 외침 하나만이 중요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49절). 이 외침은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움직이시길 바라는 데 소용될 터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움직이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이 왕실 관리를 움직이게 하신다. “가거라”(50절). 이 말씀 한마디는 왕실 관리가 예수님을 만나 얻어낸 유일한 소득이다. 그 밖에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말씀 한 마디’, 그것이 왕실 관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우리로선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중요한 것은 왕실 관리가 예수님의 그 말씀 한마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예수님을 통한 표징이나 이적을 전혀 체험하지 못한 왕실 관리는 갈릴래아 사람들과 확연히 다르다. 축제 때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신기한 일에 현혹된 갈릴래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은 또 다른 신기한 일을 기대하는 구경꾼의 수준을 드러낸 것뿐이다. 반면 왕실 관리에게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 그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이해되는 분이시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의 본질을 여실히 목격한다. 왕실 관리는 움직인다. 말씀 하나를 달랑 들고 병든 아들에게 간다. 그리고 발견한다. 아들이 낫게 된 시각이 예수님께서 외쳤던 ‘가거라’라는 말씀이 울려 퍼지던 바로 그때라는 사실을.

 

신앙의 자리는 이런저런 이해관계로 도출되는 성과물이 놓이는 곳이 아니다. 온전한 의탁, 또는 전적인 간절함이 만들어 내는 실천적 움직임에서 신앙은 도드라진다. 억지 신앙 고백을 하면서 신앙이 아닌 것을 그렇다고 우기는 세상에서는 피의 보복이 악순환될 뿐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 다른 예수님을 죽인 우리 교회의 못난 역사가 그 사실을 되새겨 주며 깨닫게 한다.

 

참된 신앙은 단순함 하나로 족하다. ‘말씀 한마디’를 듣고, 그것을 전부로 여기는 태도, 그것이 신앙이다. 이런 신앙은 삶의 언저리를 더욱 넓혀 간다. 내 것을 우겨 내가 보고 싶은 것을 추구하는 이들의 신앙은 자신의 삶조차 죽이지만, 단순히 의탁하고 따르는 신앙은 삶의 언저리를 사람들로 붐비게 한다. 왕실 관리뿐 아니라 그의 온 집안이 함께 신앙의 길로 들어섰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사도행전도 참된 신앙이 가정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곳곳에서 보여 준다. 코르넬리우스 집안이 그랬고(사도 10,34-48 참조), 리디아 집안(사도 16,15 참조), 필리피 간수의 집안(사도 16,31-34 참조)이 그러했다. 제대로 된 신앙 고백은 그 열매를 맺는 데 더디지 않다.

 

우리 교회가 예수님을 왜곡했던 과거는 예수님에 대해 너무 복잡하게 해석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저 ‘네’ 한마디 하고 예수님처럼 살면 될 터인데, 예수님은 이렇고 저런 분이라고 강변하면서 무턱대고 자신의 신념을 내세웠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도 그렇게 하는 우리에게 참된 예수님은 요원할 것이고, 오히려 예수님이 죽으신 자리를 다시 더듬을 뿐임을 알아야 한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사제품을 받은 후 2009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과 대중 강연,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9월호(통권 474호), 박병규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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