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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행복한 비유 읽기: 바리사이와 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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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9-10 조회수592 추천수0

[전원 신부의 행복한 비유 읽기] 바리사이와 세리


진정 성숙한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9-14)

 

우연히 성당 문 앞에서 한 자매와 마주쳤습니다. 원망일지 슬픔일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다짜고짜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면담을 계획하고 온 것 같지는 않고, 성당이 있으니까 들어왔다가 사제복을 입은 저와 마주치자 저를 붙잡고 말을 걸어왔던 것입니다. 그 자매는 외국에서 공부를 하다가 그곳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외국에 살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몇 년 만에 한국에 와서 요양원에 계시는 아버지를 만나고 난 후, 왠지 슬픔이 밀려와서 성당을 찾았다고 했습니다.

 

그 자매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옛날 저의 아버지는 참으로 멋진 분이었습니다. 중소기업을 경영하셨는데 사람들이 모두 아버지를 좋아했고 집에서는 자상한 아버지셨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저에게는 산(山)과 같은 분이셔서 내가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잃고 요양원에 계신 지금의 아버지는 옛날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본성만 남은 아버지는 초라함을 넘어 비굴하기까지 해보였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뵙고 오니 너무 속이 상합니다.”

 

제가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어찌 자매님 아버지만의 모습이겠습니까? 인간이 늙고 병들면 약한 본성만이 남아서 보잘것없고 초라해지는 것이 우리 인간의 공통된 본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자매님은 아버지가 가진 사회적 지위와 재력, 그분의 능력만을 아버지로 보았지, 한 인간 실존이 안고 사는 약함과 초라함은 보지 못했던 것이지요.”

 

박노해 시인의 <무엇이 남는가>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무엇이 남는가/ 정치가에게 권력을 빼보라/ 무엇이 남는가/ 성직자에게 직위를 빼 보라/ 무엇이 남는가/ 지식인에게 명성을 빼보라/ 무엇이 남는가/ 빼 버리고 남은 그것이 바로 그다/…(이하 생략)

 

이 시를 그대로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서 질문해보면 어떨까요? 당신이 가진 신분을 빼보라, 무엇이 남는가, 당신이 가진 재산도, 당신이 내세우는 알량한 지식도, 학벌도 다 빼보라. 정말 당신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그게 바로 진정한 당신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알라딘’이라는 월트 디즈니 만화 영화가 있지요. 이 영화는 거리를 떠도는 거지이며 좀도둑에 불과한 알라딘이 어느 날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는 요술 램프를 손에 넣자, 자신의 소원대로 마법으로 멋진 왕자로 변신하여 아그리바 왕국의 자스민 공주의 사랑을 얻어 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영화 속 주인공 알라딘처럼 이런 마법에 빠져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특별히 자본주의를 사는 오늘날은 돈이 알라딘의 램프가 되어 우리 사회에 마법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 마법은 화려하고 진기한 온갖 값비싼 재료들로 세상을 꾸며놓고 그 안에 살도록 사람들을 몰아넣습니다. 명품 옷을 입혀주고 값비싼 자동차와 집을 소유하게 해서 마치 사람들을 왕자처럼 둔갑시켜줍니다. 사람들은 마법이 만들어 놓은 신기루 같은 허상 속을 살면서 자신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잊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마법에서 풀려나 영화 속 마법의 램프를 잃은 주인공처럼 된다면 무엇이 남을까요? 우리가 힘을 쓰고 살았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서두에서 말한 한 자매의 아버지처럼 본모습만 남게 된다면 자신은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 자신이 바로 그저 좀도둑이고 거지에 불과한 영화 속 주인공 알라딘은 아닌지요?

 

예수님의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는 서로 대비되는 신분을 등장시켜 진정 우리들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만나게 합니다. 본문에서 보듯이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기도합니다. 여기에서 ‘혼잣말’이란 직역하면 하느님을 향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πρός ἑαυτὸν) 기도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리사이의 기도 내용을 보면 그래서 하느님은 없고 오로지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의 공덕과 의로움을 드러내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바리사이와 사제, 율법학자 그리고 사회의 부유층들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하층민들을 자신들과 분리해놓고 율법을 알지도 지키지도 못하는 저주받은 자들(요한 7,49 참조)로 이해했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들이 가지고 누리고 행하는 모든 것은 자신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고, 그것은 곧 자신의 존재와 동일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실상과 마주하고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지고 누리는 것에 기대어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모습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세리는 하늘을 향하여 감히 눈을 들지도 못하고 멀찍이 서서 기도합니다. 그는 바리사이와 달리 오로지 선하신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하느님 앞에 죄를 성찰하고 부끄러워하며 자신의 비천한 실상을 진실하게 고백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하는 세리의 기도는 마치 시편 51장의 시작부에 다윗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청하는 기도를 닮아 있습니다. 특히 시편 51장 19절,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라는 시편 저자의 기도처럼, 세리는 자신의 부서진 영과 꺾인 마음에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결론은 하느님 앞에 의롭게 된 사람이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였다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성숙을 말할 때 자기관(self-concept)과 자부심(self-esteem)이라는 두 개념이 있습니다. 자기관이란 우리가 안고 사는 장점과 약점, 재능과 결점들을 인식하고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고, 여기에 대응하는 자부심(또는 자존감)은 자신이 인식한 자기관에 대하여 어떻게 해석하고 느끼는지, 즉 자신의 가치에 대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말합니다. 따라서 자기관과 자부심이 균형 있게 잘 발전해 있을 때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는 진정 성숙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또한 하느님 앞에 의롭게 된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사실 겉은 번드레한 바리사이에게서 그의 신분과 그가 가지고 누리는 것을 모두 빼고 나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어쩌면 세리보다 못한 비천하고 초라한 실상이 그의 본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자신의 자존감은 사회적 지위나 신분, 가진 것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의롭게 될 때 우리의 본성은 품위를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크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게 하고, 자신이 죄스럽고 비천한 존재임을 깨달아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에 힘입어 살아가는 사람이 되라는 초대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이해하고 자부심(자존감)을 회복한 성숙한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타인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영화 알라딘은 더 이상 마법이 꾸며놓은 허구의 왕자가 아니라, 진실한 인간 알라딘으로 돌아와 자스민 공주와 진정한 만남과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우리도 마법이 꾸며놓은 세계에서 어서 깨어나야 합니다. 겹겹이 우리를 싸고 있는 허울을 벗고 나면 하느님께 바칠 제물은 ‘부서진 영과 꺾인 마음’뿐이지만, 가슴속 진실을 기뻐하시는 하느님(시편 51,8 참조)은 기꺼이 우리를 치유하고 회복시켜주십니다. 세상의 마법에서 깨어나 하느님 앞에 의로움을 회복한 이런 사람만이 본래의 아름다운 본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만이 차별 없이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고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전원 -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로서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영성을 공부하였으며 현재 도봉산성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고 있다. 저서로 『말씀으로 아침을 열다 1ㆍ2』 『그래, 사는 거다!』가 있다.

 

[생활성서, 2019년 9월호, 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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