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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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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9-22 조회수1,564 추천수0

[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엘리야 (1)

 

 

열왕기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임금들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여러 예언자의 이야기가 그 흐름을 끊으며 등장합니다. 다윗 때부터 활동을 시작해 솔로몬의 등극에 결정적 역할을 한 나탄, 예로보암에게 임금의 자리를 약속한 아히야, 르하브암 임금을 저지한 스마야, 예로보암 임금 앞에서 베텔의 제단을 무너뜨리는 무명의 예언자와 베텔의 나이든 예언자, 아합 임금 시대에 바알의 예언자들을 물리치고 호렙 산에서 하느님을 만난 엘리야, 아합 임금의 패전을 예언한 미카야, 엘리야의 제자로 여러 이적을 하고 특히 나아만의 병을 치유한 엘리사, 히즈키야 임금 시대에 활동을 시작한 저 유명한 이사야 등 여러 예언자가 활동하며 주님의 뜻을 전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른 삶을 살 것을 역설했습니다.

 

열왕기의 여러 예언자 중 가장 인상적인 예언자는 단연 엘리야일 것입니다. “나의 하느님은 주님(야훼)이시다.” 그의 이름에는 이미 주님께 대한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말하고 행동한 이, 불타는 열정의 예언자, 그래서 마침내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 그토록 갈망하던 천상의 삶으로 넘어간 하느님의 사람,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에도 모세와 함께 등장하는 엘리야, 그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엘리야의 첫 일성은 가뭄의 선포였습니다. “하느님을 두고 맹세합니다. 앞으로 몇 해 동안 이슬도 비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1열왕 17,1) 이 가뭄은 삼 년 동안 지속됩니다(18,1). 샘과 시내가 마르고 풀도 찾아볼 수 없을 지경에 이릅니다(18,5). 지독한 가뭄이 내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임금 아합의 죄 때문입니다. 아합은 단과 베텔에 세운 금송아지 앞에 나아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아내 이제벨을 따라 우상 ‘바알’을 섬기고, 여신상 ‘아세라 목상’을 세워 주님의 분노를 샀습니다(16,31-33). 게다가 왕비 이제벨은 주님의 예언자들을 학살하기까지 했습니다(18,4.13). 임금과 왕비의 이러한 행위는 백성마저 죄악의 길로, 곧 주님을 버리고 예언자들을 해치게 만들었습니다(19,14). 결국 주님의 분노가 그들이 사는 땅 위에 가뭄으로 내렸습니다. 주님을 저버리고, 비와 폭풍우의 신이라 불리는 바알을 찾는 이들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바알에게 아무리 빌어도 해갈의 비는 내리지 않습니다. 그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우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분노’는 파괴와 파멸을 위한 것이 아니라, 회개와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만일 전자라면, 땅이 아니라 사람에게 직접적인 재앙이 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이 선택한 이들을 버리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이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오도록, 그리하여 당신이 누구신지 알게 하려고, 이 사건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참으로 주님을 알고 그분께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나 봅니다.

 

가뭄을 선포한 엘리야는 곧장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의 몸을 숨깁니다. 크릿 시냇가에 숨어 있는 그에게 까마귀들이 먹을 것을 날라다 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말라버리고 더 이상 거기서 지낼 수 없게 됩니다(17,1-7). 그러자 주님은 그를 시돈 지방의 사렙타라는 마을의 과부에게 가서 지내라고 하십니다. 가뭄으로 모든 것이 메말랐지만, 엘리야가 머무는 집은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습니다(17,8-16). 엘리야가 머무는 개천이나 마을은 모두 이스라엘의 세력권 바깥입니다. 이스라엘의 배신은 주님의 분노를 불러왔고, 이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지역까지 고통에 시달리게 만들고 죽음의 위협 앞에 놓이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람, 예언자가 머무는 곳에는 빵과 고기가 있고, 밀가루와 기름이 있습니다. 게다가 죽음의 위협마저 거두어집니다. 사렙타의 과부의 아들이 숨을 거두자, 엘리야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주님께서 그 목숨이 되돌아오게 만들어 주십니다(17,17-23). 이스라엘이, 임금부터 백성까지, 주님께 등을 돌리고 주님의 예언자들을 살해하고 있을 때, 시돈 - 이민족의 땅, 바알이라는 우상의 본고장 - 에서는 주님의 예언자가 공경을 받고 주님께 대한 신앙이 고백됩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아니고, 당시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권리마저 잃어버리고 천대 받던 여인, 바로 사렙타의 과부 입에서 그 고백이 나옵니다. “이제야 저는 어르신께서 하느님의 사람이시며, 어르신의 입으로 전하는 주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17,24)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백성을 돌보아야 하는 임금에게 고통 받는 백성들은 관심 밖입니다. 그는 자신의 ‘말과 노새’를 위해 물을 찾아 나섭니다(18,5). 그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의 재산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아, 언제나 사람들은 돌처럼 단단한 마음을 버리고 주님을 찾는 부드러움으로 자신을 채우게 될까요? 아, 언제나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도 바라보게 될까요? 그런 기회가 올까요? 도대체 그 기회는 어디서 어떻게 얻어지나요?

 

이 상황을 바꾸어, 모든 고통을 거두고 이스라엘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주님은 당신의 예언자를 다시 파견하십니다. “가서 아합을 만나라. 내가 땅 위에 비를 내리겠다.”(18,1) 주님의 개입으로 모든 것은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예언자 엘리야가 주님 말씀대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는 순간부터 이미 모든 것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저 유명한 카르멜 산 위에서의 대결(18,20-40)이 모든 것을 뒤집어 놓을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2018년 9월 23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의정부주보 5-6면,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선교사목국 성서사목부 담당)]

 

 

[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엘리야 (2)

 

 

삼 년의 가뭄 끝에 엘리야는 은둔의 삶을 끝내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아합 임금 앞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임금에게 ‘온 이스라엘과 바알의 예언자 450명과 아세라의 예언자 400명’(1열왕 18,19)을 카르멜 산으로 불러달라고 요구합니다.

 

바알은 바다에서 구름을 일으켜 비를 내려준다고 믿어지던 가나안 지방의 신이었습니다. 또한 시돈의 공주로 아합 임금의 아내가 된 이제벨이 섬기던 우상이기도 했습니다. 시돈으로 가는 길목의 바다를 바라보는 카르멜 산이 바알의 예언자들과 엘리야의 대결의 장소로 선택되었다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합니다. 이곳에서의 결과로 누가 과연 이스라엘의 진정한 신인가가 드러날 것입니다.

 

카르멜 산에 모인 백성들에게 엘리야는 묻습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18,21) 여호수아가 스켐에서 던졌던 질문(여호 24,14-15)과 맥락을 같이 하는 질문이 엘리야의 입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주님이냐? 다른 신이냐? 선택하라.’ 여호수아 앞의 백성들은 세 번에 걸쳐 주님만을 섬기겠다고 다짐했지만(여호 24,18.21.24), 지금 엘리야 앞의 백성은 침묵합니다(1열왕 18,21). 결과를 보고 결정하겠다는 생각이었을까요? “여러분은 여러분 신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나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겠습니다.”(18,24) 엘리야가 보기에 그들은 이미 주님을 저버리고 바알에게로 넘어간 이들입니다. 앞서의 백성들을 질책하는 엘리야의 말에 ‘절뚝거린다.’는 말이 뒤에서 바알의 예언자들의 행동을 묘사할 때도 쓰인다((18,26)는 점이 이를 또한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 카르멜 산 위에 엘리야만이 홀로 주님의 사람으로 서 있고(18,22), 임금과 바알의 예언자들만이 아니라 백성 전체까지 그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엘리야는 제안합니다. ‘황소를 한 마리씩 가져다 장작 위에 놓고 신의 이름을 불러보자. 불로 대답하는 신이 바로 하느님이다.’(18,23-24) 모두가 동의합니다. 그리고 수가 많은 바알의 예언자들이 먼저 시작합니다. 큰 도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장작에 불이 붙는다면, 엘리야에게는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날리 없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제단을 돌고, 큰소리로 외치고 칼과 창으로 자해도 해보지만, 바알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18,25-29).

 

이제 엘리야 차례입니다. 그는 백성들을 가까이 부릅니다(18,30). 그리고 이스라엘 지파 수대로, 곧 열두 개의 돌로 제단을 쌓고, 그 둘레에 도랑을 팝니다. 장작을 쌓고 소를 잡아 올립니다. 그리고 물을 길어다 그 위에 붓게 합니다. 세 번이나 퍼부은 물은 황소와 장작, 제단을 다 적시고 도랑까지 가득 채웁니다(18,20-35). 이 과정이 천천히 이루어집니다. 때가 되자 엘리야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의 하느님”(18,36)께 청합니다. “저에게 대답해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대답해주십시오.”(18,37ㄱ) 그가 이렇게 주님을 부르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주님, 이 백성이 당신이야말로 하느님이심을 알게 해 주십시오.”(18,37ㄴ)

 

기도가 끝나자마자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 버렸다.”(18,38). 지난한 준비과정과는 달리 눈 깜박할 사이에 모든 것이 불에 타 없어집니다. 이제 참으로 하느님이 누구신지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눈앞에서 지켜본 백성은 엎드려 부르짖습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18,39) 거짓 예언자들에 속아 거짓 신을 따르던 백성은 이제 눈을 뜨고 바로 보게 되었습니다. 누가 하느님인지 누가 우상인지, 누가 참 예언자인지 누가 거짓 예언자인지!

 

바알의 예언자들은 백성들의 손에 잡혀 엘리야에게 넘겨지고, 엘리야는 카르멜 산 아래의 키손천에서 그들을 죽입니다(18,40). 이는 우상을 섬기도록 이끄는 이들을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없애라는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신명 13,1-19). 우상을 내세우며 그 우상을 따르자고 유혹하던 바알의 예언자들이 사라지자, 땅 위에 비가 내립니다. 길이 막힐 정도로 큰 비가 내립니다(18,41-45). 이로써 비를 내려주시는 분, 생명의 축복을 내려주시는 참 하느님은 오직 주님이시라는 것이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우상들은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입니다. “저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 사람 손의 작품이라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네. 그들의 손은 만지지 못하고, 그들의 발은 걷지 못하며, 그들의 목구멍으로는 소리 내지 못하네. 그것들을 만드는 자들도 신뢰하는 자들도 모두 그것들과 같네.”(시 115, 4-8; 참조 135,15-18)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우상에게 끌려가는 이들을 만납니다. ‘이렇게 하면, 액운을 막아준다. 재수가 좋다. 돈을 벌게 해준다. 취업하게 된다. 조상의 한을 풀어준다.’ 그 말들에 끌려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두 부질없는 일들인데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가 만일 이웃의 고통 앞에서 말하지 않고, 그것을 외면한다면, 그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 찾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이 아니라, 우리 안의 우상을 쫓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이는 ‘주님’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신, 내 얘기를 들어주고, 내 필요를 채워주고, 내 현재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그런 있지도 않은 상상 속의 신’을 찾고 있는 것이라는, 역설적인 생각이 문득 떠오르며 ‘씁쓸한 웃음’이 스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19,19; 22,39; 마르 12,31; 루카 10,27; 로마 13,9; 갈라 5,14; 야고 2,8; 레위 19,18) 엘리야 이야기를 읽는데, 주님의 말씀이 자꾸 머리를 맴돌며 더 크게 들려옵니다. [2018년 9월 30일 연중 제26주일 의정부주보 5-6면,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선교사목국 성서사목부 담당)]

 

 

[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엘리야 (3)

 

 

카르멜 산 위에서의 대결에서 승리(1열왕 18,20-40)한 엘리야에게 위험이 닥칩니다. 왕비 이제벨이 그를 죽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엘리야는 ‘두려워 목숨을 건지려고’(19,3) 달아납니다. 그는 북 이스라엘 왕국의 북쪽 경계인 이즈르엘 평원에서 출발해 남 유다 왕국의 남쪽 끝 브에르세바까지 다다랐습니다. 거기서 그는 홀로 광야로 나가 죽기를 바랍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주십시오.’(19,4) 그토록 당당하던 엘리야는 사라지고 겁에 질려 떠는 사람만이 남은 듯합니다. 이 갑작스런 변화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비슷한 장면과 비교해 봄으로써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요나가 니네베가 어찌 되나 보려고 성읍 밖에 자리했을 때의 일입니다. 거기서 요나는 외칩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요나 4,3)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던 아주까리가 시들어버리자 또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4,8). 엘리야와 요나 모두 광야의 그늘에 앉아 있다가 죽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모두 주님께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었고, 그에 따라 행동했었습니다. 거칠 것이 없었고, 당당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과 선포는 강력한 결과들(즉각적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불, 니네베 사람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그들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일이 전개됩니다. 요나는 그 도시가 무너지기를 기다렸는데, 니네베는 회개함으로써 재앙에서 벗어났습니다. 엘리야는 바알의 예언자들을 물리치고 그들을 없애버렸는데, 그 세력은 사라지지 않고 도리어 그의 목숨을 위협하고 그는 달아나야 했습니다. 결국 이 두 예언자가 청하는 것은, 진짜로 목숨을 거두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투정이며 ‘도대체 왜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십니까?’라는 항의의 외침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대신에 천사를 보내 그에게 빵과 물을 먹고 쉬게 하십니다(19,5-8). 힘을 얻은 엘리야는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19,8) 하느님의 산 호렙(시나이의 다른 표현)에 다다릅니다. 그를 위해 준비하신 놀라운 체험을 위해 하느님은 그를 홀로 머물게 하시고, 쉬게 하시고, 침묵 속에 걷게 만드셨나 봅니다. 마침내 도착한 ‘하느님의 산’, 거기서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사건을 마주하게 됩니다.

 

엘리야는 ‘거기에 있는 동굴’(19,9)에서 밤을 지새고 있었습니다. 이 동굴은 아무 동굴이 아니라 ‘그 동굴’, 바로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직접 만나는 장면(탈출 33,18-34,8)에 등장하는 그 ‘동굴’(탈출 33,22)입니다. 같은 곳에서 엘리야도 비슷한 방식으로 하느님을 직접 만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타나시는 장면(신현 神顯 Theophania, 1열왕 19,11-13)은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이 장면은 탈출기에 묘사되는 시나이 사건과 비교됩니다. “셋째 날 아침, 우렛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고 짙은 구름이 산을 덮은 가운데 뿔 나팔 소리가 울려퍼지자… 그때 시나이 산은 온통 연기가 자욱하였다. 주님께서 불속에서 그 위로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 연기가 솟아오르며 산 전체가 심하게 뒤흔들렸다. 뿔 나팔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 하느님께서 우렛소리로 대답하셨다.”(탈출 19,16-20) “온 백성은 우렛소리와 불길과 뿔 나팔 소리와 연기에 싸인 산을 보고 있었다.”(탈출 20,18) 탈출기는 마치 화산이 활동할 때의 현상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엘리야 이야기도 비슷합니다. 먼저 ‘바위를 부술 정도로 크고 강한 바람’이 지납니다. 다음으로 지진이, 그리고 불이 일어납니다. 폭풍과 지진과 불, 탈출기와 유사합니다. 그런데 그 현상들의 묘사 뒤에 매번 곧장 뒤따르는 말이 탈출기의 사건과 엘리야의 체험 사이에 간극을 만듭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 주님은 계시지 않았다.’ 그리고 말합니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1열왕 19,12)

 

엘리야가 주님께서 오셨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이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를 들었을 때입니다. 그런데 다시 보면, 탈출기도 주님께서 나타나심을 말할 때, 하느님의 ‘소리’(히브리어 qol, 영어 voice, 불어 voix)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인간이 알아채는 것은 현상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신현의 이야기는, 하느님은 자연현상 -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강력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우상을 따르던 이들이 자연현상을 신적존재로 착각하고, 그 현상에 매달리는 것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강력한 현상이 아니라,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1열왕 19,12.13)로 다가오십니다. 그 소리는 모세를 부르신 그 말씀이며, 엘리야를 찾아와 그에게 말을 걸어오던 그분의 목소리, 곧 그가 익히 듣고 알던 바로 그 ‘목소리’입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눈앞의 놀라운 현상들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그분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찾아오신 주님의 소리를 듣고 그분의 오심을 알아챘습니다.

 

엘리야는 이 주님과의 만남 이후 더 이상 불평이나 항의를 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주님의 말씀대로 길을 가고 행동할 뿐입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이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그대로입니다. 주님은 외적인 놀라운 현상, 온갖 초자연 현상으로 찾아오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그 다가오심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그 말씀에 귀 기울이고 따르는 것, 그것이 진정 주님을 믿고 섬기는 이의 모습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2018년 10월 14일 연중 제28주일 의정부주보 5-6면,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선교사목국 성서사목부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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