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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리]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30: 대사제 카야파의 저택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06-16 조회수3,561 추천수1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30) 대사제 카야파의 저택



올리브 산의 겟세마니에서 체포되신 예수님은 대사제의 저택으로 끌려가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대사제에게 끌고 갔다. 그러자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이 모두 모여 왔다.”(마르 14,53) 같은 장면을 전하는 마태 26,57은 대사제의 이름을 카야파로 명시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카야파 대사제에게 끌고 갔다.”(마태 26,57) 예수님은 카야파 대사제의 저택에서 최고 의회로부터 신문받으셨다. 그때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님을 뒤따라 대사제의 저택 안뜰까지 들어가, 시종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마르 14,54) 베드로는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르 14,30)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분을 부인했다.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난 대사제 카야파의 저택에 대한 문헌 연구와 고고학적 발굴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 위치와 지형

오늘날의 시온 산(Mount Sion)에 있는 최후 만찬 기념 경당(Coenaculum)에서 나와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던 방향으로 남쪽 성벽을 따라 걷다가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세 계곡인 힌놈 계곡(Hinnom Valley), 티로포에온 계곡(Tyropoeon Valley), 키드론 계곡(Kidron Valley)과 옛 다윗 성(City of David)을 바라다 볼 수 있는 전망대를 만난다. 이 전망대 근처에, 즉 시온 산의 남동쪽 비탈에 베드로 닭 울음 성당(Saint Peter in Gallicantu)이 있다. 이 성당은 전통적으로 대사제 카야파의 저택에 세워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한 반대 의견도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대사제 카야파의 저택이 현재 예루살렘의 아르메니아 정교회 공동묘지 부근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 신약성경의 대사제 카야파

세례자 요한의 등장을 전하는 루카 3,1-2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라고 기록한다. 요한 11,49-51에 따르면 카야파는 “그 해의 대사제”, 즉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당하신 그 해의 대사제였다. 사실 카야파는 기원후 18-36년 사이에 예루살렘 성전의 대사제였다. 그리고 카야파는 한나스의 사위였다. “한나스는 그 해의 대사제 카야파의 장인이었다.”(요한 18,13) 사도 4,6에도 한나스와 카야파는 함께 언급된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 의회에서 증언했을 때, “그 자리에는 한나스 대사제와 카야파와 요한과 알렉산드로스와 그 밖의 대사제 가문 사람들도 모두 있었다.” 대사제 카야파는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유다 고대사』 18권 35와 95에서도 언급된다.

대사제 카야파의 저택에서 “수석 사제들과 온 최고 의회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려고 그분에 대한 증언을 찾았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다.”(마르 14,55) 왜냐하면 사실 많은 사람이 그분께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였지만, 그 증언들이 서로 들어맞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대사제는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라고 질문하고 예수님은 “그렇다.”(마르 14,61-62)라고 대답하신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정체(identity)와 관련하여 “하느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임을 인정하신다. 마침내 대사제는 “자기 옷을 찢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인이 더 필요합니까? 여러분도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사형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단죄하였다.”(마르 14,63-64)

그리고 마르 14,66-72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다. “베드로가 안뜰 아래쪽에 있는데 대사제의 하녀 하나가 와서, 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를 보고 그를 찬찬히 살피면서 말하였다. ‘당신도 저 나자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지요?’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겠소.’ 하고 부인하였다. 그가 바깥뜰로 나가자 닭이 울었다.”(66-68절) “조금 뒤에 곁에 서 있던 이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당신은 갈릴래아 사람이니 그들과 한패임에 틀림없소.’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 그러자 곧 닭이 두 번째 울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울기 시작하였다.”(70-72절)


■ 중요 순례 장소

① 베드로 닭 울음 성당

베드로 닭 울음 성당 혹은 베드로 회개 기념 성당은 1925년에 프랑스의 성모 승천 수도회에 의해 세워졌다. 이 성당에는 헤로데 시대(기원전 37-기원후 70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매우 흥미로운 여러 유적들이 있는데, 바위를 깎아 만든 동굴, 물 저장소, 가축 우리 등이 발견되었다. 이들 중 바위 동굴은 당시 감옥으로 사용되었는데, 사람들은 이곳이 대사제 저택에 끌려온 예수님이 갇혀 있었던 곳이라고 여긴다. 고고학자들은 이 성당에서 6세기의 수도원 성당의 흔적들을 발견하였다. 675년경의 문헌은 이 옛 성당을 베드로가 배신 이후 눈물을 흘린 사건과 연결시킨다. 

② 대사제 카야파의 저택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 닭 울음 성당을 대사제 카야파의 저택으로 여겨왔다. 사실 고고학자들은 이 성당 근처에서 로마제국 시대의 돌계단을 발굴하였다. 이 계단은 실로암 못과 겟세마니로 통하는 길이었는데, 예수님은 이 길을 통해 시온 산 지역과 겟세마니를 오고 가셨을 것이다. 그런데 대사제 카야파의 저택이 시온 산 정상에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1971년 고고학자들이 이 지역에서 발견한 귀족들의 주거 지역과 그 유물들을 증거로 삼는다.


■ 최근의 유골함 발견

1990년에 예루살렘의 남쪽에서 기원후 1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회석 유골함이 발견되었다. 이 유골함에는 60세가량의 노인 유골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몇몇 학자들은 유골함의 명각(inscription)을 “카야파의 아들 요셉”으로 읽고 이 인물을 신약 성경과 요세푸스의 문헌이 언급하는 대사제 카야파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유골함의 명각을 “카야파의 아들 요셉”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한 강한 반론이 제기되었고, 이 인물을 대사제 카야파와 동일시하는 가설은 그것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부족한 상황에서 설득력이 많지 않다.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4년 6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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