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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역사서 해설과 묵상: 솔로몬 왕국의 분열(1열왕 12장)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05-12 조회수4,453 추천수1

역사서 해설과 묵상 (96)


솔로몬 왕국의 분열(1열왕 12장) ①

 

 

열왕기 상권 12장은 솔로몬 제국이 남북으로 분열되는 사건을 전한다. 기원전 933년 솔로몬이 죽자,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을 임금으로 세우고자 온 이스라엘이 스켐에 모였다. 그 자리에 솔로몬 치하에서 강제노동 감독관으로 일했던 예로보암이 나서서 솔로몬이 지웠던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달라고 청했지만 르하브암이 거절하자 북쪽 지파가 솔로몬 제국에서 떨어져나갔다. 이때 북쪽 지파 사람들이 외친 구호는 북쪽 열 지파의 불만이 어떠했는지 잘 보여준다. 

 

“우리가 다윗에게서 얻을 몫이 무엇이냐? 

이사이의 아들에게서 받을 상속재산이 없다. 

이스라엘아, 네 천막으로 돌아가거라. 

다윗아, 이제 네 집안이나 돌보아라”(1열왕 12,16). 

 

솔로몬은 주변민족들을 복속시켜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솔로몬은 유프라테스 강에서 필리스티아 땅까지, 그리고 이집트 국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라를 다스렸다. 그들은 솔로몬이 살아있는 동안 내내 조공을 바치며 그를 섬겼다.”(1열왕 5,1). 이스라엘 역사상 솔로몬 시대처럼 이스라엘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강력한 시기는 없었다.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은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를 누렸다. 

 

강력한 솔로몬 제국이 몰락한 데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방출신 아내들을 위한 신전건축은 전통적인 야훼신앙으로 이루어진 통일왕국의 일치를 깨는 것이었다. 둘째, 주변민족들의 위협이 상존했다. 치세 초기부터 에돔 사람 하닷이 솔로몬에게 반기를 들었다(1열왕 11,14-22 참조). 시리아의 르존 역시 다마스쿠스에 새로운 왕국을 세우고 솔로몬에게 반기를 들었다(1열왕 11,23-25 참조). 셋째, 무엇보다도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내부의 분열이었다. 솔로몬의 신하였던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이 솔로몬을 거슬러 일어났다(1열왕 11,26-40 참조). 이 세 가지 위협이 결국은 솔로몬 왕국을 붕괴시키고 남북으로 분단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열왕기 상권 12장을 보면 르하브암의 실책도 있었지만, 이스라엘에서 남북의 분열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싹트고 있었다. 사실 르하브암의 통치초기에 확정된 남북분단은 그 이전에 뿌려진 분열의 씨앗이 싹을 맺은 것일 뿐이다. 

 

남북분열의 전조는 기원전 12세기 판관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최초의 사건은 판관 드보라 시대에 타아낙 전투였다(판관 4-5장 참조). 이때 남쪽의 두 지파 곧 유다와 시메온 지파는 지리적 여건상 타아낙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다.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었지만 북쪽 지파 사람들은 남쪽 지파 사람들에게 불만이 많았음이 틀림없다. 이런 불만과 적대감이 결국 판관기 19-21장에 나오는 것처럼 기브아 사람들의 만행을 계기로 남북전쟁으로 확산되었다. 

 

남북분열의 위협뿐만 아니라 동서분열의 위협도 늘 존재했다. 요르단 서편에 정착한 다수의 지파들이 요르단 동편에 정착한 소수의 지파들을 무시하고 적대시했기 때문이다. 이런 동서의 대립과 갈등이 판관기 12장에 나오는 것처럼 입타 시대에 피의 복수로 표출되었다. 

 

묵상주제 

 

“내 아버지께서 그대들의 멍에를 무겁게 하셨는데, 나는 그대들의 멍에를 더 무겁게 하겠소. 내 아버지께서는 그대들을 가죽 채찍으로 징벌하셨지만, 나는 갈고리 채찍으로 할 것이오”(1열왕 12,14). [2014년 5월 11일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97)


솔로몬 왕국의 분열(1열왕 12장) ②

 

 

이처럼 판관시대의 이스라엘에는 남북의 대립에 동서의 대립과 갈등까지 상존했다. 남북으로 분열될 것인가? 아니면 동서로 분열될 것인가? 성경의 역사는 르하브암 시대의 남북분열을 말한다. 남북분열은 이미 왕정초기부터 조짐이 있어왔다. 곧 다윗의 통일왕국 내부에서 남북의 분열이 싹트고 있었다. 

 

그 첫 번째 사건이 ‘압살롬의 반란’이다. 압살롬은 특별히 북쪽 지파 사람들의 환심을 샀던 것 같다. 그것은 압살롬이 어전에 재판을 받으러 오는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여러 가지로 편의를 봐주었기 때문이다(2사무 15장 참조). 그러면 압살롬은 왜 특별히 북쪽 지파 사람들에게 접근했을까? 그것은 그들이 다윗 왕국에서 소외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우받던 남쪽 지파 사람들보다는 불만을 품고 있던 북쪽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환심을 사기가 쉬웠던 것이다. 또한 숫자적으로도 북쪽 지파 사람들이 남쪽 지파 사람들보다 더 많았다. 드디어 어느 정도 지지기반을 확보한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켰다(2사무 15,10 이하).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거의 대부분의 북쪽 지파 사람들은 다윗보다는 압살롬을 지지했다. 압살롬의 계산 대로였다. 궁지에 몰린 다윗은 결국 외인부대(크렛 외인부대, 펠렛 외인부대, 갓 사람 이타이의 부대)의 힘을 빌려 가까스로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다윗이 외인부대와 용병들을 동원하여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했다는 것은 그만큼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의 민심이 다윗을 떠났음을 뜻한다. 

 

더 큰 문제는 다윗이 환궁할 때 벌어졌다.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데, 북쪽 지파 사람들의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유다군 전부와 이스라엘군 절반이 임금을 모시고 따랐는데, 서로 임금의 환궁 길에서 공로를 차지하려 다투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 왕국의 몫을 열이나 가지고 있으니, 다윗 임금님에 대해서도 우리가 너희보다 더 가져야 한다. 그런데 왜 너희는 우리를 업신여기느냐? 임금님을 모시고 돌아가자고 먼저 말한 것은 우리가 아니냐”(2사무 19,44). 이처럼 환궁 길에서 소외된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만은 해소되지 않았다. 다윗은 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서 어떻게든 이 문제를 풀어주고 화해로 이끌어주어야 했다. 그러나 남쪽 지파 출신인 다윗은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이것이 다윗의 큰 실책 가운데 하나다. 

 

결국 북쪽 사람들의 불만이 행동으로 옮겨졌다. 그것이 비크리의 아들 ‘세바의 반란’이다(2사무 20장 참조). ‘우리가 다윗에게서 얻을 몫도 없고, 이사이의 아들에게서 물려받을 유산도 없다. 그러니 이스라엘아, 저마다 제집으로 돌아가라’(2사무 20,1)는 세바의 구호는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의 민심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었고, 세바의 계산은 그대로 적중했다. 북쪽 지파 사람들은 다윗을 떠나 세바를 따라갔다. 세바의 반란은 다윗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통일왕국에서 북쪽 이스라엘 열 지파를 떼어내려는 시도였다. 이 반란은 다윗 왕국의 취약한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고 곧 뒤따라 올 남북분열의 도화선이 되었다. 

 

묵상주제 

 

“불의를 뿌리 뽑을 능력이 없으면 판관이 되려고 애쓰지 마라. 그러지 않으면 네가 권력가의 편을 들고 네 정직함에 손상을 입게 되리라”(집회 7,6). [2014년 5월 18일 부활 제5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사서 해설과 묵상 (98)


솔로몬 왕국의 분열(1열왕 12장) ③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왕국은 남쪽 지파 곧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를 중심으로 이룩되었고 북쪽 지파 사람들은 이에 소극적으로 가담한 상태였다. 그래도 내적으로 허약한 이런 통일왕국을 떠받쳐주던 지주가 야훼신앙이었는데, 솔로몬 통치 말기에는 종교적인 절충주의가 성행하여 정통신앙도 약화되었다(1열왕 11장 참조). 게다가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막대한 군비와 강제노동 때문에 백성의 원성이 높아만 갔다. 더구나 다윗과 솔로몬은 유다 지파에게는 세금과 강제노동을 면제하는 특혜를 베풀었으니 북쪽 지파의 원성이 높아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솔로몬의 아들 대에 이르러 북쪽 지파들이 떨어져 나감으로써 나라가 두 동강나고 말았다. 기원전 933년 솔로몬이 죽고 그 아들 르하브암이 즉위하자마자 솔로몬의 통일왕국이 남북으로 분단되었다(1열왕 12장 스켐 회의 참조). 

 

이때 북쪽 지파 사람들을 규합한 인물은 ‘예로보암’이었다. 예로보암은 에프라임 지파 출신으로 솔로몬 밑에서 부역 감독으로 있었다(1열왕 11,26-28 참조). 예로보암이 솔로몬을 거슬러 외친 구호는 세바의 구호와 동일했다. ‘우리가 다윗에게서 얻을 몫이 무엇이냐? 이스라엘아, 네 천막으로 돌아가거라. 다윗아, 이제 네 집안이나 돌보아라’(1열왕 12,16)는 구호는 북쪽 지파 사람들이 다윗과 솔로몬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리하여 정치적인 분열이 확정되었다. 정치적인 분열에 이어 종교적인 분열(2열왕 12장 베텔과 단 성소 건설)도 함께 따라왔고, 결국 두 동강 난 나라는 통일되지 못하고 각각 주변 강대국에 의해 멸망했다. 이렇게 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된 데는 르하브암의 실책도 있었고 솔로몬 왕국 자체의 문제도 있었지만, 더 멀리 보면 약 200여 년 전 판관시대부터 분열의 싹이 트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된 배경과 원인은 일차적으로 외부적인 데 있다. 외부적인 요인은 한반도 점령을 용이하게 하려는 군사작전상의 이유로 강대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그어진 38선이다. 

 

강대국들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한민족의 독립을 최초로 언급한 것은 1943년 11월 27일 카이로 회담에서였다. 이때 미국, 영국, 중국의 대표들이 만나 한민족을 ‘적당한 절차를 밟아’ 독립시키기로 합의했다. 한민족에 관한 두 번째 회담은 얄타 회담(1945.2.4-11)이다. 여기에는 소련 대표까지 참석하여 한반도 신탁통치의 필요성을 간단히 논의했다. 세 번째 회담은 1945년 7월 26일 포츠담 회담이다. 여기서도 구체적인 논의는 없이 다만 카이로 선언의 내용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자 상황이 갑자기 달라졌다. 일본이 장기간 버틸 것으로 예상하던 미국은 일본이 갑작스럽게 항복한 데 당황하여 한반도에서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는 절차를 급히 마련했다. 이처럼 급하게 나온 일반명령 1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38선 이북의 일본군은 소련군에게 항복하고, 38선 이남의 일본군은 미군에게 항복한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분단을 가져온 38선은 다급한 상황에서 별다른 이유 없이 다만 군사작전상의 편의로 결정된 것이었다. 

 

묵상주제 

 

“환난의 날에 그들이 나를 덮쳤지만 주님께서 나에게 의지가 되어주셨네. 넓은 곳으로 이끌어내 나를 구하셨으니 내가 그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네”(2사무 22,19-20). [2014년 5월 25일 부활 제6주일(청소년 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99)


솔로몬 왕국의 분열(1열왕 12장) ④

 

 

근원적으로 따지고 본다면, 문제는 38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결정한 미국의 정치적인 계산에 있었다. 미국은 한국을 다만 적국 일본의 식민지로만 생각하고 전후 대책을 결정했지, 한국인의 운명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군사 작전의 편의상 그어진 38선은 사실은 한국을 통일된 국가로 독립시키기를 원치 않았던 미국의 정치적인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미국은 소련을 어쩔 수 없이 연합군에 끌어들였지만, 소련이 한국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전후 유럽과 일본에 더 많은 이해관계가 걸려있던 미국으로서는 한반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따라서 미국은 한반도를 분할통치하여 완충지대로 만들어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하려 했다. 이는 미국이 일본을 지배하는 수단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전후에 미국은 일본에 관심이 있었지, 우리나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소련의 세력을 막는 역할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한국인들의 운명이 아니라 미국의 국가 이익이었다. 이것이 당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가 갖고 있던 대한정책의 전부였다. 따라서 한반도의 분단은 이미 예정된 사실이었고, 38선은 다만 미국의 동북아시아 정책과 한반도 분할통치 정책이 구체화된 것일 뿐이다. 

 

해방의 기쁨은 순간이었고, 그때부터 우리나라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그때 시작된 불행은 21세기에도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 남북분단은 그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전개된 어두운 측면의 원죄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 박정희에서 시작되어 노태우까지 이어진 군사독재정권, 문민정부라고 자랑하던 김영삼 정권 말기에 터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이 모든 불행과 고통의 시초는 남북분단이다. 

 

남북통일은 우리가 꼭 이루어야 할 숙제다. ‘남북통일’을 이루지 않고는 우리 민족이 21세기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한반도에서 냉전체제의 종식과 평화정착을 추구한 김대중 정부의 일관된 대북정책은 한반도 문제에서 우리나라의 발언권을 강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반도 문제에서 우리나라의 발언권 강화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의 발언권 강화는 그 동안 주변 강대국에 의해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던 불행에서 벗어나, 우리나라가 21세기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질서 수립과정에서 나름대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한반도 문제가 또 다시 주변 강대국들의 손에 맡겨지고, 어느 한쪽의 일방적 선택에 우리의 운명이 결정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주님께 매달려야 한다. 우리 눈에는 도저히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남북의 화해와 일치, 통일을 주님께서 허락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또한 북한을 향한 적개심을 버리고, 남북한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북한사람들을 철천지원수요 적이라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결코 통일을 이룰 수 없다. 

 

남북통일을 위해 우리는 먼저 우리 민족을 내적으로 결합시켜주는 사상적 공통분모를 찾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남북통일 이전에 남북의 화해를 먼저 이루어야 한다. 국토의 통일 이전에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먼저 추구해야 한다. 

 

통일은 단순히 땅덩어리의 결합이 아니라 갈라진 민족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남북분단이라는 질곡에서 벗어나는데 한 몫을 하라고 주님께서 교회를 부르신다. 

 

묵상주제 

 

솔로몬 왕국의 몰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대로, 어느 나라나 사회나 단체든 내적으로 분열되면 결국 망한다. 외적인 위협은 오히려 내적인 결속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내부에서부터 분열은 결정적이다. 구성원이 서로 비방하고 이간질하며, 편을 가른다면 그 공동체는 결국 붕괴되고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솔로몬 왕국의 교훈에서 배워야 한다. 적어도 우리 교회 안에는 이런 불행한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14년 6월 8일 성령 강림 대축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100)


“예로보암은 궁리 끝에 금송아지 둘을 만들었다. 금송아지 하나는 베텔에 놓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었다.”(1열왕 12,28-29)

 

 

남쪽 유다 왕국은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가 연합한 나라였고, 다윗 임금의 후손이 계속 다스렸다. 북쪽 이스라엘 왕국은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를 뺀 나머지 열 지파가 연합한 나라인데, 임금의 가문이 수없이 많이 바뀌었다. 힘센 사람이 일어나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으면, 그전 임금의 가문에 속하는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왕위를 차지했다. 그러다 또 다른 힘센 사람이 나타나면 피의 숙청이 재차 이루어졌다. 그래서 7일짜리 임금(1열왕 16,15 지므리), 1개월짜리 임금(2열왕 15,13 살룸)부터 2년짜리 임금(2열왕 15,23 프카흐야)도 있고, 10년(2열왕 15,17 므나헴) 또는 41년 동안 다스린 임금(2열왕 14,23 예로보암 2세)도 있다. 

 

종교적으로 보아도 북왕국에서는 이방종교가 기승을 부렸다. 지리적으로 티로와 시돈이 가까웠고, 정치적으로도 아시리아 제국의 지배 아래 놓인 기간이 길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순수하게 섬기는 신앙이 남쪽 왕국보다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엘리야, 엘리사 같은 정열적인 예언자가 북왕국에서 활동했던 것이다. 

 

열왕기 저자는 북쪽 왕국의 죄의 근원을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에 둔다. 북왕국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축제를 지내러 가지 못하도록 예로보암이 베텔과 단에 만들어 놓은 금송아지에서 모든 죄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임금은 궁리 끝에 금송아지 둘을 만들었다. 그리고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일은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이스라엘이여, 여러분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여러분의 하느님께서 여기 계십니다.’ 그러고 나서 금송아지 하나는 베텔에 놓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었다. 그런데 이 일이 죄가 되었다”(1열왕 12,28-30). 

 

예로보암이 그 많은 장소 가운데서 하필이면 베텔과 단을 선택하한 이유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베텔은 남왕국에 가장 가까이 인접한 북왕국 최남단의 도시로서 판관시대부터 중요한 성소였다. 단 역시 판관시대부터 중요한 성소인데, 가장 북쪽에 있는 도시였다. 제일 남쪽과 제일 북쪽에 있는 중요한 성소를 선택해 거기서 예배하게 함으로써 예로보암은 자기 정권의 정통성을 부각시키고, 아울러 백성을 자신의 왕국 안에 가둔다면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특별히 예로보암은 비교적 뒤늦게 성소로 부각된 예루살렘(기원전 10세기 다윗 시대에 가서야 비로소 중요한 성소가 되었다)보다는 베텔과 단(기원전 12세기 판관시대에 이미 성소로 인정받았다)이 정통성 있는 성소라는 것을 강조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예로보암은 전통적인 두 성소에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산당들을 짓고 레위 지파가 아닌 일반 백성 가운데서 마음대로 사제를 임명했다(1열왕 12,31 참조). 

 

열왕기 저자는 모든 죄의 근원이 바로 여기 있다고 판단하고, 예로보암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을 우상숭배로 이끈 괴수라고 보았다. 예로보암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주 하느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열왕기 저자의 이런 단죄는 예배장소의 단일성을 요구한 신명기의 규정에 따른 것이다. 신명기 12장에서 보듯이 예배는 한 곳에서만 드려야 하는데, 베텔과 단을 성소로 지정한 것과 언덕에 산당들을 지은 것은 신명기의 규정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중대한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묵상주제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고 당신의 거처로 삼으려고 너희 모든 지파 가운데서 선택하시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신명 12,5). [2014년 6월 22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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