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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성경 여행: 가톨릭 서간 - 베드로의 편지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03-27 조회수4,169 추천수1

[성경 여행] 가톨릭 서간 : 베드로의 편지들 (1)

 

 

1. 저자 문제

일곱 권의 가톨릭 서간(=공동서간) 중에서 베드로의 이름으로 알려진 편지가 두 개 있습니다. 이 편지들은 다른 가톨릭 서간들과 마찬가지로 발신자의 이름을 따서 각각 베드로의 첫째, 둘째 편지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정식 이름은 “사도 베드로가 보낸 편지”이며, 본문에서도 저자는 자신을 “예수그리스도의 사도인 베드로”(1베드 1,1)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2베드 1,1)라고 소개하지만, 실제로 열두 사도들 중의 하나인 베드로 사도의 글로 보기보다는 후대에 다른 교회 지도자가 베드로 사도의 권위를 빌어 이 편지를 작성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2. 시대 배경

베드로 전 · 후서는 바오로 사도의 활동 시기보다 오히려 더 뒤늦은 시대에 쓰여진 편지입니다. 베드로의 둘째 편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구절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 이는 우리가 사랑하는 바오로 형제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지혜에 따라 여러분에게 써 보낸 바와 같습니다. 사실 그는 모든 편지에서 이러한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더러 알아듣기 어려운 것들이 있는데, 무식하고 믿음이 확고하지 못한 자들은 다른 성경 구절들을 곡해하듯이 그것들도 곡해하여 스스로 멸망을 불러옵니다”(2베드 3,15-16).

이 대목은 사도들의 시대 직후의 교회에 관한 유익한 정보들을 제공합니다.

첫째, 주님의 재림이 생각보다 더뎌짐에 대한 교회의 반응입니다. 신약성경 중에서 제일 먼저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는 바오로 사도의 편지들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재림”에 대한 기존의 해석에 문제가 있었다고 진단을 내리게 됩니다. 곧 오실 것 같았던 주님은 오시지 않고 그분의 재림의 때가 자신들의 예상과 맞아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오로 사도 자신이 “임박한 재림”보다는 “이미 시작된 구원의 때”인 ‘현재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더욱 집중하게 됩니다.

둘째, 이 서간이 집필되던 시기는 바오로 사도의 활동 시기보다 뒤 늦은 시대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서간의 저자는 바오로의 편지들(여러 편지들을 언급)이 “하느님의 지혜에 따라” 쓰여졌음을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들이 교회 내에 잘 알려졌을 뿐 아니라 그의 편지의 내용이 교회 내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셋째, 바오로 사도의 편지들은 다른 성경들과 마찬가지로 “해석”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후서는 그 “해석”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님을, 더 나아가, 이미 교회 안에서는 바오로의 가르침을 ‘엉뚱하게 해석한 나머지’ 멸망을 초래한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경고합니다. ‘무식하고 믿음이 확고하지 못한’ 까닭도 있지만 바오로의 편지가 거의 동시대인들에게도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 가운데에는 “더러 알아듣기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2베드 3,16).

이것은 비단 “베드로의 편지들”을 주고받았던 신자들이 살았던 시대와 교회의 단면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편지들과 복음서, 즉, 신약성경의 탄생 과정 중에 ‘목격 증인들의 생생한 기억’이 ‘문자로 고정되는’ 시대전반의 배경이기도 합니다 : 사도들의 체험들은 사람들 앞에서 ‘고백’되고 ‘증언’됩니다.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사도들의 이러한 ‘증언’들은 그 협력자들과 다른 제자들에게 전해집니다. 이후의 세대는 비록 직접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분의 활동에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특히, 십자가와 부활이 가져다준 강렬하고 심오한 체험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그 증인들의 증언으로 신앙을 전수받게 됩니다. 더불어 자신들의 삶 속에서 자신들이 받아들인 신앙을 확인하고 성숙시켜나갑니다. 신앙은 단순히 유용하고 흥미로운 정보의 습득이 아닙니다. 반복적이면서도 늘 새로운, 다채롭고 구체적인 일상 안에서 끊임없는 적용과 적응, 반성과 도전 등의 체험을 거치면서 하느님과 세상에 대한 나의 가치관을 변화, 성장시켜 줍니다. 사도들의 증언 역시 그 증언을 수용하고 자신의 삶의 원리로 고백하는 공동체의 신앙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2014년 3월 23일 사순 제3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정석 라파엘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성경 여행] 가톨릭 서간 : 하느님의 선택된 이들

 

 

베드로의 첫째 서간은 다음과 같은 인사말로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베드로가 폰토스와 갈라티아와 카파도키아와 아시아와 비티니아에 흩어져 나그네살이를 하는 선택된 이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미리 선택하신 여러분은 성령으로 거룩해져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되었고, 또 그분의 피가 뿌려져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풍성히 내리기를 빕니다.”(1베드 1,1-2)

다른 대부분의 서간문들처럼 베드로의 첫째 편지 역시 편지글이라는 형식을 충실히 따릅니다. 따라서 당시의 편지글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편지의 첫머리에서는 편지를 작성하는 사람과 편지를 받을 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실려 있습니다. 우체국을 통해 글을 주고 받는 현대에는 편지봉투에 발신자와 수신자의 이름과 주소를 적지만, 체신업무를 전담으로 하는 분들이 없었던 과거에는 모든 편지들이 제3자를 통해서 직접 전달되었기 때문에 편지글의 내용 안에 발신자와 수신자 정보가 명시되는 것이지요.

편지의 첫머리에 나오는 수신자와 발신자의 정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편지의 당사자들이 지닌 자의식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의 저자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소개합니다. 일반적으로 베드로 사도의 첫째 서간은 그 문체적, 신학적 특성 상 팔레스티나 출신의 게파, 즉 요나의 아들 시몬 베드로가 (요한 1,42 참조) 써보냈다기 보다는 그의 권위를 빌려 베드로 사도가 순교한 곳으로 알려진 로마교회의 (5,13의 “바빌론 교회”는 로마교회의 상징적인 이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묵시 14,8; 16,19; 17,5; 18,2.10.21 참조) 어느 지도자가 소아시아 지역에 써보낸 글로 여겨집니다.

수신자 정보에서 더욱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저자는 수신자들을 가리켜 “선택된 이들(뽑힌 이들)”, “나그네 살이하는 이들”, “디아스포라”라고 부릅니다.

 

 

선택된 이들

신약성경에서 총 22번에 걸쳐 사용된 이 단어는 복음서에서 9번(마태 22,14; 24,22.24.31; 마르 13,20.22.27; 루카 18,7; 23,35), 서간에서 12번(로마 8,33; 16,13; 콜로 3,12; 1티모 5,21; 2티모 2,10; 티토 1,1; 1베드 1,1; 2,4.6.9; 2요한 1,1.13) 그리고 묵시록 17,14에 한 번 쓰였습니다. 따라서 21개의 서간들 중에서는 베드로 전서에서만 4/12번 사용했으니, 저자가 이 용어를 얼마나 중요한 개념으로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인사에 해당하는 2절의 후반부를 (“은총이 여러분에게, 그리고 평화가 풍성하길!”) 제외하면, 2절의 전반부는 모두 앞선 구절의 “뽑힌 이들”이라는 말을 꾸며주는 세가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주제는 각각 이어지는 1,3-12 (하느님의 미리 정하심); 1,13-17 (거룩함); 1,18-25 (순종과 그리스도의 피 뿌림)에서 더욱 발전적으로 전개됩니다.

 

 

나그네 살이하는 자들

수신자들의 정체는 1,3-10에서 그 참된 의미, 즉,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주제로 전개됩니다. 다음으로 2,11-4,11에서는 이제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 살이 하는” 하느님의 백성의 삶의 방식이 어떻게 하느님의 선택에 부응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가 “바빌론 유배”(기원전 약 587년)라는 사건입니다. 하느님과의 계약에 성실하지 않았던 이스라엘이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나라를 잃고 남의 나라 땅에서 나그네 살이를 해야 했던 이스라엘의 운명,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유배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확립하게 됩니다.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α)는 “흩뿌리다”(디아스페이로 διασπειρω)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흔히, 성경의 역사에서 “약속의 땅” 밖에 존속했던 유다인 공동체들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주로 유배를 떠났다가 정착한 사람들, 혹은 여러가지 이유로 고향 땅을 등졌던 유다인들이 조상들의 땅 밖에서 살면서도 유대인들의 전통과 하느님의 법에 따라 살아가면서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강한 유대감과 본토와의 연대의식을 잃지 않았던 공동체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모든 개념과 특성들은 원래, 유다인들이 스스로를 인식했던 방식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계약의 백성”임을 자처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 모든 개념들을 자기 스스로에게 적용합니다. [2014년 5월 4일 부활 제3주일(생명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정석 라파엘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성경 여행] 가톨릭 서간 : 베드로의 첫째 서간 2

 

 

교회 : 선택된 백성

베드로 사도의 첫째 서간의 첫 장에서는 “흩어져 나그네살이 하는 선택된 이들”(1베드 1,1)인 수신자들의 정체에 대한 설명에 집중합니다. 그중에서도 하느님의 “선택”이라는 주제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원을 설명하는 주제어에 해당합니다. 이는 유다교와 대립각을 세우고 점차 독립된 공동체로 발전하는 1세기 교회의 자의식의 중심이며, 매우 논쟁적인 주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선택은 유다인들에게 주어진 일종의 특권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전체에 두루 영향을 끼치고 있는 신명기 신학의 핵심적 가르침 중의 하나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선택은 이집트에서의 해방과 약속의 땅을 선사하시는 그분의 역사를 통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특권적 지위는 “거룩한 백성”이라는 표현을 통해 부각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인 것입니다(탈출 19,5; 신명 7,6; 14,2; 26,18; 시편 135,4; 말라 3,17). 이러한 하느님의 선택은 이스라엘의 모든 것에 배타적 지위를 부여합니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을 뽑아 세우시고, 당신의 거처인 성소를 선택하시고, 당신을 대신해 백성을 다스릴 사람을 뽑아 기름을 부어 성별하십니다. 그분은 당신께서 뽑아 세운 사람들을 통해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거룩한 직무에 종사할 사람들을 성별하여 백성과 하느님의 통교, 즉 예배에 종사하게 합니다.

거룩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거룩함으로 초대하십니다. 이 초대에 응답한 백성의 결단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통해 공식화됩니다. 이제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계약은 늘 이 백성이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선택과 계약에 대한 오해 : 자만과 일탈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부르짖었던 말은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로 돌아오라,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했던 그 때, 계약을 맺고 공생의 미래를 약속하던 그 시절을 기억하고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돌아와야 한다는 요구는 그들이 ‘떠나 버렸음’을 전제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진노로 ‘축복의 땅을 등지고’ 이방 민족들에게 끌려가기 전에 이미 ‘축복의 땅 안에 머물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떠나갔습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의 백성이되, 하느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은 탓입니다. 예언자에게 선택은 ‘특권’보다는 ‘책임’을 의미합니다. 명백히, 선택이 먼저이고 요구는 그에 뒤따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더 높은 수준의 책임을 내포한다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교황청 성서위원회,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 34항 참조).

앞의 문헌은 제37항에서 성경의 선택과 계약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해설합니다.

마찬가지로, 계약의 신학은 온전히 주님 백성의 신학이다. 주님께 입양되고 그분의 자녀가 된 이스라엘은 오직 그분께만 충실하고 전적으로 그분께 투신하여 살아야 했다. 그러므로 계약의 개념은, 그 정의 자체로, 이스라엘의 선택이 그들의 삶과 행복을 자동적으로 보장해 줄 것이라는 거짓된 확신과 대립된다. 선택은 그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서 자신의 삶 안에서 실현해야 하는 소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계약을 맺었다는 것은 하느님 편에서도 이스라엘 편에서도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였다.

하느님의 선택, 곧 그분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이스라엘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은 것처럼, 교회 역시 하느님의 백성으로 부르심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1베드 2,1-3은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의와 모든 거짓과 위선과 시기, 그리고 모든 중상을 버리십시오.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

하느님의 선택은 백성의 응답을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의 선택에 상응하는 삶의 방식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백성이라는 타이틀은 구원이라는 대망에서 자신의 우위를 자랑하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그 부르심에 대한 응답을 통해 스스로를 성장시켜가야 할 책임입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이러한 성장을 가능케 하고 재촉하는 것, 그것을 서간의 저자는 “희망”이라 부릅니다 (1베드 1,3.13.21). 그리고 이제 한 발 더 나아가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라고 촉구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구원’의 선물을 자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의 완성을 갈망하며, 그 선물을 선사하신 분께 걸맞는 존재가 되도록 자신의 삶을 가꾸는 일입니다. [2014년 6월 15일 삼위일체 대축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정석 라파엘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성경 여행] 가톨릭 서간 : 베드로의 첫째 서간 3

 

 

교회 : 하느님 백성으로 선택된 이들

이 편집의 전반부는 ?선택’이라는 주제를 심화하여, 그리스도인의 내적 정체성을 설명합니다. 즉, 그리스도 신자들의 모임, 즉 교회를 가리켜 “선택된 이들의 모임”으로 규정합니다. 하느님의 선택이라는 주제는 2,9-10의 선언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2,11-3,1까지는 이 새로운 백성을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존재 방식을(modus vivendi) 논합니다 : 그들의 삶의 터전은 ?그들만의 세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의 ?일부’로 존재합니다. 같은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이방인이며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정처없는 떠돌이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들로 살아가야합니다. ?희망을 가진 자’로서 그 희망을 ?증언’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증언은 무엇보다도 ?바른 처신과 착한 행실’로(2,12) 드러나야 합니다.

2,13-17의 권고는 로마 13,1-7의 내용과 부합합니다. 정치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내용은 자주 신앙과 정치의 이원화를 주장하는 분들이 교회의 정치 참여를 비판하며 내세우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이 단락에서 강조하는 것은 ?부당한 비난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철학적 시민론의 국가, 가정, 결혼과 관련된 의무에 대한 지침들에 부합’합니다(J. 그닐카, 『신약성경신학』, 582-583). 한 사회의 보편적 질서와 공공질서, 보다 간략히 말하자면 ?상식’에 준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 민주주의 국가라는 사회적 맥락에서 읽자면 사회문제에 나서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권익, 공동선을 위해 ?자유인’으로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민주주의 체제는 ?백성이 주인’임을 보장하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공권력의 부당한 집행은 법으로 제한된 권력으로 오히려 그 주인인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이의 무지한 입을 막는 선한 행동”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입니다(2,15 참조). 게으름으로 인한 어리석음보다 더한 악은 위선과 부패, 진실의 왜곡입니다. 만일 글자 그대로 ?체제에 순응’하라는 뜻으로 악용하고자 하는 사람은 2,18-25의 ?노예제도’도 성경의 가르침이니 옳은 제도라 인정하는 패착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닌 희망

“여러분이 열심히 선을 행하는 데 누가 여러분을 해치겠습니까? 그러나 의로움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 하여도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두렵게 하여도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다만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 하느님의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보다 낫습니다.”(1베드 3,13-17)

지난 4월 27일 요한 23세 교황과 더불어 시성되신 요한 바오로 2세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라는 구호를 사람들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 주었습니다. 이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건네신 첫 인사이기도 했습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말씀을 그분의 첫 마디로 기억합니다. 다른 모든 두려움을 없애는 두려움, 그 매혹의 신비로 이끌림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놀라움이 놀람으로 끝나지 않고 질문으로, 그리고 응답으로 이어질 때, 이미 거기에 희망이 싹틉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마음 깊이 영접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가 부활로 이어지고, 되살아남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희망에 대해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하는 사람”은 그러므로, 자신이 체험한 신비가 더욱 내 안에서 뛰놀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입니다. 지식을 많이 축적하여 수많은 데이터들을 축적했다 해도, 그러한 사변적 지식 만으로는, 한 사람을 변화시켜 다시 살게 해주는 신비가 선물하는 희망을 ?논증’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준비하라고 권고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 불평하지 말고 서로 잘 대접하십시오. 저마다 받은 은사에 따라, 하느님의 다양한 은총의 훌륭한 관리자로서 서로를 위하여 봉사하십시오. 말하는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봉사하는 이는 하느님께서 주신 힘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느님께서 무슨 일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영광과 권능을 누리십니다. 아멘(1베드 4,8-11) [2014년 9월 7일 연중 제23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정석 라파엘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성경 여행] 가톨릭 서간 : 베드로 사도의 둘째 서간 (1)

 

 

1. 저자와 집필의도

첫째 편지와 마찬가지로 이 편지도 저자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베드로와 동시대 인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사도 베드로는 64년 경 네로 황제의 박해 때 로마의 바티칸 언덕에서 순교했으나, 이 서간은 100년 전후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천막에 머물러 있는 동안”(2베드 1,13)은 저자의 현세의 삶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천막을 벗어날 때가 다가 왔다”(1,14)는 인식은 저자가 고령이거나 혹은 박해의 위험 앞에서 자신의 죽음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저자는 “세상을 떠나기 전”(1,15) 자신이 전해받은 복음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확실히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더 이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을 보아, 저자의 심중에 자리잡고 있는 촉박함이 묻어납니다. 저자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암시하는 이야기를 전해주며, 그 증인인 자신의 증언이 참됨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 도대체 무엇을 그토록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은 이어지는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2. 새로운 시대 상황

2베드 3,1에서 이 편지가 자신의 두번째 편지라고 말하고 있지만, 첫 번째 편지가 신약성경 정경의 베드로 전서인지에 대해서도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베드로 후서는 베드로 전서와는 조금 다른 시대적 맥락과 글쓰기의 특징을 간직합니다. 즉, 베드로 전서 전체를 통괄하는 당대의 시급한 문제는 “박해”였습니다. 그러므로 현세적인 어려움과 고난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면서 그러한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여기고 기뻐하라’(1베드 1,6; 3,13-17; 4,1.12-19 참조)고 독려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편지에서는 교회를 위협하는 것은 박해보다도 - 아직 박해가 끝난 상황은 아니었지만 - 신자들의 삶 속에서 맞이하게 되는 새로운 적대감과 도전이 시급한 문제로 떠오릅니다. 즉, 그것은 거짓 교사들이 촉발시킨 격렬한 신학 논쟁입니다. 그들은 지연되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조롱하는 조롱꾼들의 주장(2베드 3,4)에 직면해 있고, 자신들을 속량해주신 주님을 부인하고 파멸로 재촉하는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습니다(2베드 2,1-3 참조).

“앎, 지식”(1,2); “신심”(1,3.6.7; 3,11); “덕”(1,3.5); “신적 본성”(1,4) 등 헬레니즘의 철학과 종교에서 자주 사용되던 개념을 잘 활용하는 점이나 신약 성경 중에서도 많은 하팍스 레고메나(Hapax legomena : “한 번 말해진 것들” - 성서에서 단 한 번만 사용된 개념이나 단어를 지칭하는 용어)를 포함한 책이라는 점이나, 구약을 인용할 때도 훨씬 간접적으로 인용하는 점 등을 미뤄보면 베드로 전서와는 좀 다른 배경을 가진 글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3. 유다서와의 유사성

비록 형태는 유다-그리스도교 문학에서 빈번하던 ‘위경’의 형식으로 ‘베드로 사도의 권위’에 의지한 글이지만(이런 예는, 구약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오경과 모세, 시편집과 다윗, 지혜작품들과 솔로몬의 연관성이나 신약에서도 바오로 사도의 이름으로 씌여진 후기 작품들을 들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유다서와의 유사성에 더욱 주목합니다. 실제로 2베드 2,1-2과 유다 4; 2베드 2,4과 유다 6; 2베드 2,10과 유다 7; 2베드 2,11-12와 유다 8.10을 비교해보면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것은 어쩌면 베드로 후서가 유다서를 참조했을 가능성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2014년 10월 19일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정석 라파엘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성경 여행] 가톨릭 서간 : 베드로 사도의 둘째 서간 (2)

 

 

재림의 지연

베드로 후서의 주요 쟁점, 즉 저자가 비판하며 경계할 것을 요구하는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주장을 3,4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재림에 관한 약속은 어떻게 되었소? 사실 조상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창조 이래 모든 것이 그대로 있지 않소?”(2베드 3,4)

구약시대의 거짓 예언자들에 비견할 수 있는 그들은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고 지연되고 있는 사실을 문제 삼습니다. 그들은 신자들의 희망에 찬물을 끼얹으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습니다. 이에, 저자는 구약의 거짓 예언자들의 전철을 밟고 있음을 밝히고자 합니다. 그들은 특히 “자기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을 모독하고”(2베드 2,12)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이러한 조롱이 신자들의 공동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로 말미암아 “진리의 길이 모욕을 받고”(2베드 2,2), “이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그것에 다시 말려들게 되는”(2베드 2,20) 일들이 벌어집니다.

사실 이러한 조롱과 유혹은 주님의 재림이 이루어지기까지,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이 그 완성을 보게 될 때까지 지속될 일들입니다. 현대에도 똑같은 도전들은 계속됩니다 : 하느님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인가?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 세상이 왜 이 모양, 이꼴이냐? 하느님 믿으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그냥 착하게 살면되지 뭐!

이 편지의 저자가 거짓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반박하는 논거는 시편 90편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

편지의 나머지 부분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제시합니다. 즉 그들은 “하느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사람들(2베드 3,12-14)입니다.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처럼(2베드 3,9.15) 희망을 잃지 않고 기다려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는 일”(2베드 3,14ㄴ)이 기다림의 자세입니다.

편지를 맺으면서 남기는 두 가지 당부는 ‘무법한 자들의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 것’과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 나가는 것’입니다(2베드 3,18). 이 둘은 서로가 서로를 북돋습니다. 즉 거짓교사들의 오류에 빠지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대한 앎을 키워 나가는 것이며, 신앙의 진리에 대한 앎은 거짓교사들의 거짓된 유혹으로부터 신자들을 지켜줍니다. 따라서 저자는 거룩한 예언자들이 이미 예언한 말씀과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분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내리신 계명을 기억할 것을 당부합니다(2베드 3,2). 만일 자신의 신앙에 대한 앎과 확신을 잃고 의로움의 길을 벗어나 오류와 이단에 빠져든다면, 그것은 자신을 ‘자기가 게운 데로 되돌아가는 개’나 ‘몸을 씻고 다시 진창에 뒹구는 돼지’처럼 내버려두는 것입니다(2베드 2,22 참조).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바오로 사도의 당부를 떠올리게 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2티모 3,15ㄴ-17) [2014년 12월 7일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정석 라파엘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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