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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예수님과 다시 새롭게7: 새로운 사회정의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1-07-31 조회수3,047 추천수1

예수님과 다시 새롭게 (7) 새로운 사회정의

 

 

구약성경의 대표적인 제도는 왕, 사제, 예언자이다. 이 중에서 예수님의 생애와 사상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예언자이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예언자들과 많이 닮았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예언자 전승의 흐름 안에 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분 말씀을 전한 하느님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전한 하느님의 메시지는 추상적이지 않고 역사적 상황 안에서 구체적이었다. 그들의 메시지는 종교적일 뿐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이었다. 예언자들은 불의한 사회 질서와 정치권력에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사회정의를 위한 하느님의 열정(passion)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그분의 “함께 아파하기(compassion)”를 선포하고 실천하였다.

 

예수님은 사회적 예언자(social prophet)이셨다. 그분은 구약성경의 사회적 예언자들을 닮았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회적 세계(social world)인 로마 제국과 유다이즘 안에서 사회정의를 위한 하느님의 열정과 가난한 사람들과 변두리 사람들을 위한 “함께 아파하기”를 가르치고 실천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천은 종교적일 뿐 아니라 사회-정치적인 차원을 가진다. 오히려 그분 안에서는 종교적인 것과 사회-정치적인 것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통합되어 있었다.

 

예수님이 사셨던 기원후 1세기의 사회적 세계는 전-근대적인 농경 사회적 지배 체제였다. 이 체제는 억압 정치와 착취 경제의 특성을 가진다.

 

첫째, 억압 정치를 특성으로 가지는 고대 사회는 위계적이고 가부장적인 체제로 소수의 전제 군주와 귀족 계급이 사회를 통치하였다. 이들은 도시의 지배 엘리트들이었는데, 다수인 평민들은 사회적 구조를 만드는 일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 제국의 지도자들과 헤로데 가문의 통치자들, 대사제와 수석 사제들, 최고 의회 의원 등과 같은 유다 지도자들이 사회의 상층을 이루며, 권력과 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상층부 아래에는 왕궁과 성전의 관리, 군인, 집사, 관료, 서기관, 도시 상인 등이 있었다.

 

둘째, 고대 사회의 경제적 특성은 착취적이었다. 사회적 부의 원천은 시골 농부들의 생산물이었다. 그런데 농민들에 의한 이 생산물의 대부분은 직접 생산에 참여하지도 않는 도시의 소수 지배 엘리트들과 부자들의 차지가 되었다. 이것은 농민에 대한 세금 징수와 농지에 대한 직접적인 소유, 소작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처럼 사회적 다수로서 부의 생산자인 시골 사람들은 대부분 농부였다. 그들 중에는 작은 농지를 가진 농부, 소작인, 일용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육체노동자들 중에는 어부, 건설 노동자, 기술자, 광부, 하급 노예 등이 있었다. 사회 최하층으로는 집 없는 떠돌이, 거지, 눈먼 이, 귀먹은 이, 병자, 부정(不淨)한 이들이 있었다.

 

이와 같이 예수님 당시의 체제는 철저한 신분 사회이며 가부장적인 사회였다. 이 사회 체제에서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부는 소수의 지배 엘리트들과 부자의 차지였다. 인구의 90퍼센트 가량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피지배자들이고 가난한 이들이었다. 우리는 이들을 시골 사람 계급(peasant class)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대부분 농부들이고 농촌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이 사회적 예언자가 된 것에는 당시 사회 체제 안에서의 다양한 사회적 불의를 직접 체험하고 관찰한 것이 중요한 경험적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시골 사람이었다. 그분의 직업은 목수였다.(마르 6,3) 목수로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로 테크톤인데, 이 말은 나무를 다루는 목수뿐 아니라 돌을 다루기도 하는 기술자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낮은 신분의 기술자이셨다. 이 직업은 농부보다 경제적으로 더 나은 위치가 아니었다. 많은 경우 농지를 잃은 농부가 기술자가 되기도 했다. 당시 로마 제국 치하의 팔레스타인 농민들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농업의 상업화와 헤로데 왕의 대규모 토목 사업으로 인해 토지를 잃고 소작인으로 전락한 농민들이 증가하였다. 그래서 시골에는 급격한 사회적 변화가 진행되었고 각종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불의가 자행되었다. 예수님은 이러한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사회 체제 안에서 고통 받는 가난한 사람들과 변두리 사람들을 위한 “함께 아파하기”와 사회정의를 가르치고 실천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사회-정치적 질서와 종교적 불의에 대해 비판적이셨다. 이와 같이 사회적 예언자로서의 예수님의 생애와 사상은 사회-정치적 차원을 가진다.

 

사회정의에 대한 예수님의 비전(vision)이 잘 드러나는 가르침은 마태 20,1-16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이다. 이 비유의 주제는 하늘나라의 정의(正義)이다. 포도밭 주인이 일꾼을 고용한다. 그는 이른 아침에 나가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한다. 그 후 아홉 시쯤,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 오후 다섯 시쯤에도 장터에 나가 하는 일 없이 서 있는 이들을 고용하며 정당한 삯을 주기로 약속한다.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한 데나리온을 주도록 한다. 맨 먼저 온 이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했지만 역시 한 데나리온을 받는다. 그래서 그들은 불평을 터뜨린다. 그러자 주인은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라고 말한다.

 

그렇다. 주인은 정의를 행하였다. 왜냐하면 주인은 맨 먼저 고용된 이들과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맨 먼저 온 이들과 주인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깨어진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고 질투하면서부터이다. 그들은 더 많이 일했으므로 더 많이 받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인이 생각한 정의는 달랐다. 주인은 장터에 나가 하는 일 없이 서 있는 일용 노동자를 고용한다. 주인이 약속한 정당한 삯인 한 데나리온은 날품팔이꾼과 그의 가족이 하루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돈이다. 주인은 장터에서 고용되지 못한 이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생존의 기회를 주는 자비로운 사람이다. 일몰이 다가오는 오후 다섯 시에도 고용되지 못해 노동자와 그 가족의 생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주인은 그를 고용하고 한 데나리온을 준다. 이와 같이 주인의 정의는 마지막 사람에게도 고용의 기회를 주고 생계를 보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정의는 변두리로 내몰린 사람들에 대한 배려이고 그것은 자비, 즉 “함께 아파하기”를 통해 실천된다. 이와 같이 정의(正義)는 다시 정의(定義)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천은 사회적 비전(social vision)을 제시한다. 그래서 예수님 닮기인 그리스도교 신앙은 사회-정치적 차원을 가진다. 신앙은 그저 예수님을 잘 믿어 나 혼자 천당에 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신앙을 개인의 일로 만드는 사사화(私事化, privatization)를 경계해야 한다. 이런 개인주의적 태도는 신앙이 가지는 사회-정치적 차원을 망각한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님의 사회적 비전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다시 새롭게”, “예수님과 다시 새롭게”, 그것은 새로운 사회정의를 위한 각성과 실천에로의 초대이다. 예수님을 뒤따르는 삶은 대안적 질서와 가치인 하느님 나라를 위한 투신이고, 그것은 사회정의를 위한 행동과 연대를 통해 구체화된다.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우리 안에서 사회정의를 위한 꿈과 열정을 다시 일깨운다.

 

[월간빛, 2011년 7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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