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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역사서 해설과 묵상: 사무엘기 하권 1-8장(사울의 사후 왕위에 오르는 다윗)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11-25 조회수4,293 추천수1

역사서 해설과 묵상 (73)


다윗 임금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에 사는 여부스족을 치려하자, 여부스 주민들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너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도 너쯤은 물리칠 수 있다”(2사무 6,6).

 

 

사무엘기 상하권 제4부(2사무 1-8장)는 사울의 사후에 다윗이 왕위에 오르는 이야기다. 사무엘기 하권 2장 1-4절과 5장 1-3절에 따르면 필리스티아 사람들에게 몸 붙여 살던 다윗은 헤브론에 정착하고 거기서 임금으로 즉위했다. 다윗이 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옹립(擁立)된 것은 백성이 다윗을 카리스마적 인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다윗은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 임금이 되었음이 확실하다. 다윗은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봉신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승인을 얻지 않고는 그렇게 행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분할하여 지배하는 정책을 썼으므로 자기네들의 봉신인 다윗이 유다의 임금이 되기를 바랐고, 또 유다 백성도 다윗을 환영했다. 그러므로 다윗이 헤브론에서 임금으로 즉위한 것은 필리스티아 사람들과 유다 사람들의 동의에 따라 이루어진 사건이다. 

 

헤브론에서 왕위에 오른 다윗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고 싶었다. 그러나 그 당시 거기에는 여부스족이 견고한 성을 쌓고 오랫동안 살고 있었다. 사무엘기 하권 5장 6-8절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당시의 상황을 전한다. 다윗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가자, 여부스 주민들이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도 다윗쯤은 물리칠 수 있다고 조롱했다. 다윗은 그 말에 여부스족을 사무치게 미워했고,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다리 저는 이와 눈먼 이를 궁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어느 대학교수가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토론과제를 주었는데, 내용은 이렇다. ‘핵전쟁으로 인류가 전멸할 위기에 놓였다. 그런데 핵을 피할 수 있는 동굴이 하나 있다. 여섯 명만 들어갈 수 있는데 후보자는 열 명이다. 천주교 수녀, 공산주의자 의사, 눈먼 소년, 학교 교사, 여가수, 정치인, 핵물리학자, 청각장애 농부, 자동차 정비공 그리고 아무 기술과 능력도 없는 대학생인 나. 이들 가운데 여섯 명을 고르고 네 명을 제외하되 그 이유를 제시하라.’ 

 

학생들이 가장 먼저 제외하기로 일치를 본 사람은 정치인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은 비록 아무런 기술과 능력이 없는 백수지만 종족보존을 위해 자기 자신을 선택했다. 농부도 일찌감치 포함됐다. 식량생산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일곱을 놓고는 학생들 사이에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가장 격렬한 논쟁은 눈먼 소년을 놓고 벌어졌다. 실리주의적인 쪽과 인도주의적인 쪽이 팽팽히 맞섰기 때문이다. 이해타산을 따지는 학생들은 여섯 명만 살아남는 작은 공동체에서 장애인은 아무 공헌도 할 수 없고 도리어 짐만 된다고 주장했다. 인도주의자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아직 어린 데다 장애까지 있는 소년이므로 무조건 살려놓고 봐야 한다는 호소였다. 

 

결국 대세는 현실주의 쪽으로 기우는 듯했는데, 평소 말을 더듬어 거의 발표하지 않던 학생 하나가 손을 들었다. 그는 ‘눈먼 소년이 새 나라를 건설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을 떠듬떠듬 펼쳤다. 앞으로 부강한 나라를 만들려면 모두 정신없이 경쟁하고 권력을 차지하려 다툴 것이 뻔한데, 이 소년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시간과 물질을 쪼개 서로 나누며 남을 돕고 희생하면 인간애가 높아질 것이라는 논리였다. 이 학생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남을 돕고 함께 나눌 줄 모르는 나라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지도 모릅니다.” 

 

묵상주제 

 

도울 수 있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있음은 축복이다. 부유하고 똑똑하고 잘생기고 건강한 엘리트만 모여 사는 세상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자신과 가족만 생각하는 생지옥이 되기 십상이다. 가난하고 둔하고 못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이 곁에 있음은 하느님의 축복이다. 그런 이들은 나뿐인 ‘나쁜 놈’이 되지 않고, 더 인간답고 아름다운 세상을 살라고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배려’다. [2013년 11월 24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주간)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74)


“다윗은 기뻐하며 오벳 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하느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2사무 6,12).

 

 

사울에 이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다윗에게는 긴급한 현안이 있었다. 그것은 정치와 종교의 구심점이 될 도시를 만드는 것이었다. 다윗은 남쪽에 정착한 유다 지파 출신이었으며, 사울 역시 남쪽의 벤야민 지파 출신이었다. 다윗은 북쪽지방 열 지파의 지지가 없다면 왕위를 지켜나가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렇다고 수도를 북쪽으로 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곳이 예루살렘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강력한 여부스족이 견고한 성을 쌓고 버티고 있었다. 기원전 1000년경 다윗은 어렵게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수도로 삼았다. 굳이 예루살렘을 선택한 것은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예루살렘은 그 당시 남쪽 지파 또는 북쪽 지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방민족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지리적으로 중간에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립적이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예루살렘이 정치적인 수도가 되기는 했지만 ‘종교적인 수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윗은 싸움터에서 잔뼈가 굵은 무사이긴 하지만, 고도의 정치적인 계산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하느님의 궤’였다. 그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만 하면, 예루살렘은 명실상부한 수도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정일치의 고대사회에서 이것은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하느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예루살렘을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로 삼고 과거의 종교적 유산을 정통성있게 이어받으려 했다. 

 

그 당시 궤는 갓 사람 오벳 에돔의 집에 있었다.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주님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온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주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왔다. 에폿은 사제들이 입던 복장이다. 다윗은 사제의 직무를 어느 정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주님께 번제와 친교제를 드렸으며,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복을 빌어주었다(2사무 6,14-18). 

 

고대사회는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사회였다. 제정일치의 사회란 ‘신이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다. 신의 통치 아래 인간은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고대사회가 유지되었다. 정치를 쥐고 있던 군주들은 이 믿음을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함으로써 종교가 타락하기 시작했다. 군주들은 자신들의 권력행사는 신에게서 위임받았다고 주장하며. 만인 위에 우뚝 서게 되었다. 그리고 야심가들은 어떻게 해서든 신의 후광을 입으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오늘날 신에 의한 통치를 인간에 의한 통치로 바꾸어 놓은 것은 ‘경제(經濟)’다. 경제는 신도 간섭할 수 없는 영역에 뿌리를 박고 성장을 거듭한 결과, 이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신의 자리에 올라섰다. 그 신의 이름은 ‘물신(物神)’이다. 오늘날 우리는 물신이 지배하는 세상에 산다. 더 좋은 옷, 더 크고 쾌적한 집, 더 편리하고 고급스런 차를 사려고 죽어라 돈을 번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물신을 추구하며 산다. 한 마디로 경제는 알파요 오메가다. 

 

그런데 이렇게 물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종교가 여전히 위세를 떨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종교가 물신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물신과 공생하고, 물신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교회와 사찰이 날로 거대화, 상업화, 권력화로 가는 것이 그 증거다. 사실이 그렇다면, 물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종교는 약간 더 세련된 물신에 지나지 않는다. 

 

묵상주제 

 

이 시대는 한마디로 ‘제경일치(祭經一致)’의 사회다. 경제는 종교가 되어버렸으며, 종교는 고고한 척하지만 경제에 빌붙어 공생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이제는 우리 교회가 물신에, ‘경제종교(經濟宗敎)’에 스스로 이단자임을 선포하고 구체적인 행동에 돌입할 때가 된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경제종교라는 거대한 물신(物神)에게 먹힐지도 모른다. [2013년 12월 1일 대림 제1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75)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2사무 7,12).

 

 

사무엘기 하권 7장 1-17절은 다윗 왕가에게 전하는 나탄의 예언이다. ‘다윗의 아들이 국권을 튼튼히 할 것이며, 다윗 왕조는 하느님 앞에서 길이 뻗어나갈 것’이라는 하느님의 약속이다. 나탄의 예언에서부터 메시아적 희망이 싹텄다. 그 희망은 다윗 가문에게 하신 하느님의 약속에 근거한다. 신약성경은 나탄의 예언을 세 번이나 언급한다(사도 2,30; 2코린 6,18; 히브 1,5). 

 

사무엘기 하권 7장 1-7절은 왕정제도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전승을 담고 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던 때부터 다윗 시대까지 하느님의 궤는 성전이 아니라 천막에 머물면서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 그렇지만 어느 영웅도 송백(松柏)으로 하느님의 성전을 지을 생각을 안 했는데, 다윗이 굳이 성전을 지을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반면에 사무엘기 하권 7장 8-17절은 다윗 왕조를 지지하는 후기의 문학원전에서 나왔다. 아마도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 성전에 충성하는 사제가문의 견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여기에는 다윗을 선택하신 하느님의 호의, 솔로몬의 왕위계승과 번영, 다윗 가문을 향한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이 강조되었다. 

 

사무엘기 하권 7장 1-17절은 두 개의 ‘반명제(反命題)’로 이루어졌다. 첫째 반명제는 다윗이 주님을 위해 집(성전)을 지으려 했지만 짓지 못할 것이고(5-7절), 오히려 주님께서 다윗에게 ‘집(가문)’을 세워주실 것이다(11-12절). 또 하나의 반명제는 성전을 짓게 될 사람은 다윗이 아니라 그의 아들 ‘솔로몬’이다(13절). 첫째 반명제는 다윗에게 거저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총애를 강조하려고 성전건립에서 ‘왕조의 수립’으로 주의를 돌린다. 둘째 반명제는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다. 다윗이 모든 면에서 성공했지만 주님의 성전을 지으려는 자신의 뜻을 실현하지 못했고, 솔로몬이 그 거대한 사업을 완성할 것이다(1열왕 6장 참조). 

 

솔로몬은 기원전 961년 예루살렘 성전을 완공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종교는 ‘성전(聖殿)’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유목민일 때는 성전이 없었고, 또 성전을 지을 필요도 없었다. 목초지를 따라 계속 이동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한 곳에 고정된 성전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서 성막만 있었다. 성막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텐트다. 접어서 메고 가다가 적당한 곳에 다시 펼쳐 세워놓고 하느님을 예배하다가, 또 다시 접어서 메고 가곤 했다.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나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어떤 집에서도 산 적이 없다. 천막과 성막 안에만 있으면서 옮겨 다녔다. 내가 이스라엘의 어느 지파에게 어찌하여 향백나무 집을 지어주지 않느냐고 한마디라도 말한 적이 있느냐”(2사무 7,5-7)라는 구절은 이러한 상황을 잘 반영한다. 

 

그러나 가나안에 정착하여 농경민이 되고 나서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한 곳에 정착해 살다보니 한 곳에 고정된 성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 아들 솔로몬이 7년에 걸쳐 성전을 지어 봉헌했다. 

 

묵상주제 

 

“주님께서는 짙은 구름 속에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당신을 위하여 웅장한 집을 지었습니다. 당신께서 영원히 머무르실 곳입니다”(1열왕 8,12-13). [2013년 12월 8일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76)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2사무 7,13).

 

 

예루살렘 성전에는 ‘역기능’도 있었다. 그것은 형식적인 희생제사와 분단 이데올로기다. 이스라엘의 정통 예언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형식적인 희생제의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전통적인 이스라엘 신앙으로 되돌아 갈 것을 강조했다. 아모스와 호세아가 그랬고, 예레미야와 에제키엘이 그랬고, 예수님도 그랬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져 내릴 것을 예언하셨다가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요한 2,13-22 참조). 

 

예수님의 고통스런 삶을 미리 보여준 예레미야 예언자는 성전파괴를 예언했다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 예레미야의 성전설교(예레 7장과 26장)는 남북왕국이 각각 성전을 중심으로 형성시키고 심화시킨 분단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본래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어느 장소나 성전에 묶여있는 ‘정주신(定主神)’이 아니다. 주변의 정착민족들이 섬기는 잡신들은 정주신이었지만,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섬기던 하느님은 정주신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광야시대부터 판관시대, 그리고 다윗 시대까지도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성전이 아니라 장막 안에 머물면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속 옮겨 다녔다. 

 

기원전 961년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하느님께서 거기 거처하신다는 신학을 만들어내면서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 이데올로기에 빠져들었다. 더구나 예로보암이 베텔과 단에 성전을 세움으로써 성전의 정통성 문제까지도 제기되었다. 남왕국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유일한 성전’이라 생각하고, 북왕국 사람들을 우상숭배자로 몰아붙이며 차별했다. 역으로 북왕국의 베텔과 단 성전은 오히려 예루살렘 성전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성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성전 이데올로기는 분단 이데올로기를 심화시키고 고착(固着)시켰다. 남북왕조는 제각기 성전을 중심으로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남북 상호간에 적개심을 일으키면서 지역감정까지 조장했다. 거짓 예언자들과 사이비 종교인들은 이런 분단 이데올로기를 종교화하는 데 한 몫을 했다.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촉발된 분열은 기원전 538년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뒤에도 계속되었다. 우리는 귀환한 유다인들이 주축이 된 성전 재건파와 사마리아 주민들이 주축이 된 반대파의 싸움이 심각했다는 것을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페르시아 조정에 투서질을 해서 성전건축이 한동안 중단되기도 했다. 유다인들은 이런 것을 모두 사마리아 사람들의 잘못으로 뒤집어씌웠다. 

 

예수님 시대까지도 심각한 분열은 계속되었다. 요한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는 바로 이것을 암시한다.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요한 4,20). 

 

묵상주제 

 

다윗 시대나 지금이나 성전건축은 시급한 과제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정주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주 하느님은 어느 건물 또는 어느 장소에 묶여있는 신이 아니다. 건물 또는 장소는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상징이요 표지일 뿐이다. 어느 성전에만 하느님이 계신다는 생각, 특정건물과 특정장소에 가야만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지나치면 많은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성경의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다. [2013년 12월 15일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77)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2사무 7,16).

 

 

사무엘기 하권을 읽어보면 사울의 이야기는‘다윗이 사울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는 것’으로 끝난다. 또한 역대기는 사울의 죽음 밖에 언급하지 않는다(1역대 10장). 구원 역사를 섭렵하는 시편 78편과 집회서 46-47장 어디에도 사울은 등장하지 않는다. 

 

반면에 다윗은 하느님의 뜻에 따른 군주제의 이상을 제시하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다윗은 하느님께 온전히 헌신한 임금이라는 기억을, 그리고 자신을 책망하는 예언자들에게도 순종한 임금이라는 기억을 남겼다. 한편 다윗의 성공은 ‘하느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셨다’는 것을 드러낸다. 사무엘기 하권 7장 나탄의 예언은 새로운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미래의 전망을 열어준다. 주 하느님께서는 다윗 왕조와 돌이킬 수 없는 계약을 맺고 다윗의 후손들을 당신 아들로 삼아 당신 백성 위에 당신의 왕권을 행사하시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다윗의 역사는 ‘예언적인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그에 대한 기억이 표현하는 것은 미래의 완성을 향한 믿음과 기다림이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배 시기까지 다윗은 다른 임금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열왕기 상하권을 읽어보면 그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국가적인 시련의 시기에 예언자들은 임금들의 불충실 때문에 생긴 재난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후손(이사 9,1-6; 11,1-9; 16,5; 예레 23,5-6), 새로운 다윗(예레 30,9; 에제 34,23-24; 37,24-25), 주님에 의해 도유(塗油)된 메시아의 이상적인 모습을 제시했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이 다윗 가문의 재건으로 완성되는 날을 기다렸으며, 메시아를 기다리는 희망이 즈루빠벨을 중심으로 되살아났다(즈카 6,12-13). 실패와 좌절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 하신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묵상은 계속되었다(시편 89; 132; 이사 55,3-4; 예레 33,14-26; 즈카 9,9-10; 12,7; 13,1). 역대기는 다윗을 책의 중심에 놓았다. 역대기 저자는 다윗이야말로 신정정치를 실현한 이상적인 임금이요, 영감 받은 가수요, 전례의 재건자라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집회서도 사무엘과 다윗을 찬양하며 희망을 언급하는 것으로 끝맺는다(집회 47,11). 

 

왕권의 실패는 기다림을 심화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다윗에게 하신 하느님 약속의 깊은 가치가 완전히 드러나려면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야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신비한 방법으로 이미 그 나라를 시작하셨다. 너무 세속적인 모습에 의해 하느님 나라의 영적인 실재가 위태롭게 될까봐 그분은 당신이 다윗의 후손으로 알려지지 않도록 매우 조심성 있게 행동하셨다. 그렇지만 그분은 당신 자신의 행동을 다윗의 예를 들어 정당화하셨다(마르 2,25-26). 그분은 ‘다윗의 자손’일뿐만 아니라 자신을 ‘다윗의 주님’이라고까지 주장하셨다(마르 12,35-37). 어떤 상황에서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인정하셨다(마르 10,47-48; 마태 15,22; 21,9.15).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과 하느님 곁에 좌정하심을 통해 세속적인 메시아 사상의 껍질을 벗겨버렸다. 이제부터 그의 제자들은 그분을 메시아로 받들면서 그분이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거침없이 선포할 것이며(마태 1,1; 루카 2,4; 로마 1,3), 다윗에게 하신 하느님의 약속이 그분 안에서 실현되었음을 선포할 것이다(사도 2,30; 히브 1,5). 

 

묵상주제 

 

왕권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가 성경 안에 간직된 것은 구원역사 안에서 차지하는 의미 때문이다. 다윗의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하느님의 나라를 미리 보여주기 때문에 망각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을 능가하지만, 당신 자신을 계시하려면 다윗이 필요했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우리 신앙의 일부분에 속한다. [2013년 12월 22일 대림 제4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78)


“주 하느님, 제가 누구기에, 또 제 집안이 무엇이기에 당신께서 저를 여기까지 데려오셨습니까?”(2사무 7,18)

 

 

사무엘기 하권 7장 8-17절은 다윗의 집에 내리는 하느님의 은혜로운 약속이다. 이어서 7장 18-29절은 그 은혜에 감사하는 ‘다윗의 기도’다. 

 

주 하느님께서 다윗의 가문과 굳은 언약을 맺은 것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순수한 은혜다. 다윗은 그 은혜에 감사하며 하느님께서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한다. 

 

‘설일’(雪日) 

 

                                    詩. 김남조

 

겨울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김남조 시인이 1971년 발표한 ‘설일’(雪日)이라는 시다. 김남조 시인의 정신적 지주는 가톨릭교회다. 김남조 시인의 문학 기법상 특이한 것은 리듬의 대부분이 시행의 자유로운 배열로 형성되어 있다는 데 있다. 시행이 우아하고 유연한 리듬으로 형성되어 있지만 정밀하게 계산된 것이다. 이미지보다는 의미에 역점을 둔 그의 언어가 생명력을 지니는 이유는 언어를 꿰뚫는 이 리듬감 때문이다. 

 

묵상주제 

 

다윗이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기도를 올렸듯이, 우리도 삶 자체를 하느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인생을 황송한 축연으로 생각하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 김남조 시인의 말처럼, 우리의 삶은 은총의 돌층계 어디쯤이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섭리의 자갈밭 어디쯤이다. 한편, 김남조 시인이 ‘돌층계’와 ‘자갈밭’이라는 단어를 굳이 선택한 이유를 이해할 것 같다.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는 쉽게 걸어가는 평탄한 길에서보다는 힘겹게 오르는 돌층계와 어렵게 걸어가는 자갈밭에서 더 잘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3년 12월 29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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