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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말씀 그루터기: 사무엘의 슬픔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11-12 조회수3,012 추천수1

[말씀 그루터기] 사무엘의 슬픔

 

 

임금을 하시겠습니까, 예언자를 하시겠습니까? 선교사의 역할은 임금의 역할이라기보다는 예언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시겠지요? 오늘 이 글은 예언자가 되고자 하는 분들을 위한 글입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들에게는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임금 사울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판관으로서 백성을 이끌던 사무엘이 나이가 많아졌을 때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사무엘을 찾아가 요구합니다.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우리에게 세워 주십시오”(1사무 8,5). 당신은 늙었고 당신 아들들은 쓸 만한 인물들이 못 된다는 말이지요. 사무엘은 다른 통치자를 달라는 말을 언짢아합니다. 그를 밀어내려고 하는 시도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더 언짢아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8,7). 

 

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분은 하느님이셔야 하는데, 눈에 안 보이는 하느님은 더 이상 믿고 살 수 없으니 임금을 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든든한 임금을 믿고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이전의 판관 시대에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임금이 되어 달라고 했을 때, 그가 거절한 이유도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다스리셔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요구에 사무엘은 반대하지만, 하느님은 마지못해 허락하시며 그 대신 임금이 어떤 권한을 가지고 백성을 힘들게 할 것인지를 똑똑히 알려 주라고 하십니다. 사무엘은 그렇게 합니다. 임금이 그들의 아들딸들을 데려다가 자신을 위해 일하게 만들 것이라고 백성에게 알려 줍니다. 그리고는 왕정 설립을 가장 반대했던 바로 그 사무엘이 하느님의 명을 받들어 사울을 찾아가 그에게 기름을 부어 임금으로 세웁니다. 불쌍한 사무엘이지요. 

 

사울이 임금이 된 후부터 사무엘은 사울의 예언자가 됩니다. 임금에게 예언자가 있다는 것은 임금의 권력이 절대적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은 하느님 아래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하지 않을 때에 그를 일깨워 주는 것이 하느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예언자의 역할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예언자는 임금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들의 궁정 예언자들의 역할은 이와 달랐습니다. 그들은 임금에게 힘을 보태주기 위하여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하느님을 대신하여 임금들을 꾸짖었습니다. 훌륭한 임금이라면 예언자의 말을 새겨들을 것입니다(물론 듣기를 괴로워하기는 하겠지만!). 불행히도 그런 임금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사무엘도 두 번 사울에게 정말 듣고 싶지 않을 말을 합니다. 한 번은 사울이 길갈에서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 손으로 하느님께 제물을 바쳤을 때입니다. 사무엘은 그가 하느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하느님께서 다른 사람을 임금으로 임명하셨다고 그에게 선언합니다(1사무 13,9-15 참조). 두 번째는 더 치명적입니다. 사울은 아말렉과 전쟁을 한 다음, 아말렉 사람들의 소와 양들을 없애버리지 않고 아까워서 그냥 두었습니다. 본래 이런 전쟁에서 전리품은 하느님께 속한 것으로 “완전 봉헌”을 한다고 하여 모두 없앴어야 하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그 가축들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에 그렇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무엘이 와서 왜 그 가축들을 살려 두었느냐고 하자,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그랬다고 둘러댑니다. 이에 사무엘이 모든 예언자들을 대표하여 유명한 말을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15,22-23). 이후의 줄거리는 아시지요? 사울은 왕조를 이루지 못하고 아들 요나탄과 함께 전사하고, 다윗이 새로운 임금이 되어 비로소 왕조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울과 사무엘의 관계는 이제부터 수백 년 동안 이어질 임금들과 예언자들의 관계를 미리 보여 줍니다. 임금들과 예언자들 사이의 갈등은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아합과 엘리야, 히즈키야와 이사야, 치드키야와 예레미야 사이에서 되풀이될 것입니다. 임금들이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임금과 예언자의 관계는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대립일까요? 권력자와 예언자의 관계는 어떻게 정의할까요? 충돌일까요? 

 

분명, 권력자에게 영합하는 사람은 예언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임금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골라서 해 주는 사람들은 거짓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거짓 예언자들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들은 임금이 원하는 대로, 이 나라는 영원히 안전할 것이고 하느님께서 임금을 지켜 주실 것이라고 백성들이 믿게 만들었습니다. 전쟁을 앞두고는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하여 승리를 예고했습니다. 나라에 불의가 가득하고 온통 썩어 들어가고,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며 속은 다 곪아 있는데도 임금은 그것을 보기를 원하지 않았고 거짓 예언자들은 그것을 일깨워주지 않았습니다. “괜찮다, 괜찮다” 말하며 태평성대를 노래했습니다. 그들 자신도 자신의 안락만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예언자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언자는 당연히 박해와 거부를 당할 수밖에 없고, 그런 가운데서도 임금에게 옳은 말을 합니다. 

 

그런데, 위에 인용한 사무엘의 말에서 몇 줄 내려가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울을 두고 슬퍼하였다”(15,35). 사울을 두고 슬퍼하였다! 그만큼 사무엘은 사울을 사랑하고 아꼈던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그를 다시 보지 않을 만큼 그가 하느님의 뜻을 저버렸다 할지라도, 그를 위하여 슬퍼했던 것입니다. 

 

“사울을 두고 슬퍼하였다”라는 한 구절에서 저는 예언자와 임금의 관계가 대립 관계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의 슬픔은, 과연 내가 하는 비판들이 올바른 비판들인지 되돌아보게 합니다. 또한 우리가 흔히 하는 수많은 비판들은 예언자가 임금에게 했던 충언들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다른 이들을 비판할 때, 비록 그 비판이 정당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과연 그들을 두고 슬퍼했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백성을 사랑했고, 그와 마찬가지로 임금도 사랑했습니다. 임금을 선택하신 하느님과 같은 마음으로 그 임금을 사랑했고, 그가 하느님의 뜻대로 백성들을 올바로 다스리기를 바랐습니다. 그런 간절한 마음에서 임금을 비판했습니다. 

 

왜 다른 사람도 아닌 사울을 임금으로 세웠던 사무엘이 사울에게 왕위에서 쫓겨남을 선포해야 했을까요? 아마도 그가 다른 누구보다도 사울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사울을 선택하셨음을 가장 분명하게 알고 있던 사람도 사무엘이었습니다. 사울에게 최고의 지지자가 있었다면 사무엘이 아니었을까요? 예언자에게서 지지와 비판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예언자 역할을 하려면 임금을 두고, 비판해야 할 사람을 두고 슬퍼할 줄 알아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마태 5,4) 너무 엉뚱한가요? 슬퍼하는 것은 무엇인가 불완전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불완전하다 해도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슬퍼합니다. 예언자가 임금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임금이 하는 것을 무엇이든 잘 한다고 칭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예언자는 슬퍼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기보다 잘못하고 있는 임금을 사랑하기가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저 그런 임금을 미워하는 것이 더 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우리에게 그것은 예언자의 모습이 아니라고 가르쳐 줍니다. 죽는 날까지 다시 사울을 보지 않았을 정도로 그가 하느님의 뜻을 벗어났음을 알았고, 하느님께서 그를 내치셨음을 선고했던 사무엘은 그런 사울을 안타까워하며 평생 슬퍼했던 것입니다. 

 

[땅끝까지 제76호, 2013년 7+8월호, 안소근 실비아 수녀(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성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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