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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마르코 복음서16: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마르 15,21-32)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11-05 조회수3,042 추천수1

[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 -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16) 조롱받고 못 박히신 예수님(마르 15,21-32)


예수의 외로운 길, 하느님 사랑과 현존의 증거

 

 

조롱받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만나보자. 로마 군인들은 총독 관저에 예수님을 끌고 갔다. 예수님은 로마 법정에서 신문을 받고 구타와 인격적 모욕을 당하신다. 예수님은 자주색 옷을 입고 가시관을 쓰셨다. 자주색 옷은 왕이나 귀족이 입는 옷이다. 유다인의 왕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 자주색 옷을 입힌 것이다. 순교자들도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조롱과 학대를 당했다. 

 

군중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며 외쳤다. 예수님은 외침을 들으며 참혹한 죽음을 안겨줄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다. 당시 로마의 처형 방법은 목을 잘라서 죽이는 참수형, 굶주린 맹수에게 집어 던지는 맹수형이 있다. 십자가형은 가장 잔혹한 극형으로, 로마인들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어도 십자가형에 처하지 않았다. 로마 군인들은 십자가형에 처한 죄수가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메고 가는 도중에 계속 매질을 한다. 그러나 가는 길에 죄수가 죽어버리면 안 되므로 너무 힘이 빠졌다고 생각하면 대신 다른 사람이 지고 가게 했다. 

 

군인들은 예수가 길에서 죽으면 안되겠다 싶어 키레네 사람 한 명을 골라 예수님을 대신해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한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를 져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주위에 보면 우리를 대신해 수고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거리를 지나다 보면 청소를 해주시는 분, 화단을 정리해 주시는 분 등 아무도 모르게 남을 도와주는 분이 많다. 

 

채찍은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에게 자비의 행위라고 한다. 오히려 채찍으로 맞은 후 십자가에 못 박히면 일찍 죽기 때문이다. 사형장에 가면 군인들은 죄수를 나무 십자가 위에 눕혀서 죄수의 손목과 발을 나무에 대고 박은 다음 세워놓고 몇 시간이 지난 다음 군인들은 죄수가 죽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다리를 부러뜨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돌아가셨기에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자, 피와 물이 나왔다. 아리마태아 요셉은 예수님 시신을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셨다. 

 

예수님은 엄청난 고통을 겪으시면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으셨다. 힘든 상황에서 침묵하셨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군인들이 키레네 사람들을 붙들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한 것은 예수님의 기력이 쇠했고 십자가를 질 수 없을 그만큼 예수님은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쏟아내어 주셨다는 것이다. 마르코복음서에는 "유다인들의 임금"(마르 15,26), 마태오복음서에는 "이 자는 유다인들의 임금 예수"(마태 27,37), 루카 복음서에는 "이 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루카 23,38)라고 쓰여 있다. 요한복음서에는 빌라도가 축제에 모인 다양한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세 가지 언어(히브리어, 라틴어, 그리스어)로 써놓았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하기를, 이 세 가지 언어는 세 부류의 사람을 뜻한다고 했다. 히브리어는 하느님의 율법으로 영광스럽게 된 유다인을, 라틴어는 모든 민족 위에 군림하는 로마인을, 그리스어는 이방인들 가운데 현자들을 표현한다. 더 깊은 뜻으로는 히브리어는 종교의 언어, 라틴어는 정치의 언어, 그리스어는 문화의 언어다. 종교와 정치, 문화 모든 면에서 예수님은 진정한 임금이시라는 것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매달려 극도의 고통에 시달리시는 예수님을 보며 모독했다. 

 

"저런!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더니.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마르 15,29-30). 

 

수석 사제들도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마르 15,31-32)하며 바아냥 거렸다.

 

예수님의 죽음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 곧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아니라 강도들의 소굴로 변한 성전을 무너뜨리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사흘 후에 이뤄질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이 손수 마련하신 성전을 세우는 사건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로 믿는 모든 이를 하느님과 일치시키는 살아있는 성전이시기 때문이다. 

 

자신도 구하지 못하는 예수님은 그 많은 백성이 있음에도 백성에게 배척당하면서 혼자 외롭게 돌아가실 수밖에 없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 그 모습에서 인간을 위해 생명을 내놓으시는 하느님, 인간의 고통과 절망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현존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에 백인대장이 나와 신앙고백을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고 말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온갓 시련을 이겨낼 힘을 주신다. 너무 힘든 상황이라고 울고만 있지 말고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처절하고 절실하게 도와달라고 기도하면 하느님은 우리가 그것을 뛰어넘을 용기와 힘을 주실 것이다. 하느님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다. 마지막 날에는 우리를 죽음에서 일으키시면서 영원히 당신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실 것이다.

 

[평화신문, 2013년 11월 3일, 정리=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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