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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성경 속의 여인: 유딧 - 하느님의 존재 증명 위해 두려움 없이 행동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6-04 조회수3,005 추천수1
[성경 속의 여인] 유딧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두려움 없이 대담하게 행동


구약성경 유딧의 이야기는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많은 도시들이 약탈을 당했던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전해준다. 하지만 저자는 역사적인 실제 사건들에 구애를 받지 않고 상당히 자유롭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실제로는 아시리아가 아니라 바빌론을 다스렸는데, 아시리아까지 다스렸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유딧의 고향인 배툴리아는 실제로는 지명에 나오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저자가 유딧 이야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 자체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국익을 위해 전쟁에 투신하고 있는 유딧의 영웅적 행동이다. 외부의 침략으로 나라의 존립만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참된 신앙도 위태로웠는데, 그 신앙의 보존을 위해 유딧의 행동도 칭송한다.

유딧은 하느님을 크게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느님을 시험하는 배툴리아의 원로들의 주장을 분명하게 거부하면서 이렇게 경고한다. “주 우리 하느님의 뜻을 담보로 잡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달리 협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시고, 인간과 달리 부추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십니다. … 당신 마음에 드시면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 주실 것입니다”(유딧 8,16 이하). 그리고 유딧은 자기 민족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적군의 장수 홀로페르네스를 빼어나게 아름다운 용모와 대담한 용기로 물리친다.

유딧기는 히브리 성경이 아니기 때문에, 유다교에서 외경으로 간주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개신교는 유딧기를 구약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경전으로 받아들인다. 중세의 유다인 전설에서, 시와 음악 그리고 미술에서 유딧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자로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행동하는 여인

우리는 유딧과 홀로페르네스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부터 그냥 무턱대고 다루는 것이 아니다. 피비린내 나는 이 이야기를 대하는 것이 어려울지라도 우리는 이 이야기를 조용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은 종종 불의하거나 간혹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다룬다. 성경은 마치 우리가 어렸을 때 익히 들었던 전설과 신화와 동화 등과 같은 이야기도 들려준다. 한편 우리는, 과학문명과 기계기술이 발달한 현대 사회 안에서 살면서 여러 매체들을 통하여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테러와 폭력 등을 정확하게 실시간으로 접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물음이 제기된다. 우리는 ‘두려움을 전혀 모르는 영웅’ 유딧을 왜 그리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오늘날 영웅을 우러러 보는 일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거센 경향에 익숙해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유딧이 여자이기 때문인가? 만일 남자들이 전쟁의 싸움터에서 서로를 죽인다면, 군대의 지휘관이 전쟁 중에 어떤 도시를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린다면, 우리는 이를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것이다.

유딧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선택한 길은 어떤 길인가? 유딧은 홀로페르네스를 농락하기 위해 온갖 도구를 이용한다. 그는 값진 보석들과 재산, 그리고 애교 등을 도구로 삼는다. 유딧은 아무도 모르게 홀로페르네스를 함정에 빠뜨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칼을 내리쳐 그의 머리를 자른다. 여기에서 유딧의 용기 있는 대담한 행동은 실제로 찬사를 받을 만하지만, 그의 냉혹한 잔인성을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설화자에게 유딧이 다정다감한 인물인가 혐오감을 주는 인물인가 하는 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유딧의 행동이다. 배툴리아의 지도자들은 하느님이 개입하여 도움을 베푸는 시한을 정하였다. 그들은 곧 닷새 이내에 하느님이 도움을 베풀지 않을 경우 배툴리아를 아시리아 사람에게 넘겨주려고 했다. 하느님을 시험했던 것이다.

이에 유딧은 그들에게 멸망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깨닫도록 그 참상을 설명한다. 동포들이 학살당하거나 유배지로 끌려가고, 상속 받을 땅이 황폐해지고, 거룩한 성소는 파괴될 것이라고 말한다. 유딧은 도시의 지도자들에게 용기 있게 행동하라고 설득한 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행동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동포들에게 모범을 보입시다. 그들의 목숨이 우리에게 달려 있고, 성소가, 하느님의 집과 제단이 우리에게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 제 말씀을 들으십시오. 저는 대대로 우리 겨레의 자손들에게 남을 일을 하려고 합니다”(유딧 8,24. 32).

결국 홀로페르네스는 유딧의 대담한 행동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의 죽음으로 배툴리아 사람들은 침략자들에 의한 억압과 약탈과 유배 등을 피하게 된다. 홀로페르네스는 배툴리아 주변에 있는 샘들을 점령하여 마시는 물을 통제하였다. 그래서 주민들은 단 하루도 물을 실컷 마실 수 없었으며, 묵이 말라 생기를 잃고 하나씩 쓰러져갔다(유딧 7,20 이하). 따라서 그가 유딧에 의해 죽지 않았다면, 아마 남자든 여자든, 노인이든 어린아이든 아무도 가리지 않고 배툴리아의 백성들을 모두 잔인하게 죽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유딧은 아시리아 군대가 퇴각한 다음에 백성들에게서 구원자로 칭송을 받았다. 그 옛날 여자 판관 드보라처럼 유딧은 하느님을 향하여 찬미가를 이렇게 드높여 부른다. “주님은 전쟁을 쳐 없애 버리시는 하느님이십니다”(유딧 16,2). 바로 이런 하느님 때문에, 하느님의 신비로운 도움과 구원활동 때문에 무방비 상태의 힘없는 사람들은 무책임한 지도자들과 무자비한 적군의 폭력과 권력욕에 그리 오랫동안 희생제물이 되지 않는다.


생명의 하느님

유딧의 이야기는 ‘의로운 혁명’이나 독재자를 살해하는 것이 정당한가 정당하지 못한가를 새롭게 토론하는 계기가 된다. 아주 긴급한 상황에서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가? 특히 보다 더 심각한 피의 폭력을 종결시키기 위해서라면 폭력이 허용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 단지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뿐이다. 종종 달리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 상황일지라도 폭력의 사용은 악한 것이고, 따라서 허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폭력은 하느님의 창조의지에 거슬리기 때문이다. 폭력은 우리에게 또다시 경악을 불러일으켜 새로운 폭력을 유발한다. 이것은 유딧의 이야기에서도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악의 순환이다. 이에 반해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요한 10,10) 이 세상에 개입하시고 활동하신다.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전쟁이나 백성을 살해하는 폭력, 자유를 통제하는 일 등은 있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해 우리는 저항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런 저항이 폭력이 없이도 가능한지, ‘폭력의 포기’가 점점 악화되고 심각해지는 폭력의 상황을 외면하거나 오히려 더 조장하는 것이 아닌지 등은 개인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폭력에 저항하는 수단으로써 ‘새로운 폭력’이 필요하다고 결정한다면, 이런 결정은 ‘질서’에 결코 기여하지 못한다. 하느님께서 원하셨던 생명의 질서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이런 결론을 우리는 유딧의 이야기에서 이끌어낼 수 있다. 하느님의 창조물인 우리의 세상은 더 이상 낙원이 아니라 곳곳이 파괴되어 있다. 이에 반해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원하시고 생명의 근원이시다. 그분은 폭력을 원치 않으신다. 폭력은 당신 피조물의 생명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폭력을 폭력으로만 응답해야 하는 상황은 아주 가슴 아픈 일이다.

유딧은 이렇게 노래한다. “당신께서 말씀하시자 생겨났으니 모든 조물은 당신을 섬겨야 합니다. 당신께서 영을 보내시니 그것들이 지어졌습니다. 당신의 목소리에 거역할 자 하나도 없습니다”(유딧 16,14). 인간이 만드는 그 어떤 것도, 정복의 의지도 자연의 힘도 하느님을 거역할 수도 맞설 수도 없다. 유딧은 이렇게 말한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만이, 오직 하느님의 창조계획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자비를 입는다고 한다(유딧 16,15 참조).

[쌍백합, 제37호, 2012년 여름호, 김선태 사도요한 신부(화산동 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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