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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구약성경의 맥8: 사무엘기의 개요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8-16 조회수3,118 추천수1
[신앙의 해 - 구약성경의 맥] 제8주제 : 사무엘기의 개요


이상적인 지도자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나자 판관들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판관들이 다스리던 약 200여 년의 세월은 판관 2,11-19가 보여주는 대로 이스라엘 민족의 죄와 그에 대한 결과로 이민족들의 침입이 일어나며, 그 때문에 곤경에 놓인 백성이 울부짖으면 하느님께서 판관을 일으키시어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건져내 주시고, 그러면 이스라엘은 다시 하느님을 잊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죄에 빠지게 되는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그리하여 역사가는 판관시대를 “그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제 눈에 옳게 보이는 대로 하였다.”(판관 17,6; 18,1; 19,1; 21,25 참조)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줄 지도자도, 그들의 행위를 규정해 줄 수 있는 원칙도 부재하던 시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판관 17―18장의 미카의 가정 성소와 단의 성소 이야기, 그리고 판관 19―21장의 기브아인들의 만행과 벤야민 지파와 이스라엘 다른 지파들과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판관기는 제한된 기간 동안만 지도자의 카리스마를 통해 백성들을 위기에서 구원할 수 있는 판관제도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는 동시에 이상적인 다스림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던지면서 왕정의 수립을 준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판관기는 판관 삼손의 시대로 끝이 나지만 사무엘기 상권에 소개되는 엘리 사제와 사무엘도 역시 판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판관은 사무엘로서 그가 주님의 명으로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움으로써 판관들의 시대는 종결되고 왕정이 시작됩니다.


왕정 수립의 격동기

왕정에 대한 판관기나 사무엘기 상권의 입장은 이중적입니다. 판관들을 통한 다스림은 중앙집중적인 세력을 갖추지 못한 까닭에 이민족들의 침입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는 점에서 왕정에 대한 현실적인 필요를 긍정하면서도,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임금이신데 주님이 아니라 인간을 왕으로 세운다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는 입장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판관 9,7-21; 1사무 8장 참조).

사무엘은 백성들이 왕을 세워달라는 요구를 마지못해 수락하면서 왕정의 성공 여부는 백성들이 얼마나 하느님께 충실하느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오로지 주님만을 경외하고 마음을 다하여 그분만을 충실하게 섬기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해주신 위대한 일을 똑똑히 보시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여전히 악행을 일삼는다면, 여러분도 여러분의 임금도 모두 쫓겨날 것이오”(1사무 12,24-25).

왕정이 수립되는 격동기를 묘사하고 있는 사무엘기에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3명의 주요 인물들, 곧 사무엘, 사울, 그리고 다윗의 삶이 소개됩니다. 사무엘기에서 이 인물들을 소개하는 데 사용하는 문학적인 양식은 독특한 것으로 중요한 두 인물들의 운명의 상승과 하강을 대조시킴으로써 하느님의 선택과 그 선택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훌륭하게 이야기합니다.

사무엘의 등장은 엘리 집안의 하강과 궤를 같이하며, 다윗의 상승은 사울 집안의 하강과 궤를 같이합니다. 이러한 문학적 구조를 통하여 하느님의 선택은 그 선택에 따라오는 충실성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사무엘의 이야기 가운데 들어있는 계약의 궤 이야기(1사무 4,1―7,1; 2사무 6장) 또한 같은 맥락의 의미를 전달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현존한다는 표지가 계약의 궤이지만 궤 자체가 이스라엘의 승리를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며 그 궤마저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야훼 하느님의 무력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필리스티아인들의 다곤 신전에 모셔진 궤가 다곤 신의 신상을 파괴했다는 사실을 통하여 강력하게 천명됩니다.


다윗의 삶

다윗의 삶은 두 개의 큰 이야기군을 통하여 묘사되고 있는데, 그것은 ‘왕위등극사화’로 알려진 이야기군(1사무 16장―2사무 5장)과 ‘왕위계승사화’로 알려진 이야기군(2사무 9―20장과 1열왕 1―2장)입니다. 왕위등극사화는 다윗이 어떻게 사울에 이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르게 되는지 그 과정을 그려내며, 왕위계승사화는 다윗의 왕위가 솔로몬에게 계승되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이 두 이야기군의 가운데 등장하는 것이 유명한 나탄의 예언을 보도하는 2사무 7장입니다. 왕궁을 짓고 나서 주님이 계실 성전을 짓고자 하는 다윗에게 주어진 나탄의 예언은 다윗의 왕조 이야기에서 중요한 기능을 차지하게 되는데, 나탄의 예언을 통하여 하느님의 선택은 다윗에게만 그치지 않고 다윗의 후손들에게까지 확장됩니다. 곧 하느님은 다윗 왕조를 당신의 도구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 때문에 다윗의 왕조는 세습이 가능하게 됩니다.

구약성경이 제시하는 선택에 관한 신학은 어떤 인간도 어떤 제도도 하느님의 선택을 담보할 수 없으며, 하느님의 선택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유에 달려있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다윗의 왕위가 그의 아들에게 이어질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다윗의 왕조를 당신의 도구로 선택하시고 영원한 계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탄의 예언은 다윗 왕조의 이데올로기를 튼튼히 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며, 훗날 이스라엘의 운명을 회복시킬 메시아 역시 이 다윗 집안에서 나오게 되리라는 기대를 낳게 된 것도 바로 이 예언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지도자상

이 두 개의 이야기군에서 묘사된 다윗의 삶을 통하여 성경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지도자상을 그려냅니다. 다윗은 결코 완벽한 인물이라 할 수 없습니다. 2사무 11장에서 이야기하는 밧 세바 사건이 보여주듯이 그 역시 인간적인 한계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임금인 다윗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는 이상적인 지도자가 반드시 완벽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갖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오히려 사무엘기의 저자가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요건으로 강조하는 것은 1사무 15,22에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하는 말에서 드러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사무엘의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지도자가 되는 요건은 그가 얼마나 많은 인간적인 업적을 이루어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선택하신 하느님께 얼마나 충실했느냐에 달려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지도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듯이 백성을 돌보는 자여야 합니다.

1사무 8장에서 왕정을 반대하는 사무엘의 말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백성을 억압이나 착취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오히려 고아와 과부, 이방인과 같은 약자를 돌봄으로써 하느님의 정의를 세상에 드러내는 자여야 합니다.

약점이 없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기꺼이 인정하면서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는 인간, 자신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늘 주님의 영의 인도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지도자, 어려움 가운데 하느님께로부터 힘을 얻을 수 있는 자,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다른 이들을 또한 존중할 수 있는 지도자의 모습이 다윗의 삶을 통해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다양한 인생의 아이러니들

한편, 다윗의 왕위계승사화는 그 뛰어난 문학성으로 많은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었는데, R.N. 와이브레이는 이 이야기군이 지닌 지혜문학적인 특성에 주목한 바 있습니다. 와이브레이가 지적한 대로 이 이야기군에는 다양한 인생의 아이러니들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나탄의 아들 므피보셋은 다윗의 배려로 그의 식탁에 함께 앉기 전에 로 드바르에 사는 암미엘의 아들 마키르의 집에 식객으로 머물며 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2사무 9,4). 그런데 후일 압살롬의 반란때 요르단 강을 건너 도주를 해야 했던 다윗 역시 이 사람의 도움을 받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2사무 17,27). 사람의 운명을 누가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 역설은 게라의 아들 시므이를 통해 언급됩니다. 그는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주하던 다윗을 한껏 모욕하였는데(2사무 16,5-8), 압살롬의 반란을 제압하고 돌아오는 다윗을 맞아 한 입으로 두 말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2사무 19,17-22).

세 번째 역설은 압살롬에게서 발견됩니다. 일찍이 압살롬에게는 길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이 자랑거리였습니다(2사무 14,25-26). 그런데 그 자랑거리가 바로 그의 죽음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노새를 타고 가던 압살롬은 그의 머리카락이 향엽나무에 휘감기면서 나무에 매달리는 신세가 되었고, 그 때문에 요압에게 살해되지 않았습니까!(2사무 18,9-10)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1코린 1,31; 예레 9,22-23 참조)고 하지 않았을까요?

* 김영선 루치아 - 마리아의전교자프란치스코회 수녀. 가톨릭대학교에서 석박사 통합과정 2년을 마치고 미국 보스톤대학(예수회)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서강대학교에서 구약성서 입문을 강의하고,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구약성경과 피정 지도’라는 제목으로 구약성경 세미나를 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8월호, 김영선 루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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