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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성서의 세계: 수치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7 조회수2,983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수치

 

 

수치와 도덕과 명예

 

한때 이 땅에서는 예의염치(禮義廉恥), 곧 예절과 의리와 청렴 그리고 수치를 아는 태도를 중히 여겼다. 이것들을 국유사유(國有四維), 나라를 지탱하는 네 가지 근간이라고까지 하였다. 국가만이 아니라 어떠한 형태로든 사람들이 조직을 이루어 함께 사는 데에는 이 네 덕이 꼭 필요하다고 하겠다. 그 가운데에서 ’예’와 ’의’와 ’염’은 긍정적 덕, ’치’는 부정적 덕이라고 할 수 있다. ’치’는 이를테면 나쁜 쪽으로 넘어가지 말고 좋은 쪽으로 매진하라고 하한선을 그어주는 덕이다. 그래서 ’치’는 어떤 면에서 다른 덕들의 바탕 구실을 한다. 사실 사람들이 후안무치하면 공동체가 성립되지 못한다. 사회의 도덕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된다. 그래서 동양인이 아니라 서양인이기는 하지만 칼라일이라는 이는 "수치심은 모든 도덕의 원천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수치는 성서의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구실을 한다. 이스라엘에서 처음으로 임금 노릇을 한 아비멜렉은 어떤 성을 공격하다가 어처구니없이 어떤 여자가 던진 맷돌짝에 머리를 맞아 죽게 된다. 아녀자의 손에 죽는다는 것은 전사(戰士)에게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무기병을 불러 말한다. "네 칼을 뽑아 나를 죽여라. 사람들이 나를 두고 ’여자가 그를 살해하였다.’ 할까 두렵다"(판관 9,54). 또 다윗 때에 이웃 나라 임금이 죽자 조문단을 파견한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는 이스라엘의 사절들이 자기들을 염탐하러 왔다고 지레짐작하고서는, 그들의 턱수염을 반으로 깎고 의복도 엉덩이 부분까지 잘라서 돌려보낸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바로 돌아가지 못한다. 다윗의 배려로, 그들은 수염이 다시 자랄 때까지 국경 지대에 머무른다(2사무 10,1-5). 그리고 원수들이 자기의 생명을 노리는 매우 위급한 상황에서 시편의 기도자는 원수들이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게 해주십사고 하느님께 간청한다(40,15).

 

이렇듯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명예가 훼손되는 것을, 다른 이들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야말로 죽기보다 싫어한다. 그래서 어떤 학자(홀라데이)는 이스라엘의 문화를 "수치의 문화"로 특징짓기까지 한다.

 

 

부끄럽게 하는 것들

 

이스라엘인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떳떳한 자세로 살아가게 해주는 명예가 실추되는 일이다(2사무 10,5). 여자는 정조가 유린당하는 것을 커다란 명예 훼손으로 여겨 부끄러워한다. 그래서 다윗의 딸 다말은 이복 오빠 암논이 처녀인 자기를 범하려 하자, "제가 이 수치를 안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며, 제발 "파렴치한 짓"을 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한다(2사무 13,13).

 

전쟁에서 지는 것도 크게 부끄러운 일로 여긴다(2사무 19,4; 예레 9,18; 50,2; 2역대 32,31). 게다가 고대의 잔혹한 전쟁 수행 방식에 따라 승자들이 패자들의 오른쪽 눈을 빼거나(1사무 11,2)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라버리거나 하면(판관 1,6-7), 진 쪽은 뼈에 사무치도록 수치를 느끼게 된다. 개인도 직업생활을 하거나 직무를 수행하면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래서 예언자도 환시를 보지 못하거나(미가 4,6-7) 거짓 환시를 보게 되면(즈가 13,4) 수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특정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음으로써 수치를 느끼게 하기도 한다(신명 25,9).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복이나 은혜를 구체적이고 물질적으로 주신다고 생각하였다. 특별히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가난과 굶주림, 고난과 슬픔과 불행 등을 겪게 되면 자연히 부끄러워하였다(1사무 18,23; 예레 20,18; 에제 36,30). 수치의 원천은 결국 약함에 있다. 어떤 사람이나 일이나 현상 앞에서, 객관적으로 힘이 없거나 주관적으로 무기력하다고 느낄 때에 수치심이 생기는 것이다(에제 32,30 참조).

 

그래서 성서의 사람들은 기대가 어그러질 때에도 실망과 함께 수치를 느낀다. 강대국에서 도움을 받으리라고 또는 하느님 현존의 자리인 성소의 덕을 보리라고 바랐다가 그 바람이 깨지면 수치를 당하였다고 느낀다(이사 30,3; 예레 2,36; 48,13). 재해를 당할 때에도 그들은 부끄러워한다. "종들이 우물에 나와도 물을 찾지 못하고 빈 물동이를 든 채 돌아온다. 그들은 수치스럽고 부끄러워 머리를 가린다. 땅에 비가 오지 않아 밭이 갈라지니 농부들이 부끄러워 머리를 가린다"(예레 14,3-4. 그리고 요엘 1,11 참조).

 

혼인한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로 여긴다. 그래서 야곱의 아내 라헬은 임신하지 못하는 몸이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아들을 낳고서는, "하느님께서 나의 수치를 치워주셨구나." 하면서 좋아한다(창세 30,23). 엘리사벳도 세례자 요한을 낳고서는 같은 말을 한다(루가 1,25. 그리고 1사무 1,6과 이사 4,1도 참조). 그리고 당시는 남성 중심 사회였기 때문에 과부가 되는 것도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특히 아들 없는 과부는 재혼하여 여자로서 임무를 채우기 전에는 수치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예루살렘의 몰락을 자식 없는 과부로 그리기도 한다(이사 54,4; 애가 1,1).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들의 삶 전체가 하느님과 직접적인 관계 아래 전개된다. 그래서 그들이 그분과 관계를 훼손시키는 죄를 지었을 경우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저희 죄악은 머리 위로 불어났고, 저희 잘못은 하늘까지 커졌기 때문입니다"(에즈 9,6. 그리고 예레 2,26; 22,22; 31,19 참조). 또 창세기에 따르면, 아담과 하와가 애초에는 알몸으로 지내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지만(2,25), 죄를 지은 다음에는 서로에게 몸을 가리고 하느님에게 몸을 숨긴다(3,7-8).

 

 

부끄럽게 여기는 것들

 

이스라엘인들은 이렇게 자기가 지은 죄를 부끄럽게 여긴다(집회 5,14; 20,26; 로마 6,21; 에페 5,12도 참조). 그래서 죄를 지은 자신을 혐오하기도 한다(에제 36,31). 그리고 위의 창세기 이야기가 시사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인들은 특히 자기의 알몸을 드러내거나 남의 알몸을 보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술에 취한 노아가 벌거벗은 채 자기 천막 안에서 잠이 들자, 그의 두 아들이 겉옷을 집어 둘이서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알몸을 덮어드린다(창세 9,21-27. 그리고 이사 47,3; 예레 13,26; 에제 16,37; 나훔 3,5; 묵시 3,18 등도 참조). 여기에서 맨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 인간적으로 겪으신 수치를 생각하게 된다(히브 12,2).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에 행해지는 십자가형은 그 자체로서 처형되는 이에게 더할 나위 없이 치욕스러운 일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또 종교적인 이유로 우상들이나 이민족들의 신, 특히 가나안인들의 신 바알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생각한다(예레 3,24; 11,13; 호세 9,10). 관습이나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도 부끄럽기는 마찬가지이다(1고린 11,6).

 

사람은 또 다른 이나 자기 신앙의 대상이나 자기 종교를 부끄럽게 여길 수도 있다. 이는 특히 초대 그리스도교의 신앙 고백과 복음 선포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8).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믿는 이들을 형제로 받아들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것을 본받아(히브 2,11), 그리스도인들도 그분을 부끄러워하는 일 없이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로마 1,16).

 

마음을 바수는 부끄러움 수치를 당하거나 부끄러움을 느끼면 얼굴에서부터 반응이 일어나(2사무 19,6), 우선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된다(에즈 9,6). 이러한 사실은 부끄러움이나 창피가 얼굴을 가리거나 덮는다는 말로써 표현된다(예레 7,19; 시편 44,16). 또 수치와 모욕을 옷처럼 입는다고도 말한다(욥 8,22; 시편 35,26; 132,18).

 

이스라엘인들은 또 자기들의 부끄러움을 의식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수치감이 클 때에 남자는 머리와 수염을 가리고(2사무 15,30; 예레 14,3-4; 미가 3,7), 여자는 겉옷을 찢고 재를 머리에 끼얹고서는 머리에 손을 얹은 채 울부짖는다(2사무 13,19). 허벅지나 손바닥을 치기도 한다(에제 21,17; 25,6).

 

결국 명예를 중시하고 수치를 싫어하는 이스라엘인들에게, 부끄러움은 인간의 사고와 의지와 행동의 중심인 ’마음’을 바수는 고통이 된다(시편 69,21). 이렇게 수치가 그 어떤 형벌보다 지독하기 때문에, 특히 탄원 시편에서 부끄러움이 자주 언급된다. 곧 선인이 아니라 악인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해주십사는 간청이다(시편 6,11; 25,2; 31,18; 35,4; 40,15; 109,29 등; 예레 17,18).

 

물론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는 자들도 없지 않다(예레 3,3; 6,15). 수치를 모를 때에 인간은 죄를 벗어나지 못한다(스바 3,5). 반대로 부끄러움을 알 때에 도덕적 인간의 길만이 아니라 올바른 신앙의 길을 걷게 된다(집회 26,25. 그리고 1고린 4,14; 6,5; 15,34; 2데살 3,14 참조). 그러면 부끄러움이 오히려 "영광과 은총"이 되기도 한다(집회 4,21).

 

[경향잡지, 1999년 8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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