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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성경의 세계: 사해 두루마리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12-10 조회수2,980 추천수1

[성경의 세계] 사해 두루마리 (1)

 

 

사해 두루마리는 가장 오래된 구약성경 필사본이다. 기록연대는 BC 200년에서 AD100년 사이로 보고 있다. 이전에는 레닌그라드 사본이 가장 오래되었다. 서기 1000년경 필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해 두루마리 등장으로 구약성경 원문에 900년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발견 장소는 사해 인근 쿰란 지역이기에 쿰란문서 또는 사해문서라 한다. 사해는 갈릴래아 호수의 6배다. 소금농도가 30%로 생물이 살 여건이 아니다. 요르단 강으로부터 매일 5백만 톤의 물이 흘러들지만 일정수면을 유지한다. 뜨거운 날씨로 그만큼의 물이 증발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소금기는 그대로 남는다. 이런 날씨 덕에 사해 두루마리는 보존이 가능했던 것이다.

 

1947년 한 목동이 잃어버린 염소를 찾다가 절벽 동굴에 돌멩이를 던졌다.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들리자 호기심에 들어가 봤다. 60㎝쯤 되는 항아리들이 즐비했다. 뚜껑을 여니 가죽을 이은 두루마리에 깨알 같은 글씨가 적혀있었다. 몇 개를 들고 나와 골동품 가게에 팔았다. 두루마리를 산 골동품상은 시리아 정교회 대주교 사무엘(Mar Samuel)에게 다시 팔았다. 주교는 히브리 대학 고고학 교수 수케닉(Sukenik)에게 감정을 의뢰했고 수케닉 팀은 기원전 1~2세기 사본으로 잠정 결론 내린 뒤 사진 촬영해 보관했다. 그리고 이듬해(1948년) 사진을 고고학계에 공개했다. 사해문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경위다.

 

이후 1956년까지 11개 동굴에서 800개가 넘는 옛 문서들이 발견된다. 히브리어와 아람어 그리고 희랍어로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기록된 것들이다. 2개 사본은 얇은 구리판 위에 기록되었기에 구리사본이라 한다. 특히 11번째 동굴에는 구약성경 필사본이 에스더서만 빼고 모두 들어 있었다. 사해문서는 유다교의 한 당파인 에세네파 작품이라는 것이 훗날 밝혀졌다.

 

제2동굴에서는 주민들이 30개의 문서를 발견해 골동품상에 팔았고 이후 여러 사람을 거쳤지만, 이스라엘 정부가 모두 사들였다. 제4동굴에서는 1950년 말부터 40%의 문서들이 발견되었지만 내용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성경 필사본이 발견된 제11동굴에서 가장 긴 두루마리가 나왔다. 이사야 예언서로 8.148m다. 내용을 미루어봤을 때 원래 길이는 8.75m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14년 12월 7일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성경의 세계] 사해 두루마리 (2)

 

 

사해 두루마리 권위자는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롤랑 드 보(Roland de Vaux) 신부다. 프랑스 출신으로 당시 예루살렘 성서대학(Ecole Biblique) 교수로 있었다. 발견된 문서가 돈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도굴이 시작되었다. 두루마리를 팔겠다는 접촉이 드 보 신부에게도 왔다. 도굴을 막으려 정부에 알렸다. 군인과 함께 문화재 관리위에서 나섰지만 수백 개의 조각문서는 요르단으로 넘어간 뒤였다. 결국, 이스라엘은 요르단 정부에 15,000 요르단 파운드를 지불하고 사들인다. 4만 달러가 넘는 돈이었다.

 

드 보 신부는 두루마리가 한 곳에만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만일을 대비해 분산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문서를 처음 발견했던 목동을 찾아내 동굴이 있던 절벽을 확인한 뒤 탐사를 계속했다. 이후 동굴은 계속 발굴되었고 수백 개의 두루마리를 추가로 발견했다. 마침내 바위 아래 땅속에서 옛 도시의 흔적까지 찾아냈다. 두 겹으로 된 성벽 안에는 급수시설과 공동묘지도 있었다. 방에는 책상과 걸상이 먼지에 덮여있었고 잉크병과 붓까지 있었다. 동굴 문서들이 그곳에서 기록되었음이 분명했다. 실제로 잉크병의 잉크와 두루마리 글씨의 잉크가 같은 것으로 훗날 밝혀졌다.

 

쿰란 동굴은 1956년까지 11개가 발견되었다. 발견순서에 따라 1Q(Qumran Cave1)에서 11Q까지 번호가 매겨졌다. 600종이 넘는 문서에 두루마리 형태를 갖춘 것도 10권 이상이었다. 보존 상태는 좋았다. 건조한 사막기후가 부패를 방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각으로 발견된 문서를 짜 맞추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작업을 위해 사해문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록펠러 박물관으로 보내졌고 현재까지 그곳에 보존되어 있다.

 

현대성경의 근본자료는 마소라 사본과 70인 역 그리고 불가타 사본이다. 마소라 사본은 유다인 학자들이 필사했기에 특별 의미가 있다. 하지만 구약을 모두 담고 있는 최초사본은 레닌그라드 사본으로 AD 1008년 완성되었다. 고대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고 자음만 있기에 7세기부터 모음을 달기 시작했다. 작업을 주도한 학자를 마소라라 했고 모음이 붙은 성경을 필사했기에 마소라 사본이라 한다. 70인 역은 기원전 3세기 히브리 성경을 희랍어로 번역한 것이며 불가타 사본은 라틴말로 번역한 것이다. 사해문서는 세 사본보다 훨씬 이전 것이기에 구약성경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자료다. [2014년 12월 14일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성경의 세계] 사해 두루마리 (3)

 

 

쿰란 공동체는 기원전 150년경 에세네파가 시작했다. 그리고 기원후 68년경 반란을 진압하던 로마군에 의해 사라졌다. 이 과정에서 고문서들이 주변 동굴에 감춰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굴들은 공동체 주거지역에서 125m에서 1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사해사본과 쿰란사본은 다르다. 사해사본은 사해 주변에서 발견된 모든 문서를 말한다. 쿰란사본은 쿰란 공동체 인근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만을 가리킨다. 쿰란사본은 사해사본의 일부인 셈이다. 사본 가운데는 두루마리 형태를 취한 것이 대부분이다.

 

쿰란 공동체가 있던 곳은 현재 이스라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요르단 소속이었지만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 땅이 되었다. 이곳에는 기원전 2세기부터 성경을 필사하던 도서관과 공동식당 그리고 공장과 목욕탕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주거지역 동쪽 언덕에는 대략 1,200개의 무덤도 있다. 쿰란 공동체 사람들로 대부분 남자로 밝혀졌다.

 

사해사본 발견 전까지는 예루살렘 성전시대에 관한 히브리어 기록은 없었다. 이 시대를 알리는 문헌은 구약의 마카베오서와 요세푸스의 역사기록 그리고 신약성경으로 모두 희랍어로 기록된 것이었다. 사해사본 등장으로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을 가까이 알 수 있게 되었고 객관적 접근이 가능하게 되었다.

 

사해사본 첫 발견자는 베두인 목동이었다. 그가 발견한 두루마리가 돈이 되자 사해 주변 굴같이 보이는 곳은 모두 파헤쳐진다. 그 결과 많은 문서가 골동품 시장에 나돌았다. 이렇게 되자 전쟁 중인데도 요르단은 쿰란에 탐사대를 보냈다. 박물관장인 영국 출신의 하딩(Harding)과 도미니코 수도회의 드 보(Roland de Vaux)신부가 이들을 이끌었다. 쿰란 공동체 유적지는 이들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후 발굴팀은 사해문서를 담고 있는 3번 동굴을 찾아냈다. 동굴에는 구리 두루마리로 밝혀진 금속문서가 있었다. 내용이 공개되었는데 예루살렘 성전 금은보화와 제사에 쓰이던 그릇과 기구들을 감추어둔 72개 장소의 목록이었다. 이후 보물을 찾으려 애썼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없다. 사해사본은 1990년 9월 22일 뉴욕 타임스를 통해 세상에 처음 알려졌고 이스라엘 문화재관리국이 1991년 사진들을 공개했다. 우리나라에는 2007년 12월부터 2008년 6월까지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전시된 적이 있다. [2014년 12월 21일 대림 제4주일 ·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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