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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아가, 노래들의 노래7: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다니리라(아가 3,2)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3 조회수2,979 추천수0

아가, 노래들의 노래 (7)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다니리라(아가 3,2)

 

 

사랑을 하면 죽을 것 같아서,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에게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오”(2,14)라고 한참을 불러도, 비둘기는 몸을 숨겼습니다. 안전지대에 머물려고 했습니다. 2장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비둘기는 저녁이 되기 전에(“날이 서늘해지고 그림자들이 달아나기 전에”: 2,17) 자신에게 와 달라고 연인을 불렀습니다. 비둘기는 연인에게 나를 주고자 합니다.

 

아직 “바위틈” 밖으로 나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연인도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연인이 부르는 소리는 이미 마음을 움직여 놓았습니다. “그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2,14)라는 연인의 말이 큰 몫을 했을 것 같습니다. 여인의 아름다움을 찬란하게 노래할 4장을 미리 한 줄 흘려 놓는 듯한 그 말은, 연인이 그 여인의 아름다움을(“어여쁘다오”), 그 가치를 온전히 알아보고 있음을 이미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그 부름에 응답할 때가 되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3,1)

 

여인이 먼저 연인을 찾기 시작하는 장소는 ‘잠자리’이고 그 시간은 ‘밤’입니다(“밤새도록”: 3,1). 밤의 잠자리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두고 여러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여인이 꿈을 꾸는 것이라고 이해하기도 하고, 아직 혼인하지 않은 이 남녀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제도 면에서 설명해 보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렇게 애쓸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여인이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사랑하는 이를 찾았어도 그를 거기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거기에 없었고, 여인은 이제 사랑을 시작하면서 이미 완성된 사랑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장차 도달해야 할 것입니다. 그 완성을 바라보면서 여인은 일어나 나갑니다.

 

이렇게 찾는 대상은 “내가 사랑하는 이”입니다. 본래는 1,7에 나왔던 “내 영혼이 사랑하는 이”와 같은 표현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영혼(네페쉬, nepes)’이라는 단어가 흔히 어떤 사람을 지칭해서 대명사처럼 사용되기 때문에 여기서도 그렇게 번역한 것입니다(‘내 영혼’ = ‘나’). 그러나 “내 영혼이 사랑하는 이”라고 번역해 보면 더 강렬한 의미가 드러나지요. ‘영혼’이라는 단어는 문맥에 따라 ‘목구멍, 숨결, 영혼, 생명체, 사람’ 등으로 번역됩니다. 한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이 영혼(nepes)입니다. 그런 나의 nepes가 사랑하는 이, 바로 그를 찾고 있습니다. 어쩌면 나는 홀린 듯 사랑에 빠진 나의 nepes에 의해 움직여지는지 모릅니다.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다니리라”(3,2)

 

여인이 일어나겠다고 하는 것은 2,10의 “일어나오”에 대한 응답입니다. “일어나오”라는 연인의 목소리가 마침내 집 안에 앉아 있던 여인을 일어나게 했습니다.

 

여기서 1절로 되돌아가 한 가지 덧붙여 둘 것이 있습니다. “밤새도록”이라고 번역한 단어 문제인데, 밤이 다 새서 아침이 될 때까지라고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사용된 단어가 ‘밤들에’이고, 복수형이라고 하여 여러 밤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밤의 여러 부분을 나타낸다고 보지만 하룻밤을 새웠다는 뜻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짚어 두는 이유는, 여인이 “일어나” 돌아다니기 시작하는 것이 새벽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여인은 밤에 잠자리에서 연인을 찾았고 그 밤에 일어나 나갑니다.

 

미친 행동이지요? 네, 그렇습니다, 밤중에 연인이 밖에 나와 있을까요? 성읍과 거리와 광장을 돌아다닌다 한들 연인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3,2)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이입니다. 그렇게 찾아 나선다는 것이 처음부터 별로 전망이 없는 시도였던 것입니다. 야경꾼들의 반응 역시 여인이 무모한 짓을 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3,3)라는 질문을 야경꾼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야경꾼들은 지나가야 할 사람입니다. 사랑에 공감하지 않는 이들, 전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이 설령 그를 보았다 해도 그가 “내가 사랑하는 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사랑은 어리석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어리석지 않습니다. “일어나 … 돌아다니리라”는 여인의 말은 여인이 분명히 변화되었다고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이제는 바위틈에, 벼랑 속에(2,14) 숨지 않습니다. 밤중에 혼자 성읍을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5장에서는 비슷한 상황에서, 밤에 연인을 찾아 나선 여인을 야경꾼들이 보고는 “때리고 상처 내었으며” 성벽의 파수꾼들은 “겉옷을 빼앗았네”(5,7)라고 말합니다. 밤에 돌아다니는 여자를 창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지금 그런 위험을 겪을 수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을 나섰습니다.

 

아가는 마지막 장에 이르러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8,6)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사랑이 여인의 ‘강함’이 됩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는 말씀으로 사랑의 위력을 표현합니다. 친구들을 위해 죽을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약하고 어리석게 보이면서도 무엇보다(죽음보다)도 강합니다. 십자가의 지혜에 대하여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25)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모든 사랑이 죽음을 감수해야 하고(1코린 2장 참조)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여 그 죽음을 감수할 수 있게 한다면(1코린 3장 참조), 그런 사랑의 힘이 남김없이 드러나는 자리가 바로 십자가의 어리석음(십자가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집으로”(3,4)

 

여인은 야경꾼들을 지나서 사랑하는 이를 찾아내고는,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의 집으로”(3,4) 인도할 때까지 그를 놓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어머니의 집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자기 가족이 된다는 뜻입니다. 3장 후반에는 솔로몬으로 표현되는 연인이 가마를 보내어 사랑하는 여인을 광야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는 장면이 이어지는데, 이 두 장면이 서로 대응됩니다. 이로써 둘의 사랑은 가족 안에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아가는 누이동생의 사랑을 통제하려 했던 “오빠들”을 통해 가족이나 사회 제도가 사랑을 가로막을 수 있음을 말했지만, 그 제도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빠들”과 달리 “어머니”는 언제나 사랑에 호의적이고, “나를 잉태하신 분의 방”은 내 윗세대의 사랑의 장소이며 동시에 나의 사랑의 장소가 됩니다. 아가가 가정 밖의 사랑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라고 여인을 부르는 4,12-5,1에서는 이 남녀가 부부라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아가는 그들의 관계가 제도와 관습의 관계이기 전에 우정과 사랑의 관계라고 말하지만(아가에서 여인을 지칭하는 ‘애인’은 보래 ‘친구’를 뜻합니다), 그렇다고 제도 밖의 사랑을 칭송하는 것은 아닙니다.

 

3,6-11에서 묘사하는 행렬도 “혼인날”(3,11)을 우한 행렬입니다. 레바논의 나무로 가마를 만들어 금과 은으로, 그리고 금만큼이나 값비싼 천이었던 자홍포로 장식하고 여인을 데려오도록 60명의 용사를 보낸 ‘솔로몬’은, 사랑이 죽음임을 알면서도 그 사랑의 모험을 시작하는 여인을 자신의 사랑으로 지켜주며 신부로 맞이하는 신랑입니다. “이스라엘 용사들 가운데에서 봅힌” “역전의 전사들”이 칼로 무장하고 “밤의 공포에 대비하여”(3,8) 그 가마를 호위한다는 것 역시 사랑의 길에 위험이 따를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연인들은 홀로 있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집”으로 갈 때에 여인은 자기 연인을 꼭 붙들고 있고, 여인이 광야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에는 호위하는 요사들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 나를 사랑하는 이가 없다면 결코 할 수 없을 위험한 일을, 죽음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함께 있음’ 때문입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성 도미니코 말씀의 은사》,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2년 7월호(통권 436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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