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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요셉 이야기는 언제 쓰여졌을까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3 조회수2,978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구약] 요셉 이야기는 언제 쓰여졌을까

 

 

에집트의 요셉

 

주일 학교에서는 모든 어린이들이 에집트의 요셉 이야기에 흠뻑 빠지는 흐뭇한 정경이 해마다 되풀이된다. 누구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듯이 요셉의 사절들이 형제들을 쫓아가 곡식 자루를 수색하여 베냐민의 자루에서 부왕의 은잔을 찾아내는 순간에 이야기는 절정에 이르러 강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구약 성서의 어떠한 이야기도 에집트의 요셉에 대한 이야기처럼 어린이들을 매혹시키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지 어린이만을 감동시키지 않는다. 어른도 창세기 37~50장을 읽으면 감동한다. 주제가 그렇듯 몹시 인간적이고 구성이 그만큼 완전하므로 문학적 걸작으로서도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구약 성서가 어떤 점에서 아직도 오늘의 인간을 충분히 감동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장들에서 입증된다.

 

이 장들이 그토록 뛰어난 화술의 차원에 도달해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비평가는 특별한 관심을 갖고 이 장들을 철저히 연구하였다. 그는 거기서 우화적인 동기와 동시에 어떤 유다적인 지혜를 발견하리라 믿었다. 이 이야기가 모세 시대로부터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티나에 거주할 때인 몇 세기 후대로부터 기원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평에 의하면 우화적인 동기는 언제나 둘씩 둘씩 발생하는 꿈으로부터 통보되는 것 같다.

 

이야기 서두에서 요셉은 두 가지 신비로운 꿈을 꾼다. 에집트에서 빵을 굽는 시종장과 파라오의 술잔 시중을 드는 시종장은 모두 설명할 수 없는 꿈을 꾼다. 마지막으로 파라오 자신이 수수께끼 같은 두 가지 꿈을 꾼다. 다른 우화적인 동기는 이중의 고양(高揚)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요셉은 그의 형제들 가운데서 들어 높여지고, 나중에는 종으로서 에집트에 감금되었다가 부왕으로 승진된다.

 

그리고 지혜적인 요소가 거기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면 - 비평가는 그렇게 보았다 - 이것은 이야기가, 예 혹은 우화의 형태로, 어떻게든 역사적 진리에 사로잡히지 않고 단지 교화만을 하고자 한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세부 사항에 있어서 요셉에 관한 이야기는 구약 성서의 지혜서들과 어떤 유사점을 드러낸다. 요셉은 지혜와 신앙심의 예표다. 그는 말씀의 은사를 갖고 있고 중개자로 나타난다. 결론적으로 신은 현현도 없고 예언적이거나 기적적인 말씀도 없지만 모든 것을 명백하게 지시하신다. 이는 지혜서를 특징짓는 하나의 요소이다.

 

이러한 고찰로부터 요셉에 관한 이야기가 보다 가까운 시대의 것이라고 결론내리면서 어떤 이들은 그것이 기원한 세기를 결정하려는 모험을 감행했다. 아무튼 요셉은 자신의 승진과 함께 ‘사브낫바네아’(Zafnat-Paneach)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이것은 950~730년의 비문에 자주 나타나는 순수하게 에집트적인 이름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야기는 950년 이전에 생겨날 수 없다고 하겠다.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그 이름에 팔레스티나에까지 이르는 시기를 부여하기 위하여 기원 시기를 2세기 후인 650~550년경으로 고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와 반대로 최근 몇 해 동안에는 문제가 되는 이름과 이야기 그리고 특 그 의미와 내용에 관한 세심한 연구 덕분에, 약간의 변동 가능성은 있으나, 그 이야기가 이미 그 이전 세기에, 즉 모세가 파라오의 궁진에서 교육받았던 1300~1200년경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이것으로 벌써 요셉에 관한 이야기가 모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가능성이 드러난다. 나아가 성서는 모세가 “에집트 사람의 모든 학문을 배웠다.”(사도 7,22)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지혜적인 요소는 어떤 식으로든 모세 자신으로부터 유래 할 수도 있다.

 

이로써 정면 공격과 평가 절하의 위협을 받던 요셉에 관한 이야기는 명예를 되찾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어쩌면 보다 최근에 완성된 옛이야기이지만 그 내용은 먼 시대로부터 유래한다. 에집트적인 배경 위에 아브라함의 특별한 아들이 온갖 수난을 당한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사람이다. 그러나 전반적인 의미에서 아브라함과 다르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서 시작하신 것을 요셉 안에서 완성하신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이란 표현은 이 이야기에서 “요셉과 그의 형제들”로 대체된다. 그리고 “에집트” 사건 후에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바뀔 것이다.

 

 

“야훼의 천사가 나타났다”

 

신자라면 누구나 교리 문답을 통해 천사에 대한 이미지를 배운다. 누구나 천사의 날개는, 천사가 순수한 영으로만 이루어지고 신속한 존재임을 상정한다고 알고 있다. 실제로 천사가 날개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해도, 우리는 날개 없는 천사를 상상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천사를 설명하는 이러한 방식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교리 문답에서의 천사의 모습은 대체로 천사는 하느님께 봉사하는 피조물이라는 신약 성서의 진술로부터 취해졌다. 때때로 천사는 사람에게 파견된다. 그래서 천사 혹은 사자(使者)라 불린다. 베들레헴의 목자들 곁에 한 천사가 나타나고 천사들이 ‘하늘 높은 곳에는 천주께 영광’을 합창한다. 어떤 천사는 광야에서의 유혹이 끝난 뒤 그리스도를 시중들고 어떤 천사는 올리브 동산에서 그리스도를 위로한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무덤에는 흰옷을 입은 천사 하나가 서 있다. 천사는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하여 창조되었고, 거기에 덧붙여서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의 사자 역 할을 수행하도록 창조되었다.

 

구약 성서에서 “천사”라는 말은 종종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하느님께 봉사하는 피조물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을 가리키기도 한다.

 

에집트에서 모세가 간수들 때문에 도망쳐 나와, 광야를 떠돌다가 시나이산에 이르렀을 때, “야훼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그러자 모세가 말하였다. “저 떨기가 어째서 타지 않을까? 이 놀라운 광경을 가서 보아야겠다.” 그러자 야훼의 천사는 모세가 접근하는 것을 보고 그를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네 선조들의 하느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모세는 하느님 뵙기가 무서워 얼굴을 가렸다(출애 3.2-6). 야훼의 천사는 하느님이라 불리며, 분명히 하느님 자신이다.

 

보다 후대에 성지(聖地)에서 전쟁이 벌어졌을 때, “기드온이 …… 밀 이삭을 포도주 틀에서 떨고 있었는데, 야훼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일렀다. ‘힘센 장사야, 야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판관 6,11-12). 그래서 기드온에게 임무가 맡겨지고, 의견이 교환되며, 기드온은 하늘로부터의 징표를 요청한다. 징표를 보고 확신한 기드온이 외친다. “오, 주님 야훼여, 제가 주님의 천사를 대면해 뵈었군요!” 그러나 주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심하여라. 너는 죽지 않을 테니 두려워 말라”(판관6,22-23). 여기서도 주님의 천사가 하느님 자신인 것이 분명하다.

 

성서의 다른 구절에서도 이러한 동일성이 발견된다. 특허 보다 오래된 책에서, 다시 말해, 진술된 사실보다 후대에 쓰여졌다 해도 이스라엘의 보다 오래된 역사를 다루는 책에서 발견된다. 일단 이러한 사실이 입증되면 심지어 애매 모호하게 천사를 하느님과 동일시하는 곳도 발견하게 된다. 사래로부터 쫓겨 나와 야훼의 천사에게 위로를 받았을 때 하갈은 자기 아들에게 이스마엘(하느님께서 들어주시다)이라고 이름지었다. “네 울부짖음을 야훼께서 들어주셨기”(창세 16,11) 때문이다. 들어주신 것은 천사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다.

 

외삼촌 라반을 떠나 돌아오던 야곱은 야뽁 강가에서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을 한다. 이 씨름이 있은 뒤에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가 “하느님과 겨루어 냈기” 때문이다. 그는 씨름한 장소를 브니엘(하느님을 대변함)이라 부른다. 거기서 하느님을 대면했기 때문이다(창세 32,23-33 참조). 여기서도 야훼의 천사는 하느님 자신이다.

 

이러한 주제에 관해 고찰해 볼 때 사실은 보다 분명해진다. 하느님은 영적인 존재이시고 인간의 눈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불가견성은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개념에 의해 어려움 없이 추론된다. 하느님의 발현에 대한 언급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그분을 명백히 볼 수 없는 분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대비를 융화시키기 위하여 성서 저자는, 그리고 하느님 자신조차도, 발현을 언급하는 데 있어서 “발현의 형상”을 뜻할 수 있는 방편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 이것은 인간에게 하느님의 이미지를 조달해야만 했다. 그것은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메시지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사자 혹은 사절, 즉 야훼로부터 파견된 천사에 대해 말한다. 그러므로 볼 수 없는 분은 “야훼의 천사”라 일컬어지는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구약 성서의 인간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무엇보다 먼저 볼 수 없는 분이 아니셨고, 오히려 존엄하신 분, 군주, 거룩하신 분이셨다. 히브리적인 개념에 의하면, 빼어나게 거룩하신 분은 직접적으로 지상의 인간과 접촉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구약 성서의 저자는 하느님의 발현을 설명하기 위하여 야훼의 천사를 거룩하신 분과 죄인인 인간과의 대면을 뜻하는 데 가장 적합한 수단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성서의 다른 책들 속에서 발견하는 수많은 천사들 가운데서 성서 저자는 다른 모든 천사들의 중심에 있는 예외적인 천사를 식별한다. 바로 하느님 자신이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0년 8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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