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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성경과 도덕 해설: 하느님 나라와 도덕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2-07-01 조회수2,977 추천수1

[성경과 도덕 해설] 하느님 나라와 도덕

 

 

구약을 공부하던 저는 한때 ‘율법에 대한 사랑’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약간 바리사이 계통으로 느껴지나요? 그래서 그런지, 신약을 공부했던 어떤 신부님은 이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복음을 선포하셨는데 왜 아직도 율법에 대한 사랑을 말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글쎄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에게 율법을 받아들인 유다인에게서보다 어쩌면 더 큰 삶의 전환을 요구하지 않을까요?

 

이번 달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우리의 실천적 삶을 위하여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

 

구약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를 정의하는 핵심적인 단어가 ‘계약’이었다면, 신약에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고 그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이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구약성경에도 하느님의 나라 또는 통치라는 개념이 나타나지만, 특별히 공관복음서들에서 예수님의 선포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을 통하여 그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셨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하느님의 주권이 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병자를 고쳐주실 때에 그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힘 있게 현존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용서와 자비 안에서 하느님의 통치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특별히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그 나라가 현재적 성격과 미래적 성격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있는 것이다.”(마태 12,28)라고 말씀하시지만, 주님의 기도에서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적인 삶을 위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성경과 도덕」에서는, 이것이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적 실재가 현재의 상황 안으로 들어오고 “그 상황을 결정짓는다.”(43항)는 강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는,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그 하느님 나라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삶이 이 땅에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완성된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지금도 악의 세력은 있습니다. 아무리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 해도, 이 세상에 죄와 고통이 많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죄와 고통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태도, 곧 용서와 자비는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서광을 보여주며 우리도 또한 그 모습을 따라 살아야 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도와주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에, 또다시 무거운 계명의 의무 때문에 용서와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가치들을 거슬러, 나 자신의 편안함을 거슬러 그러한 덕목들을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 때문이고, 하느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기뻐하며 다른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산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구원의 실현이라는 것을 육화하신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셨고,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선물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께 응답하여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려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덕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봅시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권고하십니다(마르 1,15). 그리고 그 회개의 기준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예수님 그분을 우리 삶의 기준(“나를 따라오너라.”)으로 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삶의 기준은, 복음의 참행복 선언들에서 강력하게 선포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치관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을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마음이 가난해야 하고 슬퍼해야 하고….”라고 하시며 엄청난 요구들만을 내세우셨다면 그것은 수백 가지 율법보다 더 어려운 또 하나의 짐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본문이 분명 하늘나라의 헌법과 같은 것임에도 계명이라 불리지 않고 “참행복”이라 불리는 것은, 그 말씀들이 우리가 져야 할 의무들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선물인 하늘나라의 약속은 “인간의 올바른 행위에 대한 보상이라기보다 인간에게 요구된 행위가 가능하고 합리적이 되게 하는 근거와 동기로” 제시됩니다(47항). 하늘나라가 없다면,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 하늘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면, 참행복의 내용들은 우리에게도 행복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질 것입니다.

 

슬퍼하는 사람, 심지어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하늘나라이고, 이 추구가 헛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다 사라져가도, 하늘나라의 약속은 흔들리지 않고 언젠가 완전하게 성취될 것입니다.

 

 

요한 복음서

 

공관 복음서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한다면 요한 복음서에서는 자주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지요. 이 요한 복음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삶의 길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라는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도덕 모두가 “계시된 도덕”이라고 하였듯이, 요한 복음서에서도 출발점은 아버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 여러 곳에서 예수님은 “나는 …이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이 말씀들을 통해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선포하십니다. 생명의 빵이고 세상의 빛이시며,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시고 목자이시며, 부활이요 생명이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을 받아들일 때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 요한 복음서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그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수반됩니다. 스승이며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제자인 우리도 서로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13장). 같은 맥락에서 요한 서간에서도,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1요한 2,6).

 

이렇게 요한 사도가 우리에게 말하는 윤리는,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의 사랑을 뒤따르는 사랑의 윤리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성경과 도덕」 제1부에서 단락마다 강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먼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런 사랑을 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실천하라는 계명은 부조리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길이 바로 그런 사랑에 있는 것이라고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당신을 몰랐더라면 더욱 편했을지도 모르는 그런 세상”이라는 노랫말이 떠오릅니다. 복음을 산다는 건 참 엄청난 일입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이해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그 엄청난 삶을 살 수 있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놀라운 힘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 안소근 실비아 - 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가톨릭대학교와 한국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성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다.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 총무이다.

 

[경향잡지, 2012년 6월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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