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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리]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18: 세포리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6-16 조회수3,312 추천수1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18) 세포리스


세포리스(Sepphoris)는 신약성경에 전혀 언급이 되지 않는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왜냐하면 이곳이 예수님 당시 갈릴래아의 중요한 도시였고, 그분이 사셨던 나자렛과 매우 가까웠기 때문이다. 과연 몇몇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역사적 예수님은 헬레니즘적 도시인 세포리스를 잘 알고 계셨는데, 그 도시의 언어와 문화는 그분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까?


■ 위치와 지형

세포리스는 벳 네토파 계곡(Beth Netofa valley)의 남쪽과 그 위에, 그리고 나자렛에서 북서쪽으로 약 6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 도시에는 지중해 해변의 프톨레마이스(Ptolemais)와 갈릴래아 호수의 남서안에 위치한 티베리아스(Tiberias)를 연결하는 길이 지나고 있어 군사적이고 경제적인 요충지였다. 세포리스 혹은 치포리(Zippori)라는 이름은 새(bird)를 의미하는데, 이 도시가 마치 횃대에 앉은 새처럼 산등성이 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 설명은 바빌로니아 탈무드에 따른 것이다.


■ 세포리스의 역사

요세푸스에 따르면, 알렉산더 얀네우스(기원전 103-76년)가 권력을 잡은 기원전 103년에 키프로스를 다스리던 프톨레마이오스 라티루스가 안식일에 세포리스를 차지하려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유다 고대사』 13권 338) 당시 세포리스는 갈릴래아의 도시들 가운데 유일하게 견고하게 요새화된 도시였다. 기원전 63년에 폼페이우스가 팔레스티나를 점령한 이후, 시리아의 로마 총독 가비누스(Gabinus)는 기원전 55년경에 세포리스를 갈릴래아 지방의 중심 도시로 만들었다.(『유다 고대사』 14권 9) 기원전 37년경에 헤로데 대왕(기원전 37-4년)은 세포리스를 쉽게 차지하였는데, 왜냐하면 “하느님이 눈을 보내셨기” 때문이다.(『유다 고대사』 14권 9) 사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헤로데 대왕은 겨울에 눈보라가 치는 가운데 세포리스를 점령하였다. 헤로데 대왕은 세포리스에 궁전을 세웠다.

기원전 4년에 헤로데 대왕이 죽은 이후, 그의 세 아들들인 아르켈라우스(Archelaus), 헤로데 안티파스(Herod Antipas), 필립포스(Philip)가 여러 지역을 나누어 다스렸다. 갈릴래아의 영주는 헤로데 안티파스(기원전 4년-기원후 39년)였다. 기원전 4년에 에제키아스(Ezekias)의 아들 유다(Judas)는 세포리스의 궁전을 공격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유다는 사도 5,37의 “그 뒤 호적 등록을 할 때에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나서서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라는 기록에서 소개된 인물이다. 시리아의 로마 총독 바루스(Varus)는 자신의 아들을 군대와 함께 갈릴래아로 보내었다. 바루스의 아들은 유다를 처벌하였고, 세포리스를 불태웠으며 그곳의 주민을 노예로 만들었다.(『유다 고대사』 17권 289) 다른 지역에서도 유다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바루스가 직접 팔레스티나로 와서 진압하고 약 2000명을 십자가형에 처하였다.(『유다 고대사』 17권 295)

헤로데 안티파스는 세포리스 도시를 재건축하였으며 요새화하였다. 그는 세포리스를 갈릴래아의 수도로 삼았으며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아우토크라토리스(Autocratoris)라고도 불렀다.(『유다 고대사』 18권 27) 요세푸스는 자신의 문헌들에서 세포리스를 다양하게 묘사한다. 그는 세포리스를 “갈릴래아에서 가장 강한 도시”(『유다 전쟁사』 2권 511)라고 표현한다. 그는 세포리스와 관련하여, 헤로데 안티파스가 “세포리스 부근의 성벽을 쌓았고”, “나라의 중심도시로 삼았다.”(『유다 전쟁사』 18권 27)고 기록한다. 그리고 이 도시를 “온 갈릴래아의 장신구”(the ornament of all Galilee, 『유다 고대사』 18권 27)라고 표현한다.

세포리스는 제1차 유다 항쟁(66-70년) 동안 유다인들의 저항 운동에 반대하여 로마 제국의 편에 서게 되었다. 기원후 70년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세포리스는 유다 교육과 최고 의회(Sanhedrin)의 중심지가 되었다.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는 세포리스를 도시(polis)로 승격시켰다. 제2차 유다 항쟁(132-136년) 이후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는 세포리스를 디오체사레아(Diocaesarea)로 불렀는데, 이 명칭은 “제우스(Zeus)와 체사르(Caesar)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다.


■ 고고학적 발굴

여러 차례(1908년, 1931년, 1980년대)에 걸친 고고학적 발굴은 세포리스에서 다양한 유적을 발견하였다. 로마 시대의 반원형 야외 극장은 약 4000-5000명을 수용할 정도의 큰 규모이다. 이 야외 극장의 건축 시기에 대하여 고고학자들의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었다. 기원후 1세기 초반을 주장하기도 하고 기원후 2세기를 주장하기도 한다. 세포리스에서는 십자군 시대의 요새가 발견되었다. 이 요새 근처에는 기원후 3세기 로마 시대의 대저택이 발견되었다. 이곳의 연회장(triclinium) 바닥에는 돌로 만든 모자이크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특히 디오니소스(Dionysos) 제의와 관련이 되는데, 그중에서 매우 아름다운 여인의 모자이크를 학자들은 “갈릴래아의 모나리자(Mona Lisa of Galilee)”라고 부른다. 그리고 기원후 6세기의 유다교 회당이 발견되었는데, 일곱 모자이크가 인상적이다.


■ 역사적 예수와 세포리스

몇몇 학자들은 역사적 예수가 세포리스를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 도시의 건설에 참여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헬레니즘적 도시인 세포리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분의 말씀 중 “위선자(hypocrites)”라는 표현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사실 이 표현은 극장의 배우를 가리키는데, 이것을 예수님은 극장이 있던 세포리스에서 배웠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실 마르 6,3에서 “목수”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테크톤(tekton)은 단지 나무를 다루는 목수뿐 아니라 돌을 다루기도 하고 다른 기술도 가진 넓은 의미의 기술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요셉이나 예수님이 나자렛에서 가까운 세포리스에서 기술자로서 일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대로 학자들 사이에는 세포리스에서 발견된 야외 극장의 건설 시기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있다. 비록 헤로데 안티파스에 의해 작은 규모이나마 야외 극장이 건설되었다 하더라도 그 시기에 요셉이나 예수님이 그 건설 현장에서 일하셨을 가능성은 여전히 가능성만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 헬레니즘적 도시와 그 문화가 예수님의 생애와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매우 과장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의 “위선자”(마태 23,23.25.27.29)라는 표현이 세포리스의 언어와 문화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3년 6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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