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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바오로 사도를 따라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6-03 조회수3,089 추천수1

[목자의 지팡이] 바오로 사도를 따라

 

 

[1] “사랑하는 그대여, 나는 이미 피를 부어 희생제물이 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가 왔습니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날에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월계관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2디모 4,6-8).

 

한 삶을 살고 이제 죽을 때가 되어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흔히 지난 삶을 돌아보며 거기서 잘못과 실수와 상처투성이었던 나날을 발견하고 용서와 자비와 이해를 비는 것이 보통 우리네 인심인데,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으십시오”(1고린 11,1) 하고 큰 소리 칠 수 있는 배짱(?)은 어디서 생겨났을까?

 

바오로는 12사도에 들지 않지만, 그 어떤 사도 못지않은 인물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13번째 사도, 아니 예수님 다음으로 가장 훌륭한 사도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그를 두고 “예수님 다음으로 제일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잘 알게 된 아주 독특한 인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에 인용한 바오로의 말씀만을 떼어놓고 보면, 그는 어떤 처지에서도 늘 용감무쌍하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도 하느님 앞에 한 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완벽한 인간으로 자신을 의식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 반대였습니다. 그의 또 다른 말을 들어봅시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입니다.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 나는 내 마음 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로마 7,15-24). 이런 말을 들으면 바오로도 나와 똑같은 인간, 내면을 살펴보면 모순과 어두움과 약점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런 인간이 어떻게 그처럼 당당한 모습을 지닐 수 있게 되었던가?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제부터 답을 찾아 나설 화두이며, 바오로 자신의 부탁대로, 그를 본받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나갈 수 있는 단초입니다. 

 

 

[2] 모든 일은 바오로가 28세 되던 어느 날 겪은 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바오로는 이름난 도시 다르소 출신 유다인으로서 부유한 아버지 덕택에 예루살렘에 유학하여 유명한 랍비 가믈리엘 선생 아래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큰 돈이 드는 로마 시민권까지 얻었을 뿐 아니라 일찌감치 출세하여 지도자급 인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최근에 예수라는 사람이 십자가형을 받아 죽었는데, 그의 제자들이 계속 그를 따르며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는 사태를 보며, 이스라엘 정통 신앙을 수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서, 대사제의 허락을 받고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다마스커스를 향해 달리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거기까지는 약 7일이 걸리는 거리였는데,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이상한 체험을 했습니다. 거기에 관해 사도행전 9장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히 비추었다. 그가 땅에 엎드러지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 왔다. 사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시내로 들어가거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는 음성이 들려 왔다”(사도 9,3-6). 그때 사울은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앞이 보이지 않았고, 아나니아가 주님의 분부를 받고 사울에게 와서 손을 얹고 성령을 내려 줄 때에야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바오로에게 천지개벽과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사로잡기 위해서” 다마스커스로 가던 길에, 오히려 “그리스도께 사로잡힌”(필립 3,12 참조) 바오로에게는 모든 것이 뒤집어졌습니다. 이제까지의 세계는 한 순간에 무너지고 전혀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습니다.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된” 일은 바오로의 내면세계에 일어난 극적인 변화를 나타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하시는 분을 만나 그 빛으로 다시 보니, 지금까지는 암흑 속에서 살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에페 5,8) 하는 말은 바오로 자신의 경험을 반영합니다. 그 자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육에서 영으로(갈라 6,5,16-25 참조), 어리석음에서 지혜로움으로(1고린 1,18-25 참조), 예속에서 자유로(갈라 5,1-13참조), 밤에서 낮으로(1데살 5,1-10 참조), 묵은 인간에서 새 인간으로(로마 6,6; 2고린 5,17 참조) 바뀌었던 것입니다.

 

 

[3] 이런 엄청난 변화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바오로에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이런 변화가 자신의 노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이었습니다. 당대 가장 유명한 율법교수 가믈리엘의 문하에서 정통으로 조상들의 관습과 율법을 배웠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고 수호하는 일에 온 삶을 바치고 있던 바오로에게, 이 사실은 마른 하늘의 벼락천둥보다 더한 충격이었습니다. 믿었던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굳건히 몸을 받쳐주던 땅이 꺼지는 놀라움이었던 것입니다. 바오로는 스스로 물었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내 삶은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 많은 공부, 목숨을 건 희생과 실천, 한 마디로 율법에 따라 철저히 살려고 애써온 지금까지의 노력은 모두 허사였더란 말인가?”

 

바오로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13년에서 17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서 깊이 생각하고 묵상한 끝에 도달한 결론은 놀랍게도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해물로 여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해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내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필립 3,7-12).

 

 

[4] 이스라엘 백성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 노력해왔고, 특히 바리사이파에 속한 사람 가운데에서도 가장 열성적인 인물의 하나였던 바오로 자신이 온 삶을 바쳐 수호해왔던 율법에 관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 율법은 끝이 났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로마 10,4).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단언합니다. “율법을 통해서 의로움이 이루어진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보람도 없이 돌아가신”(갈라 2,21 참조) 셈이 되고,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는 꼴이 됩니다”(갈라 2,21;5,4 참조).

 

바오로의 생각에, 이스라엘 최대의 비극은 이 점을 깨닫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추구하지 않던 이방인이 오히려 그 올바른 관계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법을 추구하였지만 끝내 그 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믿음을 통해서 얻으려 하지 않고 공로를 쌓음으로써 얻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그들은 그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성서에, ‘자 이제 내가 걸림돌 하나를 시온에 놓으리니 사람들이 걸려 넘어질 바윗돌이라. 그러나 그를 믿는 사람은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하신 말씀대로입니다”(로마 9,30-33).

 

그렇습니다. 바오로가 보기에, 인간의 노력을 바탕으로 하는 율법의 시대는 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제는 인간의 노력과 아무 상관없이 하느님께서 그 무한한 사랑으로 퍼부어주시는 은총의 시대가 왔습니다. 율법 자체는 하느님의 뜻을 전해주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율법은 본래 내걸었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율법이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룩하셨습니다.” 그 일을 어떻게 이룩하셨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어 그 육체를 죽이심으로써 이 세상의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로마 8,3).

 

이것이 바오로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죄를 없이 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이 사실은 너무나 뜻밖이었습니다. 과거의 어떤 전통이나 지혜를 다 동원해도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천지 창조 이전부터 미리 마련하여 감추어 두셨던 지혜입니다. 이 세상 통치자들은 아무도 이 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에는,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1고린 2,7-9). 이 지혜는 너무나 깊고 높고 인간의 상상을 까마득하게 뛰어넘기 때문에, 인간적 지성이나 상식에만 기대서는 도저히 가 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 지혜를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1고린 2, 10). 

 

깊은 구렁 속에 빠진 사람이 자신의 두 귀를 잡고 거기서 빼낼 수 없는 것만큼이나, 인간은 아무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성인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인이라면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처지에 있는지를 더 예민하게 의식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손길은 위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지만 나는 위에서 왔다”(요한 8,23) 하시는 분이 우리를 끌어올려 “높은 곳에 살게 해 주셔야”(필립 3,14) 우리는 비로소 위로 솟아오를 수 있습니다. 바오로는 천지가 개벽되는 놀라움과 함께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5] 그런데 이 진리를 깨달은 것은 바오로만이 아니었습니다. 바오로와 함께 교회의 두 기둥을 이루어, 우리가 축일도 같은 날에 지내는 베드로 사도 역시 자신이 통째로 없어지고 무너지는 경험을 통해서 이 진리에 도달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죽음을 바로 앞두고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함께하던 때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식탁에서 일어나시더니 갑자기 겉옷을 벗으시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신 다음,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얼떨결에 당하다시피 발을 내 놓았지만, 베드로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야를 들고 오셨을 때 그는 말씀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는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지금은 모르지만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안 됩니다. 제 발만은 결코 씻지 못하십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깜짝 놀랄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이제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

 

그날 저녁에 예수님께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그 가운데는 이런 것도 있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이제 잠시뿐이다. 내가 가면 너희는 나를 찾아다닐 것이다. 일찍이 유다인들에게 말한 대로 이제 너희에게도 말하거니와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그때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은 내가 가는 곳으로 따라 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따라 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베드로를 무너뜨린 것은 그의 이 장담에 대해 주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이 글자 그대로 이루어진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새벽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일은 예수님의 예언에 따라 무서울 정도로 정확히 전개되었고, 베드로는 목숨을 바치기는 고사하고 하녀들의 말 한 마디에 스승을 연거푸 세 번씩이나 배반할 만큼 완전히 무너져 내린 자신의 모습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수제자로서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더 갈 수 없을 만큼 유약한 자신의 몰골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자신 안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는 것”(로마 7,18)을 소름끼치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뒷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을 체험하면서 그날 저녁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깨달았습니다. 

 

 

[6] 먼지가 많은 지방이었기 때문에, 길을 걸은 다음에는 발을 씻을 필요가 있었지만, 그것은 너무 천한 일이기 때문에, 자기의 종이라 해도 그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면 시킬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일을 종도 아니고, 동료도 아닌, 스승께서 몸소 하시겠다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서 들고 오시는 모습을 차마 견딜 수 없어 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때 왜 그렇게 하시는지는 당장으로서는 깨달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그 수수께끼는 뜻밖의 방법으로 풀릴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오후 3시 경, 예수님께서는 대야에 담긴 물이 아니라, 당신의 몸에 담긴 피를 다 쏟아서 베드로와 열두 제자뿐 아니라 온 인류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허리에 두르셨던 수건이 아니라, 당신의 살덩이로 닦아 주셨습니다. 요컨대, “하느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줍니다”(1요한 1,7). 

 

그리고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하고 말했을 때, 그가 거짓말을 했거나 지키지 못할 줄을 뻔히 알면서 괜히 허풍을 떨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진정 그렇게 하고 싶었고 그럴 용의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로마 8, 3), 실제 상황에 들어갔을 때, 그는 몸이 마음과는 전혀 달리 움직인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날의 경험은 그리스도교의 바탕이 되는 진리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우리 하나 하나)가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우리 하나 하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실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나중에”(요한 13,36),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해 바치신 목숨이 사랑의 힘이 되어 성령으로 그 안에 들어온 다음에야 가능하게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도 바오로 못지않게 인간이 자신의 노력이나 공로로 구원을 쟁취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7] 결국 교회의 두 기둥이 깨달은 것은 같은 진리였습니다.

 

“자유, 생명, 기쁨, 평화, 한 마디로, 구원은 주어진다는 것.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얻어 성령으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 그 앞에서는 죄인과 성인이 따로 없다는 것, 가장 위대한 성인도 자신의 공로나 노력으로 그것을 얻지는 못한다는 것, 아무리 철저하게 고장난 인간이라도 그 앞에서 절망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 하느님께서는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 없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죽음만을 보시고 모든 사람에게 무죄 선고를 내려 주셨다는 것, 그래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누구나 이 기쁜 소식을 분명히 들을 권리가 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이 기쁜 소식을 목청껏 외쳐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완전히 거저 주어지는 것이며 그것이 대가를 요구한다면 그 대가는 이미 지불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그 대가로 지불하셨습니다. 한편 구원이 비싼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값비싼 것이며, 그래서 어차피 거저 얻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철저히 공짜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햇빛과 공기와 물만큼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너무나 귀중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공짜로 얻게 마련하셨습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비싼 대가와 철저한 공짜 사이에 무엇인가를 끼워 넣으려 드는 시도를 우리는 일단 접어두어야 합니다.

 

우리도 마땅한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걱정도 접어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무엇인가 기특한 일을 했기 때문에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먼저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비로소 무엇인가 그럴듯한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이것이 그리스도 신앙의 놀라운 특성입니다”(이병호, 생명을 주는 힘이신 성령,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82-85쪽). 

 

그렇다고 바오로가 은총에만 기대어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나태한 생활을 했습니까? 그와는 정 반대입니다. 바오로 사도만큼 일분일초도 허비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산 인간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어떤 장애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그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거짓 사도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들입니까? 미친 사람의 말 같겠지만 사실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는 그들보다 낫습니다. 나는 그들보다 수고를 더 많이 했고 감옥에도 더 많이 갇혔고 매는 수도 없이 맞았고 죽을 뻔한 일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고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표류한 일도 있습니다. 자주 여행을 하면서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도시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가짜 교우의 위험 등의 온갖 위험을 다 겪었습니다. 그리고 노동과 고역에 시달렸고 수없는 밤을 뜬눈으로 새웠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은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제쳐 놓고라도 나는 매일같이 여러 교회들에 대한 걱정에 짓눌려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우가 허약해지면 내 마음이 같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어떤 교우가 죄에 빠지면 내 마음이 애타지 않겠습니까? 내가 구태여 자랑을 해야 한다면 내 약점을 자랑하겠습니다”(2고린 11,23-30).

 

바오로 사도가 자기 하는 일에 이처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할”(마르 12,30) 수 있었던 것, 그 자신의 표현대로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킬”(2디모 4,7) 수 있었던 것은, 공로를 쌓음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런 확신 <때문에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모든 성인들이 이를 증언하고 있고,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철저하게 그런 정신과 마음으로 사신 분이었습니다. 교회에 전해 오는 가장 오래고도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 찬가중 하나가 이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필립 2,5-11).

 

그러므로, “목에 힘을 빼라. 어깨에 힘을 빼라.” 테니스, 골프, 권투 등, 힘을 한 곳에 모아 최대로 발휘할 필요가 있는 운동선수들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런 말을 듣습니다. 이 말이 운동선수에게 진리를 담고 있다면, 신앙인들에게는 억만 배나 더 큰 진리를 드러냅니다. 우리가 자신에게서 힘을 빼면 빼는 그만큼 “위에서 오는 힘”(루가 24,49), 곧 성령이 그 자리를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베드로가 이 점을 온몸으로 깨달았고, 예수님께서는 삶 전체를 통해서 그 진리를 살아내셨습니다. 

 

[쌍백합, 제22호, 2008년 가을호,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천주교 전주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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