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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성경 속의 여인: 가나안 여자 - 예수님도 두 손 든 끈진길 간청 · 애원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6-03 조회수3,242 추천수1
[성경 속의 여인] 가나안 여자

예수님도 두 손 든 끈진길 간청 · 애원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을 하시다가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지중해 동쪽 연안에 있는 티로와 시돈 지방, 그러니까 이방인의 지역에 들어가신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가신 이유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갈릴래아와 다른 곳에서 찾아왔던 많은 군중을 피하여 잠시 조용한 휴식을 취하시고 싶었기 때문이다(마태 15,21 참조).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면 항상 많은 사람들이 쇄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휴식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예수님의 명성은 이미 페니키아 지역에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방인 지역에서도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가나안(마르코복음은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이 그분에게 다가와 악령에 의해 고통을 겪는 딸을 제발 도와달라고 간청할 수 있었겠는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22절)라는 그녀의 간청은, 그녀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분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음을 잘 드러낸다.


부담스런 여인

유다인이 외국인과 공개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일은 예수님의 시대에 신심 깊은 유다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무척 불쾌한 일이었다. 유다인 남자가 이방인 여자와 대화를 나누는 일은 더더욱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방인 여자가 백주대낮에, 그리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거리에서 큰소리로(소리를 지르며) 예수님께 간청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지나칠 정도로 끈질기게 간청하고 있다. 여인의 이런 간청은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님께서 깊고도 고요한 휴식을 취하고 계셨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그만큼 절실한 가나안 여인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가?

이런 간청에 예수님께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신다. 가나안 여인에게 한마디 대답도 하지 않으신다. 침묵하신다. 우리가 알고 있던 바와는 다르게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불쌍한 사람과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귀를 전혀 기울이지 않으신다.

하지만 가나안 여자가 계속 소리를 지르며 따라왔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십사하고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린다. “우리 뒤에서 저 여자가 자꾸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23절).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여정을 자꾸만 부담스럽게 하는 여인을 빨리 돌려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이렇게 거절하신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24절).

사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의 메시아 전통 안에서 자라셨고, 적어도 공생활 초창기에는 이스라엘의 구원만을 위해 파견되었다고 분명하게 확신하셨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가나안 여자의 간청이 그렇게 절실하고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을 것이고, 거듭되는 그녀의 간청이 오히려 귀찮았을 것이다.


집요하고 재치 있는 대화

이런 거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단호하고 명시적인 거절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여자는 뒤로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럴수록 그녀는 더 집요하게 간청한다. 그녀는 이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여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25절) 하고 애원한다.

이렇게 집요하게 간구하는 여인의 태도는 당시에 특히 여성에게 요구되었던 수줍고 소극적인 겸손의 태도를 크게 벗어난 행동이다. 이런 점을 문제 삼을 수도 있겠지만,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이 복음의 메시지에 더 바람직하다. 도대체 왜 가나안 여자는 그렇게 행동하는가? 쉽게 포기하지 않고 왜 집요하게 애원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마귀가 들린 자기 딸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딸이 아주 어려운 상황에 빠져 큰 고통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딸을 사랑하는 어머니로서 다급하고 끈질기게 간구할 수밖에 없었다.

가나안 여자는 딸을 사랑하기 때문에 딸이 겪고 있는 고통을 모르는 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전히 자기 자신의 고통으로 생각한다. 딸의 슬픔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딸이 주변으로부터 받는 비난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께 “주님, 제 딸을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구한 것이 아니라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25절) 하고 청한다. 그만큼 딸을 사랑하고 딸과 하나 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어떤 어머니가 자기 자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시도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딸의 치유를 위해 모든 것을 내걸고 애원하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시는가? 이때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상당히 충격적이고 큰 실망감을 안겨주는 말씀을 하신다. 어떤 의미에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혹하게 들린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26절). ‘강아지’는 예수님의 시대에 유다인이 이방인을 비꼬아 지칭했던 욕설과 같은 단어이다. 이에 비해 유다인은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자녀로 생각했다.

이처럼 모욕적인 거절의 표현은 오히려 애원하던 여인을 무안하게 만들고, 그 결과 입을 완전히 다물게 하여 침묵의 도가니에 빠지게 할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가나안 여인은 그런 거절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함께 계속 끈질기게 대화를 나누는 용기가 있었다. 가나안 여인은 용기와 끈기만이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겸손과 무한한 신뢰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이방인 여자는 먼저 이렇게 대답한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의 논증을 재치 있게 수용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응수한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한계를 극복하는 믿음은

가나안 여인은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녀는 딸에 대한 큰 걱정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좋습니다. 저는 당신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연명하는 강아지입니다. 제발 저와 제 딸이 살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예수님께서 생명을 구원하시는 권능을 지니고 계시다는 그녀의 믿음은 놀라울 정도로 확고하다. 이런 믿음은 이방인으로서 그리고 여인으로서 그녀가 지니고 있던 한계를 완전히 넘어서게 한다. 이런 믿음은 마침내 예수님께 깊은 감명을 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간청을 들어주신다. 예수님께서 일단 거부하셨던 것을 나중에 들어 허락하신 일은 복음서 전체 가운데 이 사건 하나뿐이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28절).

예수님께서 용기 있는 가나안 여인과의 만남에서 무엇인가 결정적인 것을 배우셨다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는가? 이 이방인 여인은 예수님께, 그분의 사명이 길 잃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돌보는 일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그녀는 참으로 겸손한 태도와 현명한 말을 통해서 예수님께 구원을 베푸는 은총이 모든 이를 위한 것이어야 하고, 또 그래야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열린 자세로 무엇인가를 배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예수님께 결국 결정적인 것은 유일하게 믿음뿐이다. 이런 믿음은 유다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사이에 가로 놓인 모든 한계를 넘어서게 한다.

[쌍백합, 제21호, 2008년 여름호, 김선태 사도요한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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