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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성경 속의 인물: 솔로몬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2-10-03 조회수2,898 추천수1
[성경 속의 인물] 솔로몬 (1)


다윗의 일생은 파란만장하였다.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것만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노년의 다윗은 자신의 삶을 회한으로 돌아보며 ‘아들 치세’에는 평화가 넘치기를 기원하였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지었다.(1역대 22,9) 이렇듯 솔로몬은 ‘평화’와 연관된 이름이다.

그는 통일 이스라엘의 세 번째 임금으로 화려하게 등극한다. 신도시 예루살렘 출생에다 다윗과 밧 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기에 모든 면에서 새로웠다. 더구나 그는 21세의 젊은이였다. 하지만 솔로몬을 지지하는 신진세력들은 불안했다. 솔로몬의 이복형인 ‘아도니야’가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보수진영의 후원을 업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아도니야는 밧 세바에게 청을 넣는다. 말년의 다윗을 도왔던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내로 달라는 청원이었다. 오갈 데 없는 아비삭을 거두어 살겠다는 뜻일 수 있었다. 하지만 솔로몬의 지지자들은 달리 해석하였다. 다윗의 후궁을 요구하는 것은 다윗의 왕권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고 본 것이다. 그들은 솔로몬을 설득하여 아도니야의 목을 치게 했다.

그리고는 아도니야를 지지했던 제사장 ‘에브야타르’를 파면하고 그 자리에 ‘차독’ 사제의 임명을 건의했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당시 제사장은 제관 계급의 수반으로 성전에 관한 모든 권한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사장은 세습제였다. ‘에브야타르’는 사무엘 시대의 제사장 ‘엘리’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권한이 ‘차독’ 가문으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차독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성별했던 사제였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자 아도니야 편에 가담했던 군 사령관 ‘요압장군’은 성전의 ‘제단 뿔’을 붙잡고 선처를 호소했지만 그 역시 살해되고 만다. 남아있던 사울세력의 구심점인 ‘시므이’에게는 가택연금이 내려지고 주거는 예루살렘으로 국한되었다. 하지만 그마저 3년 뒤에는 처형되고 만다. 이렇게 해서 솔로몬을 위협하던 정적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으로 40년을 통치했다.(B.C. 961-922)

솔로몬 치세의 이스라엘은 정치 경제 군사 면에서 안정을 누리던 시기였다. 이집트는 자국의 정치적 혼란으로 세력이 약해 있었고 북쪽의 아시리아 역시 제국으로서의 세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틈새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티나의 약소국가들을 모두 정복했고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솔로몬은 전성기를 인식하고 숙원사업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 시작한다. 즉위 4년 2월에 착수하여 11년 8월에 완공하는 대역사였다. 봉헌식 때 그는 제물로 황소 2만 2천 마리와 양 12만 마리를 바쳤다.(1열왕 9,63) 풍요와 자신감이 넘쳤던 솔로몬의 모습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2009년 3월 15일 사순 제3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신부)]


[성경 속의 인물] 솔로몬 (2)


솔로몬은 즉위 4년 2월에 성전건축을 시작하여 11년 8월에 완공했다. 7년에 걸친 대역사였다. 오늘날 ‘제1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부르는 건물이다. 400년 가까이 이스라엘의 정신적 모체로 있다가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의 침공으로 파괴되었다. 하지만 바빌론 유배 이후 다시 재건되었다. 유다인들은 이 성전을 ‘제2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부른다.

성전 건축은 다윗시대에 구상된 일이다. 그는 12지파를 통합해 강력한 국가로 만들려 했다. 하지만 지파들은 쉽게 따라주지 않았다. 오히려 사울을 지지하는 연합체를 만들어 반발했다. 당시의 12지파는 일종의 ‘부족국가’였던 것이다. 다윗은 지파의 공식예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의 ‘합동예배’를 지시한다. 구심점을 없애 부족국가를 와해시키려는 정책이었다.

그러면서 중앙집권을 위한 대규모의 성전을 계획했던 것이다. 다윗 집권 때의 성전은 ‘이동식 성전’이었다. ‘계약의 궤’를 모신 장소(지성소)를 중심으로 설계된 천막성전이었다. 그나마 ‘스켐’과 ‘실로’로 옮겨 다니던 것을 다윗이 예루살렘에 정착하도록 명했던 것이다.

특히 ‘실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기 이전부터 그곳 사람들이 신성시 하던 땅이었다. 이런 곳에서 제사를 못 드리게 했으니 다윗은 당연히 웅대한 성전을 지어야 했다. 훗날 ‘히즈키야 왕’은 아시리아의 침공을 대비해 실로에 큰 못을 만들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실로암’ 못이다.

솔로몬의 성전건축 이후 예루살렘은 지파들의 연합을 드러내는 상징이 된다. 다윗의 계획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솔로몬은 만족하지 않고 다윗왕조의 위용을 드러내는 왕궁건설을 계획한다. 자신감이 넘쳤던 그는 세속군주로서의 진입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예산이 부족했다.

재정 마련을 위해 솔로몬은 이스라엘을 12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세금 징수를 의무화한다. 다윗이 와해시키려 했던 12지파를 다시 봉합시킨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에게는 부역을 의무화 시켰다. 당연히 반발이 있었다. 더구나 솔로몬은 돈이 모자라 티로 임금 ‘히람’에게 이스라엘의 영토 일부를 팔기까지 했던 것이다(1열왕 9,11).

하지만 솔로몬은 멈추지 않았다. 인근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강화했고 막강한 세력과는 혼인관계를 맺었다. 왕궁에는 이국 여인들이 넘쳤고 그들과 함께 ‘낯선 문화’가 들어왔다. 예루살렘에는 빈부차가 심화되었고 사회균열의 조짐이 나타났다. 예언자들이 우려했던 상황이 현실화 된 것이다. 훗날 ‘왕국 분열’의 결정적 씨앗은 이때 만들어진다. [2009년 3월 22일 사순 제4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신부)]


[성경 속의 인물] 솔로몬 (3)


말년의 솔로몬은 실수를 거듭한다. 성경에서 그토록 예찬했던 지혜는 없었다. 주님의 은총이 떠났기 때문이다. 인간의 명석함은 한계가 있다. 그 이상은 주님께서 끌어주셔야 한다. 그런데 솔로몬은 간과한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수많은 여인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정신적으로 황폐해 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록에는 왕족출신 아내가 700명, 후궁이 300명이었다.(1열왕 11,3) 물론 과장된 숫자다. 하지만 그만큼 많았다는 것을 뜻한다. 대부분 정략혼인이었다. 자연 이국 문화가 왕궁에서 성행했고 후궁들은 공공연하게 자신들의 ‘종교의식’을 거행했다. 그래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솔로몬은 왕비와 후궁의 청을 받아들여 예루살렘 동쪽에 그들의 신을 위한 신당을 짓기도 했다. 율법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동이었다.

그러는 사이 솔로몬은 ‘국제 무역’에 손을 댔고 성공을 거두었다. 장사에 천부적인 유다인의 기질이 드러난 것이다. 차츰 그는 ‘해상권 장악’에 나섰고 이집트와 아라비아 사이의 지리적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오가던 모든 물류에 손을 댄 것이다.

그는 홍해 인근에 물류를 전담할 항구를 건설했고 조선소까지 만들어 ‘무역선’을 확보했다. 아무도 그의 프로젝트를 방해할 수 없었다. 이 무렵 ‘스바(Sheba)’의 여왕이 찾아왔다. 그녀의 방문 목적은 외교 담판이었다. 솔로몬의 ‘해상루트’를 이용해 ‘스바국의 특산물’을 홍보하고 싶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무역협상을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한 셈이다.

스바 왕국은 아라비아 반도의 남쪽 끝에 있었다. 지금의 ‘예멘’ 부근이다. 기원전 950년부터 115년까지 800년 이상을 존속했던 국가다. 전성기에는 영토가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를 포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왕에 대한 기록은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에 자세하게 나오며, 그녀의 이름은 ‘빌키스’로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구체적인 인물이다.

이렇듯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모든 임금 가운데 가장 뛰어난 외교가였고 경제 전문가였다. 하지만 그는 세속군주가 아니었다. 대사제 ‘차독’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의 선조였다. 그러기에 끝까지 우상숭배에 빠지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은 또한 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길이었다.

그런데 솔로몬은 시돈 사람들이 섬기던 ‘아스타롯’과 암몬 사람들의 토속신 ‘몰락’을 위해 신당을 짓고 향을 피우며 제물을 바치는 잘못을 저질렀다.(1열왕 11,8) 이국 여인이었던 아내의 권고에 따른 행동이었지만 자만에 빠진 결과였다. 솔로몬의 노년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2009년 3월 29일 사순 제5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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