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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6: 저자는 사라지고 본문은 남는다 - 문학비평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5-05 조회수2,445 추천수1
[신앙의 해 · 창간 86주년 기획 - 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 (6) 저자는 사라지고 본문은 남는다 - 문학비평

본문 구성 요소 · 구조 등 중점 분석하는 ‘문학비평’


오늘날의 세대는 역사비평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한편으로는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여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한계점들을 비판한다. 어떤 경우이든 역사비평은 이미 ‘기존의 것’이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역사비평이 얼마나 풍파를 겪으면서 받아들여진 것인지도 잊어버렸고, 또 역사비평이 올바른 성경 이해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도 충분히 인정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우리가 지동설을 믿는다고 해서 갈릴레이처럼 재판을 받지 않는 것은 역사비평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화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창세기의 문학 유형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 본문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가 한때는 신앙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실상 그러한 연구는 진정한 의미에서 성경 본문의 자구적 의미, 즉 성경 저자가 사용한 표현을 통하여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도록 도와 주었다.

그러나 본문의 기원을 찾아가던 연구의 ‘흐름’은 스스로 다른 방향으로 물꼬를 틀어 놓게 되었다.

연구를 계속하다 보니 본문의 저자가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구약성경의 경우, 한 본문에 대해서 고정된 한 사람의 저자와 그의 고정된 시대 배경을 규정지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본문 자체가 오랜 형성 과정을 지니고 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래서 본문의 역사를 생각하고 여러 편집 단계들을, 여러 편집자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본문의 기원만을 묻는 것이 아니라 기원에서부터 시작해서 우리 눈 앞에 있는 본문에 이르기까지 거쳐온 과정을 물어야 했다. 이것은 적지 않은 변화이고, 앞으로의 ‘흐름’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었다.


■ 본문의 형성

기원을 찾아 본문을 파고 든다면, 복음서의 경우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찾아야 하고 예언서의 경우 예언자 자신이 선포한 내용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역사비평 방법이 처음 발전하던 때에는 언젠가 이런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많은 성과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과연 그러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고, 둘째는 과연 그것이 성경 해석의 목표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1993년에 나온 교황청 성서위원회 문헌 ‘교회 안의 성서 해석’에서는 역사비평의 큰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역사비평 방법의 고전적 사용은 한계가 있다. 이 방법은 성서를 낳은 역사적 상황 안에서만 성서 본문의 의미를 탐구하는 일로 스스로를 제한하고, 성서적 계시와 교회사의 나중 단계에서 드러난 의미들의 다른 가능성들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I, 가, 4)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역사비평의 ‘고전적’ 사용이라고 조건을 달았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역사비평 자체가 점차로 그러한 한계에 대처해 나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역사비평은 일반 사료를 대하듯 중립적 태도로 본문을 대하려 하고, 가능한한 객관적 관찰자로서 본문에 접근하려 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론적 원칙들을 엄격하게 적용하다 보면, 해석자가 읽고 있는 것은 성경 본문이 아닌 그 이전 단계의 본문들이 되어버릴 수 있다.

모세오경이 ‘야훼계’, ‘엘로힘계’, ‘신명기계’, ‘사제계’의 네 문헌들이 편집되어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해석자는 창세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를 해체시켜 본문이 형성되기 전에 있었던 문헌들을 떼어서 읽는 결과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이 아니다. 성경의 형성 과정을 깊이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으로서 매우 유익한 과정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성경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역사비평의 발전과정 자체에서도 드러나게 된다. 본문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그 본문 자체가 여러 편집자들의 손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재해석되었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다시 예언서들의 예로 돌아가 보자.

구체적인 한 예언자가 구체적인 한 시대에 구체적인 한 상황에서 말씀을 선포한다. 역사비평은 그 예언자, 그 시대, 그 상황을 알려고 한다.

그런데 본문의 역사는, 그 구체적이었던 말씀이 이후의 다른 여러 시대, 여러 상황들 속에서 계속해서 새롭게 해석되었고 처음에 예언자가 생각했던 의미만이 아닌 다른 의미들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처음에 그 예언자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이들에게 전달하려 했던 의미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이후에 본문이 지니게 된 의미들은 버릴 것인가?

“좋다, 그것이 본래의 의미다”라고 생각할 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독자는 올가미에 걸린 것이다!

기원전 8세기에 이사야 예언자가 아하즈를 만나 주고받은 대화와 66장으로 구성된 이사야서,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성경인가? 물론 후자다. 이사야서 66장 가운데 최소한 27장은 이사야 예언자가 쓴 것이 아니라 해도, 이 둘 가운데 ‘성경’이라고 정의되는 것은 후자다. 이것이 바로 역사비평이 주의해야 할 부분이었고 성경 해석이 역사비평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이유다.


■ 최종 본문에 대한 문학적 연구

다음으로 나타난 것이 문학비평인데, ‘문학비평’이라는 말은 쓰기가 어렵다. 같은 표현이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역사비평의 일환으로 성경 저자 내지 편집자가 책을 엮는 데에 사용한 자료들을 구분해 내는 것을 지칭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눈앞에 있는 본문의 구성 요소와 구조 등을 분석하여 본문이 전달하는 의미를 찾아내는 것을 지칭하기도 한다. 지금부터 말하려는 것은 두 번째 의미의 문학비평이다.

역사비평에서는 저자가 중요했다. 문학비평은 이 점에서 생각을 달리했다. 반대쪽 끝으로 가서, 지금 내 앞에 있는 본문에 집중했다.

역사비평이 18~19세기 역사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면, 문학비평은 19~20세기 구조주의 언어학을 배경으로 발전되었다. 스위스 언어학자 F. 드 소쉬르(de Saussure)에게서 비롯된 구조주의 언어학은 언어를 그 자체로 완전한 하나의 구조로 보았다. 말하자면, 언어를 외부적인 요소들에 의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이 그 자체 안에서 모든 것이 설명되는 하나의 독립된 세상과 같이 보았다는 것이다.

그는 언어의 한 요소는 그 언어 안의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 안에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이것은 이전에 주로 하던 것처럼 역사적인 변천을 설명하지 않고서도 언어의 여러 현상들을 설명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역사비평이 먼저 성경 연구에서만 시작된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 그리스-로마의 고전 문학 연구에서 먼저 싹텄던 것과 마찬가지로 구조주의 비평도 성경 연구가 아닌 일반 문학 연구에서 먼저 적용되었다. 여기에서는 본문의 역사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역사비평의 관심사는 본문 이전의 세계, 본문의 배경에 깔려 있는 세계였다. 그러나 문학비평에서는 그 세계를 배제한다.

본문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는 묻지 않는다. 최초의 저자가 아니라 최종 본문의 저자라 해도 어쨌든 저자는 본문 이전에, 본문 뒤에 있는 것이었다. 눈을 뜨고 바라볼 것은 본문, 오직 본문뿐이다. 그 자체 안에서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석 방법들은 본문과 독자 사이의 역사적 간격을 극복하게 해 준다. 역사비평은 본문을 먼 과거의 독자들을 위한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데에 비하여, 문학비평은 오히려 본문을 그 본문이 생겨난 과거에서 떼어낸다. 본문이 저자에게서 해방된다고나 할까?

독자가 본문에서 읽어내는 내용은 저자가 생각한 것과는 다를 수도 있는데, 저자가 전달하고자 한 의미보다 본문 자체가 독자에게 전달하는 의미에 더 중점을 두는 이러한 해석 방법은 사목적으로 큰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의 장점은 동시에 단점이 되기도 한다.

다른 문학 작품을 분석하는 방법을 성경에 적용하는 데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방법들의 부분적이고 개별적인 한계점들보다도 계시의 역사적 성격이다.

성경 해석에서는 “성서는 현실 위에 주어진 말씀이다. 하느님께서는 역사 안에서 이 말씀을 하셨고 인간 저자들의 중개로 오늘 우리에게 그 말씀을 하신다”라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교회 안의 성서 해석」, I, 나, 3).

성경은 인간이 역사 안에서 하느님을 만났음을 증언한다. 문학비평이 만일 역사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계시의 육화적 본성을 잊어버릴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를 방법적으로 배제한다는 것은 성경 해석이 하느님께서 성경 저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라는 정의 자체와 충돌할 수 있다.

성경 해석자가 일차적으로 물어야 하는 것은 저자이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데에 있다.

* 안소근 수녀는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성서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한국 가톨릭교리신학원 가톨릭신학연구실장으로 봉직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3년 5월 5일, 안소근 수녀(성도미니코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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