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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 해설4: 신약에 비추어 구약을 읽는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5-03 조회수2,524 추천수1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 해설

신약에 비추어 구약을 읽는다


지난 석 달 동안 다루었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주 간단합니다. 신약에게 구약은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은 그 구약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한마디 덧붙이면,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는 같은 토라, 예언서, 성문서를 성경으로 받아들이면서 서로 다른 전통 안에서 이들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유다인들이 성경으로 간직해 온 그 책들을 그리스도교에서는 어떤 전통 안에서 어떻게 읽고 있는지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구약 - 낡은 계약?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커다란 차이점은, 유다교에서는 구약성경 이후의 미쉬나, 탈무드 등이 구약성경과 같은 권위를 갖는 것이 아닌 데 비하여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약성경이 구약성경과 대등하게 경전으로서 권위를 갖는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 신약은 구약을 해설하고 생활에 적용하는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닙니다. 신약 없이 구약만 가지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 명백하지요. 그렇다고 구약을 버릴 수도 없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일각에서는 구약에 대한 긍정적 이해를 강조하려고, ‘구약(舊約)’이라는 단어 대신 ‘첫 번째 계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려 합니다. 언어에 따라 어감의 차이가 있는데, 어떤 언어에서는 구약이 과거의 것, 지나간 것, 케케묵은 것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유래한 구약이라는 말에는 본래 그런 부정적인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 31,31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새 계약을 맺어주겠다.”고 약속하시지요. 우리는 그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우리의 신약을 새 계약, ‘신약(新約)’이라고 하는데, 예레미야서의 본래 내용을 보면 ‘새 계약’이라는 약속은 사람들의 마음 안에 당신 법을 새겨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실 새 계약의 내용은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 31,33)라는 것입니다. 옛 계약의 내용도 그와 다르지 않았습니다(탈출 19,5-6 참조). 그러니 옛 계약은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옛 계약을 마음에 새겨주시고 그 계약에 충실하게 살 수 있게 해주시는 것이 새 계약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구약과 신약이라는 말마디에서부터 우리는 이 둘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임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옛 계약 없이 새 계약이 있을 수 없고, 새 계약 없는 옛 계약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교회는 고대에서부터 구약을 거부하는 이들의 주장을 배격해 왔습니다.


구약을 예표로 보는 해석

고대의 교부들이 많이 사용했던 구약성경의 해석 방법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예형론과 우의적 해석입니다. 두 가지의 공통점을 말한다면, 이들은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어떤 사물, 사건 등이 신약의 다른 무엇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두 가지의 차이점은, 예형론이 구약에 기록된 사건 자체를 부인하지 않는 데에 비하여 우의적 해석에서는 구약에 나온 내용들이 글자 그대로 지니는 의미는 중시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좀 어지럽지요? 하나씩 다시 보겠습니다.

갈라 4,22-28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브라함의 여종 하가르가 낳은 아들과 부인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들이 두 계약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종이었던 하가르가 낳은 아들은 율법에 매여있는 이들을 나타내고 자유로운 몸이었던 사라가 낳은 아들은 율법에 매여있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것이 “우의적인 뜻”(갈라 4,24)이라고 말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는 우의적 해석이 아니라 예형론적 해석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설명을 하면서 여종 하가르와 자유로운 부인 사라가 실제로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았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 안에서는 구약성경을 예형론적으로 해석하는 다른 예들도 볼 수 있습니다.

1베드 3,20-21에서는 노아의 방주에 대해 말하면서, 그 방주는 세례를 가리키는 예형(21절에서 “본형”이라는 드문 단어를 사용하는데, 본형은 예형이 가리켜 보이는 실재를 뜻합니다. 세례가 방주의 본형이면 방주는 세례의 예형입니다.)이었다고 해석합니다. 여기에서 역시, 노아의 방주는 없었고 방주 이야기는 오직 세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아니지요. 방주는 있었으되 그 방주가 장차 있게 될 세례에 대한 예표였다고 보는 것이 예형론적 해석입니다. 로마 5,14에서 아담이 그리스도의 예형이었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에서는 (우리가 읽고 있는 문헌의 제목이 너무 길어서 다 쓰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 안에 나타나는 예형론적 해석의 예들을 열거하면서 이러한 해석 방법이 구약 자체 안에서도 사용되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유다인들에게도 이러한 해석 방법은 받아들여진 것이었다는 의미에서이지요.

한편 교부들이 사용한 예형론적 해석은 예를 들지 않는데, 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성체성혈 대축일에 바치는 성체송가입니다. 이런 구절이 있지요. “이사악과 파스카 양, 선조들이 먹은 만나, 이 성사의 예표로다.” 여기에서 역시 제물로 바쳐지러 모리야 산으로 올라가던 이사악이나 파스카 어린양이나 광야의 양식 만나가 본래 지녔던 의미는 그대로 보존됩니다. 다만 그것을 하나의 예형으로 보는 재해석을 통해서, 이들이 성체성사를 가리켜 보이는 역할을 한다는 새로운 의미가 첨가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잠시 이정표를 되짚어봅시다. 처음에,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한 이유가 무엇이었지요? 네, 유다인들과의 관계 문제입니다. 구약을 그리스도에 비추어 읽는 예형론적 해석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가능합니다. 그럼 유다인들은 그들의 성경을 알아듣지 못한 것일까요?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들이 구약을 읽을 때에 그들의 마음에 너울이 덮여있고, 그 너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사라진다고 말합니다(2코린 3,14-15).

그러나 구약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읽는 예형론적 해석에서 구약의 사건들이 그 자체로서 지녔던 의미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리스도교의 전통 안에서 새롭게 재해석하는 것이라면, 유다인들이 구약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교적인 재해석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의적 해석

그리스인들은, 문학 작품들에서 신들이 너무 폭력적이거나 신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감정과 행동을 보인다고 느껴질 때에 그 본문이 글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다른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예형론적 해석에서와는 달리 여기에서는, 본문이 글자 그대로 말하고 있는 내용은 실제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유다교 안에서도 이러한 방법은 사용되었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또 유다인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 살게 되면서, 글자 그대로는 의미를 갖기 어려운 율법 규정들을 다른 의미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신약성경 안에는 본격적인 의미의 우의적 해석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부들과 중세의 주해자들은 우의를 매우 많이 사용했습니다.

구약의 사건들 하나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연관되는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오리게네스는 라합이 자기 집을 알아보도록 내려보낸 진홍색 줄이 그리스도의 피를 암시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교부들은 구약성경의 세세한 부분들을 그리스도교적인 내용들에 직접 연결시켰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물론 구약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키는 데에 유익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교부들이 구약을 우의적으로 해석한 예들을 보면, 본문을 전체적으로 문맥 안에서 읽기보다는 토막토막을 떼어내어 본래의 의미와 다른 또 하나의 의미만을 강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구약성경의 한 구절을 읽을 때에는 우의적 해석이 도움을 줄 수 있다 해도, 우의적 해석으로 구약성경 본문의 본래 의미를 읽어낼 수는 없습니다. 이런 한계들 때문에 우의적 해석은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자구적 의미로 돌아가는 전환에 대해서는 다음 달에 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우의적 해석에서 찾아낸 의미들은 구약성경 본문의 본래 의미가 아니라 덧붙여진 의미라는 점만을 짚어둡니다.

* 안소근 실비아 - 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가톨릭대학교와 한국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성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다.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 총무이다.

[경향잡지, 2013년 4월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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