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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성서의 세계: 어머니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7 조회수2,836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어머니

 


“내가 당신에게는 아들 열보다 더 낫지 않소?” 

 

위대한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인 사무엘의 아버지 엘카나에게는 아내가 둘 있었다(1사무 1장). 첫째 부인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시집간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대단히 불행하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이러한 한나는 온 가족이 해마다 실로에 있는 성소로 순례를 갈 때마다 특히 괴로웠다. 성소에서 제물을 바치고 나면, 우리 나라에서 제사 끝에 음복하는 것처럼, 저마다 그 제물에서 제 몫을 받아 즐겁게 먹었다. 그때에 둘째 부인 브닌나는 자기가 낳은 자식들과 함께 흥겨운 잔치를 벌였지만, 자식이 없는 한나는 외로움과 슬픔과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한나의 연적인 브닌나가 그러한 호기를 놓칠 리 없었다. 한나의 화를 돋우며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러면 한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울기만 하였다. 남편이 “내가 당신에게는 아들 열보다 더 낫지 않소?” 하며 달랬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의 서러움을 채워주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일이 해마다 벌어졌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한나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을 점지해 주신다. 한나는 아들을 낳고 자기가 직접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짓는다. 그 해의 순례 때가 되었을 즈음 한나는 남편에게 자기의 결심을 밝힌다. 아이를 계속해서 집에서 데리고 있다가 젖을 떼면 성소로 데리고 가서, 자기가 맹세한 대로 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것이다. 남편은 “당신 좋을 대로 하구려.” 하며 순순히 동의한다. 때가 되자 한나는 적지 않은 예물과 함께 어린 아들을 데리고 성소로 가서 하느님께 맡긴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3천년도 더 되는 먼 옛날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일부다처제만 빼고서는 부부 관계라든가 가정에서 차지하는 어머니의 위치 등이 놀라울 정도로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물론 그때가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제 사회였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엘카나가 자기 아내 한나를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엿볼 수 있다. 종족 보존이 부부의 첫째 사명이었던 당시에, 비록 위로의 말이기는 하지만 엘카나의 고백은 신선한 충격을 준다.

 

 

여자 - 아내 - 어머니

 

이 이야기에서, 사무엘이 태어난 뒤부터 어머니 한나를 둘러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짐을 느끼게 된다. 수동적이고 활기가 전혀 없던 한나가 이제는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삶을 꾸려간다. 집안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 역시 한껏 높아진다. 또 적어도 아들과 관련된 일들은 어머니 혼자 결정하고 아버지는 추인을 하는 정도로 그친다. 어린 아들을 하느님께 바친다는, 아들의 일생을 좌우하는 중대한 결심도 한나 혼자서 한다. 

 

이러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나 어머니의 위치 등은 구약성서에서 예외적인 사항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성서 시대 사람들의 가정생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예컨대 2열왕 4,8-37의 수넴 여인, 토비트서에 나오는 노부부 이야기 등에서, 그 옛날에도 부부가 실생활에서는 서로 동등한 반려자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또한 창조 이야기의 가르침이기도 하다(창세 2,18.23). 

 

그런데 여자와 관련된 성서의 다른 구절들로 눈을 돌릴 때에 또 다른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 십계명에는 이러한 말이 나온다.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된다”(출애 20,17. 신명 5,21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종들은 말할 나위 없고 심지어 집, 소, 나귀처럼 여자가 재산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사실 옛날 이스라엘에서 미혼 여자는 아버지의 소유로, 시집간 여자는 남편의 소유로 여겨졌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을 “주인”이라고 불렀다(창세 18,12; 판관 19,26; 아모 4,1). 

 

성서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렇듯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였다. 그런데 시집을 가면서 여자는 새로운 신분을 획득한다. 예컨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에 딸은 종으로 내놓을 수 있지만(출애 21,7), 아내는 그가 설사 전쟁 포로였다 하더라도 절대로 팔 수가 없다(신명 21,14). 특히 아들을 낳고 어머니가 되면서 여자는 전혀 새로운 인간이 된다. 이스라엘 여자에게 가장 큰 행복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창세 24,60; 30,1; 시편 113,9 참조). 여자는 아이를 낳아 어머니가 됨으로써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된다. 어머니는 단순한 여자가 아니다. 어머니는 이제 아버지와 같은 반열에 오른다. 십계명 가운데에서 대인 관계를 규정짓는 첫째 계명부터 바로 그렇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출애 20,12; 신명 5,16). 레위 19,3에서는 아예 순서를 바꾸어서, “너희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경외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악담한다거나 그들을 때린 자는 사형을 받는다(출애 21,15.17; 레위 20,9). 

 

어머니의 위치는 이렇게 하느님의 법으로 명확히 설정되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지혜문학에서도 계속해서 효도하라고 장려하고 불효하지 말라고 경고한다(잠언 10,1; 15,20; 19,26; 20,20; 23,22; 28,24; 30,11.17). 

 

어머니는 집안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한다. 잠언 31장은 ‘훌륭한 아내’를 노래한다. 물론 훌륭한 아내 또는 어머니를 이상적으로 그리다 보니, 아내/어머니는 혹사당하고 남편/아버지는 하는 일 없이 놀고 먹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구절에서 우리는 그 옛날에도 어머니가 자질구레한 집안일에만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가정을 꾸려갔음을 보게 된다. 자녀들, 특히 아들들을 교육시키는 것은 원칙적으로 아버지의 일이다. 그러나 어머니도 딸만 아니라 아들까지 아버지와 함께 가르치는 책임을 맡는다(잠언 1,8; 6,20; 31,1 참조). 그래서 아들이 잘못될 경우에는 그를 낳고 키우고 가르친 어머니도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1사무 20,30; 잠언 10,1; 29,15 참조). 

 

가정의 어머니와 비슷하게, 왕비와 모후 역시 궁궐 일만이 아니라 나라의 정치와 종교 등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노약한 다윗을 끼고 자기 아들 솔로몬을 왕위에 올리는 바쎄바(1열왕 1장), 아들 임금이 횡사하자 유혈 쿠데타를 일으켜서 여섯 해 동안 유다 왕국을 다스린 아달리야(1열왕 11장) 등이 그 예이다. 그리고 거의 항상 임금의 어머니 이름이 제시되는데(1열왕 15,2; 2열왕 8,26; 2역대 12,13 등), 이 역시 왕비 특히 모후가 국가 운영에 큰 힘과 영향력을 발휘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달리 하느님과 관련해서 거의 쓰이지 않는다. 딱 한 번 하느님의 구원이 어머니에게 비유되는 구절이 있다.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이사 66,13).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어머니의 사랑이다(구약성서에 나오는 어머니의 사랑에 관해서는 창세 21,14-16; 출애 2,2-10; 2사무 21,8-10; 2마카 7,1-41 등 참조).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이 바로 그와 같다고, 아니 그보다 더하다고(이사 49,15) 선포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어머니

 

여자 - 아내 - 어머니에 관한 시각이나 생각은 신약성서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여자는 구약과 신약 시대의 사고방식에 따라 여전히 남자에게 종속된 사람으로 여겨진다(1고린 14,34-36; 에페 5,21). 그러나 동시에, 남편은 아내를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더 사랑하라고(에페 5,25), 또 자녀들은 구약성서의 계명(출애 20,12; 21,17; 신명 5,16)에 따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강조한다(마태 15,4; 마르 7,10; 10,19; 루가 18,20; 에페 6,2). 

 

이와 관련된 신약성서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에게 혈연보다 더 중요한 관계가 있음이 명확히 선포된다는 사실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이다. 사람은 혈연 덕분에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나 저 세상에 태어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리고 이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면 부모까지 떠나야 한다(마태 19,29; 마르 10,29-30; 루가 18,29). 이는 새로운 가정을 만들고자 부모를 떠나 배우자와 한 몸을 이루는 것과 비슷하다(창세 2,24; 마태 19,5). 배우자와 하나가 되지 않을 때에 가정을 이룰 수 없듯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려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얼마 되지 않는 현세 너머의 영원을 생각할 때, 그 영원의 주재자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우선적일 수밖에 없다. 

 

같은 연유로 예수 그리스도께도, 이 세상에서 가장 질기고 가장 깊다는 부모·형제와의 관계보다 더욱 근본적인 관계가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루가 8,2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 어머니와의 관계를 평가 절하하거나 부정하시는 것이 아니다. 마리아야말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신 분이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이로써 예수님과 마리아는 육적인 모자 관계와 현세를 넘어서서, 더욱 고차원적이고 영원한 모자 관계를 이루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마리아를 우리의 영원한 어머니로 세워주셨다(요한 19,26-27).

 

[경향잡지, 1999년 5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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