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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성령으로 일깨워진 사람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5 조회수2,824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신약] 성령으로 일깨워진 사람들

 

 

그리스도의 부활은, 수난이 시작되자 도망갔고 전적으로 낙담한 사도들한테는 상상할 수 없이 큰 사건이었다. 그들은 주님께 대한 자신들의 신뢰를 다시 찾았고, 다시 한번 그분을 믿을 수 있었으며, 이 쇄신된 믿음으로 과거를 전혀 다른 빛으로 보았다. 그들은 예수의 선과 능력의 표명, 그리고 그분의 의심할 여지없이 심오하고 풍부한 말씀 이외에 그분의 기적들을 위대한 교리적 총체를 지닌 요소로 보았다.

 

부활에 관한 보고에서 성 루가는 어떻게 사도들이 그 사건 더 이후 순수한 믿음과 더욱 깊은 지성을 갖추게 되었는지를 두 번에 걸쳐 보게 해준다. 부활의 천사는 이 발전을 일깨워주고 가르쳐주었으며(루가 24,6-8), 주께서 친히 사도들한테 구약성서의 본문을 계속하여 이용할 것을 밝히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말했거니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한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 한다.’ 하시고 성서를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시며 ‘성서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하였다.’고 말씀하셨다”(루가 24,44-47).

 

요한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주님의 이러한 완성적인 가르침에 대해 말하지 않으나, 요한 역시 사도들이 구약성서의 본문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해 더욱 깊은 이해력을 갖게 되었다고 언급한다. 나아가 그는 포괄적인 어떤 일들에 제한을 두지 않고 결정적인 사건들의 과정에서 구약성서를 구체적으로 인용하면서 더욱 깊이있는 설명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루가보다 더 앞서가고 있다. 그 위에 요한은 이 탐구를 부활하신 주님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다른 인물, 즉 예수를 대체하러 오실, 아니 더 낫게는 업적을 계속하러 오실 파라클리토(협조자)에게 돌린다.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파라클리토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4,26).

 

수수께끼 같은 표현 가운데 하나, 아니 어쩌면 예수의 이해되지 않는 표현은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쫓으신 뒤 바로 선언되었다. 정신을 질책하는 말씀과 육체를 휘감는 채찍으로 이루어진 악담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노여움에 동요하는 성전의 수작꾼들은 새로운 개혁자 앞에 나와 그러한 행동을 통해 어떠한 징표를 보여주실 것인지를 그분께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씀으로 당신 몸의 성전을 암시하셨다는 것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뒤에야 이 말씀을 생각하고 비로소 성서의 말씀과 예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22). 그리고 또한 “제자들의 머리에는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내 열정이 나를 불사르리이다.’ 하신 성서의 말씀이 떠올랐다”(요한 2,17). 이 회상은 파스카 후에야 그들의 정신에 들어갔고, 그것은 명백히 성령의 작용을 통해서였다.

 

열정적인 순례자들이 수난주간의 첫날에 예수께 마련해 드린 성지주일의 입장행렬은 사도들에게 주간 내내 수수께끼로 남았다. 파스카 후에야 그들은 구약성서에 예언되어 있는, 메시아의 생애 중에 예정된 순간으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예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다음에야 이것이 모두 예수를 두고 기록된 것이며 또 이런 일들이 그대로 예수께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요한 12,16). 사도들에게 구약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는 단계에 이르도록 한 것은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에 비추어진 회상이다.

 

파스카 아침에 사도들의 회의(懷疑)는, 네 번째 복음서에 따르면 선포된 사실에 대한 이해부족 탓이다. “그들은 그때까지도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요한 20,9).

 

따라서 그들이 동시에 본 사실들에 대한 각자의 시각은 개개의 부분에 새롭고 더욱 풍부한 빛을 유포시킨다. 총체적인 그러한 시각이 역사의 전과정 또는 한 사람의 생애, 심지어 우리 자신의 생애와 관련된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전적인 상상은 항상 효과를 명료하게 한다. 그러나 사도들의 경우에 거기에는 총체적인 시각을 넘어서 다른 영향도 있었다. 루가는 그것을 부활의 신앙 안에 개체화하는 것이라 믿고 있고, 요한은 그것을 성령의 업적으로 돌린다. 루가에 따르면 부활의 은혜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요한에 따르면 성령강림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특별하고 제한받지 않으며, 주변 상황이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교회의 살아있는 교리적 권한 속에 계속되는 은총이다.

 

예수의 제자들 안에서 이 성장하는 신앙의 노선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이러한 성령의 작용이 엄밀하게 ‘회상’이란 말로 특징지어지는가 하고 논리적으로 자문한다. 이것은 어떤 일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전에 알았던 어떤 일이 일정한 망각의 시간 뒤에 새롭게 일깨워지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회상’은 지성의 깊이도, 사고의 발전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되새기다(떠올리다)’로 번역하고, 신약성서에 단 두 번 나오는(루가 22,61; 요한 14,26) 그리스어 통사는 다만 ‘되새기다’보다 더 광범위한 의미를 갖는다. 더 깊은 외향과 풍부한 이해, 사고의 풍요함 그리고 그와 같은 성령의 선물을 암시한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5년 5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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