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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예수님과 여인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5 조회수2,788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신약] 예수님과 여인들

 

 

복음서의 여성

 

빵을 많게 한 두 기적 모두에게 복음서 저자들은 남자들만을 고려하여 참석한 사람들의 수를 정확히 밝히고 있다. 마태오의 유다적인 복음은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다.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멍 가량 되었다”(마태 14,21). 서양의 어떤 여성은 그러한 정식을 지나치게 혹독하게 비판한다. 거기에서는 근동 세계에 대한 평가와 선입견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성서적인 비전으로 고려할 수는 있으나 복음적인 평가라고 볼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다행스럽게도 복음적 이야기에서, 무엇보다도 루가의 유럽적인 복음에서 다른 판단들을 볼 수 있다.

 

화가 루가는 그의 그림에서, 중요 인물 곁에 다른 부수적인 모습들을 출현시킨다. 흔히 이들은 가려진 여인들의 수수한 출현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많은 경우 각별히 아름다운 수법으로 드러난다.

 

흔히 루가 복음에서, 오로지 루가 복음에서만, 여행 중인 예수의 직접적인 친구로 몇몇 여인들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는데 열두 제자도 같이 따라다녔다. 또 악령이나 질병으로 시달리다가 나은 여자들도 따라다녔는데 그들 중에는 일곱 마귀가 나간 막달라 여자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신하 쿠자의 아내인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라는 여자를 비롯하여 다른 여자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돕고 있었다”(루가 8,1-3). 예수께 관심을 드러내 보이고 그분이 죽으신 뒤까지 충실히 머무른 이들은 여자들이었다(루가 24,10).

 

복음서들은 수많은 기적들을 통하여 예수의 관심이 모든 사람들에게, 그러나 명백하게 여자들에게도 쏠리셨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분은 베드로의 장모와 하혈병 걸린 여자를 고쳐 주셨고, 야이로의 딸에게 생명을 돌려주셨다. 그분은 차별하시지 않았다. 공관 복음서는 셋 모두 여인들에게 돌려진(내린) 축복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루가는 그 그림을 완성한다. 그만 홀로 십팔 년 동안 병마에 사로잡혀 허리가 굽어져서 머리를 제대로 들지 못하는 여인에 대해 이야기한다(루가 13,11). 예수께서는 그녀를 안식일에 고쳐 주셨다. 회당장한테 그 일에 대해 비난을 받으신 예수께서는 이 불행한 여자를 극히 호의적인 태도로 소개하셨다. “이 여자도 아브라함의 딸인데 십팔 년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다. 그런데 안식일이라 하여 이 여자를 사탄의 사슬에서 풀어 주지 말아야 한단 말이냐?”(루가 13,16). 신약 성서에서 유일하게 나오는 ‘아브라함의 딸’이란 영예스러운 호칭은 여인을 아브라함의 자녀들과 동등한 수준에 놓는다.

 

예수의 사랑과 평가는 여인에 대한 바로 루가 복음에서 발견되는 - 아주 잘 묘사되어 -다른 수많은 예들에서 드러난다. 죄 많은 여자에 대한 이야기는 그녀가 받은 상급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잘 알려져 있다. “마침 그 동네에는 행실이 나쁜 여자가 하나 살고 있었는데 그 여자는 예수께서 그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신다는 것을 알고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예수 뒤에 와서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었다. 그리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입맞추며 향유를 부어드렸다.”(루가 7,37-38). 그 바리사이파 사람은 그것을 보고 예수와 ‘행실이 나빴던’ 여자를 혹독하게 비판하였다(루가 7,39). 예수께서는 그녀의 사랑까지 알아보시면서 그녀를 용서하셨다. “잘 들어 두어라.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루가 7,47). 여기서 예수는 이해와 참사랑으로 가득 차신 분으로 묘사된다.

 

또 다른 감동적인 사랑의 표현은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다. 여기서는 인간적인 요소가 놀라운 방식으로 드러나며, 이 이야기 역시 루가의 공관 복음에만 나온다. “예수의 일행이 여행하다가 어떤 마을에 들렀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자기 집에 예수를 모셔 들였다. 그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가 10,38-39). 네 번째 복음서는 이들의 상호 관계에 대해 좀더 깊이 있게 주장한다. “예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고 계셨다”(요한 11,5).

 

백성 가운데서 한 여자가 예수의 설교를 듣고 자연스럽게 그분의 어머니에 대해 생각해 내는 장면을 보존하고 있는 것도 역시 루가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군중 속에서 한 여자가 큰소리로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고 외쳤다”(루가 11,27). 루가 자신이 여자에 대해 지극한 존경심을 지니고 있었던 그리스인으로서, 그 자신도 숙고해 보고 감동받은 이야기들 가운데서 이 이야기를 발견하였다.

 

예수의 전기 끝에 루가는 또다시 스승에 대한 독특한 표현을 제공한다. 우리가 십자가의 길 가운데 하나로 알고 있는 장면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뒤따랐는데 그중에는 예수를 보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들을 돌아보시며 ‘예루살렘의 여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하여 울어라.’ 하고 말씀하였다”(루가 23,27-28). 큰 십자가를 지신 분은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잊고, 그들 때문에 고통을 받으시면서도 사람들, 특히 여자들에 대해 연민의 정을 보이신다.

 

마태오 복음이 여자들을 별로 고려하지 않은 반면에, 루가는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자애로운 관심을 되도록이면 암시한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4년 1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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