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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리] 성경 속의 인물: 예루살렘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2-10-03 조회수2,839 추천수1
[성경 속의 인물] 예루살렘 (1)


1967년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자국 수도라고 선언했다. 국제사회는 인정했지만 아랍권은 아직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곳에는 유다인들이 들어오기 훨씬 전인 BC1,800년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만큼 오래된 도시며, 팔레스타인들이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다.

전통적인 해석으로 ‘예루’는 ‘기초’를 뜻하고 ‘살렘’은 ‘평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예루살렘’은 ‘평화의 기초’라는 말이 되겠다. 이 지역을 차지해야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암시다. 실제로 예루살렘은 치열한 전투의 장소였고, 역사적으로 50차례 이상 포위 공격당했던 곳이다. 절반 이상 파괴 되었던 횟수는 10번이며, 예루살렘을 뺏고 빼앗긴 회수는 무려 36차례나 된다.

예루살렘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가 된 것은 다윗이 이곳을 점령한 뒤부터다. 기원전 10세기 초에 다윗은 ‘여부스족’을 정복하고 그들이 살던 땅을 유다지파 소유로 만들었다. 그때까지 이곳은 어느 지파에도 속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윗은 이곳을 요새화하고 자신의 본거지로 만들었다. 이후부터 사람들은 ‘다윗의 성’이라 불렀다.

예루살렘은 해발 800미터의 산위에 세워진 도시다. 북쪽은 육지와 닿아 있지만 동쪽, 서쪽, 남쪽은 깊은 계곡에 둘러싸여있는 천연의 요새다. 동쪽 계곡은 ‘키드론 골짜기’라 부르고 서쪽과 남쪽은 ‘힌놈 계곡’이라 부르는 완만한 낭떠러지에 접해 있다. 따라서 성안으로 갈 수 있는 길은 북쪽뿐이고 이곳에 성벽과 성문이 있다. 현재는 예루살렘 ‘신시가지’가 성벽 앞에까지 뻗어있다. 물론 성벽 안에는 ‘구시가지’가 예전부터 있었다.

오랫동안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요르단 왕국에 속해 있었고 신시가지만 이스라엘 땅이었다. 따라서 성 밖(신시가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성탄절과 부활절 외에는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다 1967년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구시가지’를 자국 영토로 선언하고 통합해 버렸다. 현재는 양쪽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

오늘날 예루살렘은 인구 36만의 국제도시로 전 세계 유다인들의 정신적 고향이 되어 있다. 전쟁과 테러의 위험은 줄어들지 않았지만 순례자와 관광객은 여전히 찾아오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성경의 무대이기에 즐겨 방문한다. 이슬람교 신자들은 이곳에서 ‘마호메트’가 승천했다고 알려져 있기에 방문한다. 그들은 ‘메카와 메디나’에 이어 제3의 성지로 예루살렘을 공인하였다. 살아생전 반드시 한번은 순례해야 할 장소가 만든 것이다. [2009년 5월 10일 부활 제5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신부)]


[성경 속의 인물] 예루살렘 (2)


초기 이스라엘은 ‘계약 궤’를 여러 장소로 옮겨 모셨다. 대표적인 곳이 ‘실로와 스켐’이었다. 두 도시는 성조들이 하느님을 만났던 장소다. ‘계약 궤’에는 모세의 십계판과 만나를 담았던 황금그릇, 그리고 싹이 돋았던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 있었다. 이스라엘이 가장 신성시한 물건들이다. 그들은 이곳에 주님께서 나타나시어 말씀을 전해주신다고 믿었다. 그래서 ‘지성소’라 불렀고 천막을 두르고 보호하였다. ‘이동 성전’인 셈이다.

다윗은 ‘계약 궤’를 한곳에 영구히 모시고자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정복하자 그곳을 적임지로 여겨 즉시 이동 성전을 옮겼다. 그리고 지파간의 모든 행사도 그곳에서 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계약 궤’는 왕권과 연결되었고, 예루살렘은 12지파의 연합을 상징하는 신흥도시가 되었다.

다윗은 장차 성전이 들어설 장소로 예루살렘 내에 있는 ‘모리아 언덕’을 지정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려 제단을 쌓았던 곳으로 알려진 장소다. 훗날 솔로몬은 이곳에 성전을 건립했고 이것이 예루살렘 ‘제1성전’이다. 솔로몬 즉위 4년 2월에 시작했고 11년 8월(BC 957년)에 완공했다. 7년에 걸친 대역사였다.

성전 건물은 동쪽을 향해 있었고 직사각형이었다. 건물은 크지 않았지만 뜰은 넓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건물 안에는 넓이가 똑같은 방 3개가 있었는데 가운데 방에 ‘계약 궤’를 모셨다. 그리고 대사제만이 ‘속죄의 날’에 들어갈 수 있게 했다.

한편 16대 임금 요시아는 31년간 왕으로 있었는데 예루살렘을 왕국의 유일한 제사 장소로 선언했다. 다른 곳에서는 일절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만큼 강력하게 예루살렘을 지원했다. 하지만 그가 죽자 예루살렘의 영화도 끝나게 된다.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가 침공해 왔던 것이다. 기원전 604년과 597년, 두 차례에 걸친 침략으로 성전의 많은 보물들을 빼앗겼다. 그리고 마침내 586년 여름,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성전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솔로몬의 ‘제1성전’은 이렇게 해서 사라졌다. 백성들은 대부분 포로로 끌려갔고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예언의 성취로 받아들이며 순응했다.

이후 바빌로니아를 무너뜨린 ‘페르시아’는 유다인 포로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냈고 ‘성전재건’도 허락했다. 이렇게 해서 성전은 소박한 형태로 복원될 수 있었다. ‘제2성전’이다. 오늘날 도면은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그토록 중시하던 ‘계약 궤’도 없었다. 잃어버린 것이다. 로마시대 이스라엘 왕이었던 헤롯대왕은 제2성전을 증축 보강했다. 작업은 46년간 계속되었고 이 성전이 예수님 시대의 성전이다. [2009년 5월 17일 부활 제6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신부)]


[성경 속의 인물] 예루살렘 (3)


바빌로니아를 무너뜨린 ‘고레스’는 유다인 포로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성전재건’도 허락했다. 유다인들은 부족한 재원과 인력으로 20년을 버티며 성전을 복원해냈다.(BC 515년) ‘제2성전’이다. 당시 설계도는 전해지지 않지만 기록은 남아 있다. 성전 내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고 광장으로 사용된 ‘2개의 뜰’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제1성전’에서 사용하던 많은 제구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무엇보다 ‘계약 궤’가 없어진 것이 가장 큰 손실이었다. 그렇다고 새롭게 만들 수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예절과 종교의식’이 강조되었고 사제들은 교육을 통해 철저하게 전승시켰다.

소박했던 ‘제2성전’은 ‘헤롯대왕’ 때 화려하게 증축된다. 예수님께서 장사꾼과 환전상을 몰아내신 바로 그 성전이다. 헤롯(Herodes)은 기원전 37년에 태어났으며, 부친이 로마 시민권을 가졌기에 자동적으로 로마시민이 되었다. 그는 뛰어난 정치력으로 37살에 원로원으로부터 ‘이스라엘 왕’으로 임명되었고 40년간 다스렸다.

하지만 그와 그의 부모는 유다인이 아니었다. 헤롯은 ‘출생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마카베오’ 가문의 ‘미리암’ 공주와 재혼했고 수많은 성채와 공공건물을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에도 손을 댔다. 작업은 BC 20년에 시작해 46년간 계속되었고 ‘제1성전’을 능가하는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을 탄생시켰다.

헤롯은 성전 터를 2배로 넓혔고 이중으로 성벽을 쌓았다. 그리고 성전 광장을 집회장소로 허락했고 이방인의 출입과 장사도 허용했다. 하지만 광장 안쪽에 담을 쌓아 잡인들의 접근을 막았고 유다인 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성전은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었고 유다인 최고법정이었던 ‘산헤드린’도 이곳에서 열렸다.

그러나 기원후 66년부터 시작된 ‘유대독립전쟁’은 헤롯이 심혈을 기울였던 성전을 또 다시 초토화시켜 버린다. 70년 여름,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대는 성전 안에서 ‘결사 항전’하던 유다 독립꾼들을 소탕했다. 이 과정에서 성전은 ‘돌 위에 돌이 얹혀있지 못할 만큼’ 심하게 파괴 되었다. 겨우 남은 것이 오늘날 ‘통곡의 벽’으로 알려진 서쪽 성벽의 일부다.

기원후 130년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무너진 성전 자리에 로마의 신 ‘유피테르 신전’을 지었다. 이에 유다인들은 반기를 들며 전쟁을 일으켰다. 제2차 유대독립전쟁이다. 하지만 반란은 6년 만에 진압되고 예루살렘은 또다시 파괴되었다. 화가난 황제는 예루살렘의 이름을 ‘아엘리아 까삐똘리나’(Aelia Capitolina)로 바꾸고 로마 스타일로 정비하였다. 그리고 모든 유다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하며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게 왕명을 내렸다. [2009년 5월 24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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