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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하느님 뭐라꼬예?: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야곱과 요셉 – 하느님 섭리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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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1-01-09 조회수207 추천수0

[하느님 뭐라꼬예?]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야곱과 요셉 – 하느님 섭리의 사람

 

 

내 아들의 아들은 곧 나의 아들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고 생각했던 요셉의 덕택으로 오랜 가뭄에서 살아남아 이집트 땅에 정착하여 잘 살게 된 야곱이 이제 147세의 나이로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고 나면 조상들의 곁에 묻어줄 것을 요셉에게 맹세하도록 하면서 말했습니다. “이집트 땅에서 태어난 너의 두 아들을 내 아들로 삼아야겠다. 에프라임과 므나쎄는 르우벤과 시메온처럼 내 아들이 되는 것이다. 이 아이들 다음에 너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은 너의 아들들이다. 그들은 제 형의 이름으로 상속재산을 받을 것이다.”(48,5-6)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을 자신의 양자로 삼았으니 할아버지가 손자를 자신이 낳은 아들로 여긴다 한 것이지요.

 

“그들(에프라임과 므나쎄의 자식들)은 제 형의 이름으로 상속재산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야곱이 에프라임과 므나쎄를 자신의 아들의 항렬에 올린다는 것은 그들에게 엄연한 족장의 신분을 부여한다는 것이고, 이는 후일 요셉의 후손들이 이집트를 탈출한 후 에프라임 또는 므나쎄 지파 소속으로 가나안에서 약속의 땅을 배당받는 자격에 대한 암시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이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에 대한 설명이기도 합니다.(여호 13-19 참조) 즉 야곱의 12아들 가운데 레위와 요셉의 이름을 딴 지파 대신 므나쎄와 에프라임이라는 이름의 지파가 있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창세 35,23-26 ‘야곱의 열두 아들’ 참조)

 

 

형의 축복을 가로챘던 야곱의 축복

 

요셉이 두 아이를 임종을 앞둔 이스라엘(야곱) 앞에 데려다 놓으니 이스라엘은 의도적으로 손을 엇갈리게 내밀어 작은아들인 에프라임의 머리에 오른손을, 맏아들인 므나쎄의 머리에는 왼손을 얹어 축복하였습니다. 손을 머리에 얹음은 페르시아시대 이후 누군가에게 신의 가호를 비는 상징으로 여겨졌는데, 이스라엘은 이러한 행동을 통해 다음과 같이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주었던 것입니다. “저를 모든 불행에서 구해 주신 천사께서는 이 아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소서. 나의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이름이 이 아이들에게 살아 있으리라. 또한 이들이 세상에서 크게 불어나리라.”(창세 48,16)

 

요셉은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먼저 축복하는 것이 못마땅하여 아버지가 하는 축복의 순서를 바로잡으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거절하며 말하였지요. “그러나 그의 아우가 그보다 더 크게 되고, 그의 후손은 많은 민족을 이룰 것이다.”(창세 48,19) 이는 훗날의 역사에서 에프라임 지파가 형인 므나쎄 지파보다도 정치적인 우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이야기입니다. 실제 에프라임 지파는 후일 가나안을 정복한 다음 비옥하고 초지가 많은 팔레스티나 중부지역을 할당받아 번성하였고, 솔로몬이 죽자 기원전 931년 남쪽의 유다 지파와 결별하고 주변 지파와 연합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왕국을 세우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예언자 호세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아예 에프라임이라 부를 정도였지요. 그런가 하면 므나쎄 지파는 가나안 정복 이후 요르단 강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갈라져 생활, 교류가 뜸해짐에 따라 세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요셉의 맏아들이었지만 계승권을 동생에게 양보한 셈이지요.

 

야곱이 손을 엇갈리게 하여 동생을 먼저 축복했던 일은 자신이 형의 축복을 가로챘던 과거를 떠올리게 합니다. 형이 받아야 할 축복이 자신에게 내렸던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알아들었을 야곱은 장차 요셉의 아들들에게 내리게 될 하느님의 축복을 내다보았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우리들의 인간적인 생각과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음을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에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느님 축복을 참으로 갈망하고, 그 축복을 받기에 맞갖은 내가 되려고 노력하는 자세일 것이고, 또 그 하느님의 축복이 나에게 내려진다면 그 축복을 받은 자답게 살아가려고 힘쓰는 태도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에 합당한 레지오 단원들이 됩시다!

 

 

아들 각자에게 알맞은 축복의 기도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은 야곱이 자신의 아들들을 불러 유훈(遺訓)을 전하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말로도 축복하지만 따끔한 비난의 말 혹은 저주로 들리는 말로도 질책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야곱의 말들은 후일 지파들의 번성과 몰락의 역사에 대한 암시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이 자신의 임종을 앞두고 아들들을 위해 한 축복의 기도는 그의 가족을 넘어 이스라엘 전백성에 대한 축복으로 이어졌습니다. 창세기는 이를 곧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다. 이것은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 각자에게 알맞은 복을 빌어 주면서 한 말이다.“(49,28)

 

야곱은 그저 듣기 좋은 말로써만 축복하지 않았고 그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자세를 요구하였고, 자식들에게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채찍과 매까지 들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자식들을 제대로 양육해야 할 의무를 지닌 아버지로서 마지막까지 책임을 다하며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준 것이지요. 교육적인 면에서 자녀의 사기를 꺾을 수 있을 기도였지만 죽음을 앞두고 한 유언이니 그 뜻이 잘 전해졌지 않나 싶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저녁에 가족들이 모이는 시간이 되면 자녀들을 모아 놓고 묵주기도를 [다짜고짜] 시작하셨고, 묵주기도에 이어서 우리 형제들 이름 하나하나를 부르며 [주로 장점에 대한 칭찬과 염려를 담아] 각자를 위한 맞춤형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어머니가 해주신 그 기도의 힘으로 5남매가 어긋남이 없이 잘 자라온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늘 그렇게 사랑으로 기도해 주신 모습을 떠올리게 되어 고마운 마음입니다.

 

자녀들과 기도의 시간을 가질 때 자녀들이 들을 수 있는 말로 축복의 기도를 해주는 부모님들이 많아지셨으면 합니다. 가끔씩은 자녀의 잘못에 대해서도 염려의 뜻을 담은 부모의 기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또 그것이 진정한 사랑과 축복의 기도 아닐까, 그러한 기도를 통해 사랑이 충만하신 하느님께서 자녀를 부디 바른 길, 행복한 길로 이끌어주시길 간절히 청하는 부모의 마음이 자녀에게도 전해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가족이 사랑으로 함께 갖는 기도시간을 통해 부모의 사랑을 알게 된 자녀가 어떻게 어긋난 길을 걸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레지오 단원들이 부디 그런 복된 부모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형들을 안심시킨 요셉과 그의 유언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요셉에게 아버지의 생전 분부대로 자신들을 용서해 주길 청하였습니다. 형들의 말을 들은 요셉이 울자, 그것을 본 형제들도 울음을 터뜨리며 이제 자기들은 ‘아우님의 종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에 요셉은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창세 50,19) 하면서 ‘모든 것이 하느님 섭리’였다는 말로 형들을 위로하고 안심시켰습니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을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이들을 부양하겠습니다.”(창세 50,20.21) 이처럼 요셉은 악에서 마저 선을 이끌어내시는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와 전능하신 자비를 깨닫고 자신에게 고통을 준 형제들에게 용서를 베풀었습니다.

 

이제 요셉과 그 형제들의 집안이 이집트에 자리 잡고 살게 되었습니다. 백십 년을 살면서 삼 대까지 본 요셉은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예언적인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는 이제 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이 땅에서 이끌어 내시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입니다.”(창세 50,24) 여기서 요셉의 수명 ‘110년’은 지혜문학에서 보는 이상적인 인간수명에 해당하는 것이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이라는 표현은 모세오경의 최종 편집자가 삽입한 것이 확실하게 여겨집니다.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인 요셉의 임종이야기를 통해 창세기는 탈출기의 전사(前史)로서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었던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때 여기서 내 유골을 가지고 올라가십시오.”(창세 50,25) 요셉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일러두었던 이 말은 후일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여호수아가 요셉의 유골을 스켐에 묻음으로써 실현되었습니다.(여호 24,32 참조)

 

“인간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언 16,9) 요셉은 형들에 의해 죽음의 위험에까지 내몰려졌었지만 자신에게 닥쳤던 모든 일을 하느님의 섭리로 여기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인간적으로는 용서하기에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나 자신이 겪은 모든 아픔과 배신도 요셉의 경우와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섭리라는 넓은 틀 안에서 그 모든 일이 결국엔 나를 위한 것이거나 다른 유익을 위한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잘못을 범한 사람에 대한 최종 심판은 하느님의 몫이라는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증오와 미움과 폭력의 행사보다는 이해와 용서와 포용하는 힘을 청하고 그렇게 실천할 수 있는 우리 단원들이 되길 바랍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1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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