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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성서의 세계: 목자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9 조회수3,412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목자

 

 

예수 그리스도와 목자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그 기쁜 소식을 맨 먼저 듣고, 또 요셉과 마리아 곁에서 아기 예수님을 처음으로 본 사람은 목자들이다(루가 2,8-20).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에 계신지 묻자,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베들레헴에서 통치자가 나와 하느님의 백성을 (목자가 양 떼를 치듯) 보살피리라는 구약성서의 예언을 내놓는다(마태 2,1-6).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이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위한 것이라고 밝히신다(마태 15,24). 양들이 길을 잃고 흩어짐은 환난을, 그들을 다시 모아들임은 구원을 의미한다(루가 19,10). 그분은 목자 없는 양 같은 군중을 보시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들을 가르치시고 그들의 아픔과 질병을 고쳐주시고 그들을 먹이신다(마태 9,35-37; 마르 6,34-44). 붙잡혀 가시면서는 제자들이 목자 없는 양 떼처럼 흩어지리라고 염려하신다(마르 14,27). 그리고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라는 당신의 말씀대로(요한 10,11),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결연히 나아가신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을 상징적으로 서술하실 때에도 목자 일에 빗대어 말씀하신다. 종말에 심판관으로서 다시 오시면 세상 모든 사람이 당신의 옥좌 앞으로 모여들 터인데,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선인과 악인을 갈라놓으시리라는 것이다(마태 25,31-33).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지상에서 환난과 박해와 고통을 이겨낸 믿는 이들을 하느님의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목자처럼 돌보시고 그들을 생명의 샘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라고 예고한다(묵시 7,13-17).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생애, 현세와 세말과 내세의 활동이 목자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성서의 땅의 목자

 

농사와 목축은 성서의 땅 팔레스티나 경제의 기반이었다. 양이나 염소를 치는 것은 일차적으로 가족의 일이었다. 가장이 직접 하기도 하지만(에제 34,15), 야곱 이야기에서처럼 아들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사위가 주로 이 일을 한다(창세 31,38; 37,12). 딸도 예외가 아니다. 라헬과 시뽀라는 양들을 치다가 물을 먹이는 우물가에서 장차 남편이 될 야곱과 모세를 만난다(창세 29,9; 탈출 2,15-22). 가축의 수가 많거나 다른 연유가 있으면 삯꾼을 목자로 고용하는데(요한 10,12), 품삯은 돈이나(즈가 11,12) 짐승으로(창세 30,28-43; 1고린 9,7) 지불하였다.

 

목자의 첫째 임무는 짐승에게 풀과 물을 찾아주는 것이다(시편 23,2-3 참조). 성서의 땅은 늦봄에서 가을까지 비가 전혀 오지 않는다. 이 건기 동안 목자들은 풀을 찾아 돌아다니게 된다(창세 37,12-17). 이렇게 오래 들에서 지내는 것은 고역의 연속이었다(창세 31,40). 짐승에게 물을 먹이는 일도 쉽지 않았다. 물이 귀할 뿐만 아니라 물이 있어도 시뽀라의 경우처럼 물을 먹이지도 못하고 쫓겨날 수도 있었다(탈출 2,17).

 

목자의 둘째 임무는 짐승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도둑이나 들짐승들이 늘 가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릿매끈과 돌멩이에다가(1사무 17,40) 막대까지 늘 가지고 다녀야 한다(시편 23,4). 야수와 맞서 싸워야 하고 그것들이 짐승을 물어가면 쫓아가서 빼앗아 와야 한다(1사무 17,34-35). 보통 때에도 짐승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죽어가는 동안 그것들을 늘 보살펴야 한다.

 

남의 가축을 돌볼 때에는 책임이 엄격히 규정된다(탈출 22,9-12). 짐승이 도둑맞으면 짐승으로 물어내야 하고, 맹수에게 찢겨 죽으면 증거물을 내놓아야 한다. 그 밖의 이유로 죽거나 다치거나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끌려갔으면, 주인 재산에 손대지 않았다고 하느님께 맹세해야 한다.

 

목자 일은 책임이 크고 때로는 위험한 직업이었다. 짐승이 자기 것이든 남의 것이든 성실한 목자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양들을 돌보아야 한다.

 

 

하느님 백성의 목자들

 

옛날 가축을 돌보는 일은 어떤 면에서 자식을 기르는 일보다도 더 어려웠을 것이다. 자식들은 크면서 자립하고 독립하기 때문이다. 에제키엘에 따르면 목자는 약한 양에게 원기를 북돋아주고 아픈 양을 고쳐주고 부러진 양을 싸매주어야 하며 흩어진 양을 데려오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와야 한다(에제 34,4). 고대 근동에서는 이러한 목자의 모습이 곧잘 신이나 임금에게 적용된다. 바빌론과 아시리아 같은 곳에서는, ‘목자’가 국가와 민족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려고 신에게서 선택된 임금을 가리키는 통상적 칭호였다(이사 44,28; 예레 25,34-36; 나훔 3,18도 참조). 그리고 ‘(양들을) 치다’ 동사는 흔히 ‘통치하다, 다스리다’의 의미로 쓰였다.

 

이러한 목자의 은유가 이스라엘에서도 똑같이 쓰인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느님이 창세기 48장 15절과 49장 24절 외에는 시편 23편 1절과 80편 1절에서만 “목자”로 불리신다. 반면에 목자의 어휘는 하느님과 관련해서도 풍부히 쓰인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 앞에 서서 가시고(시편 68,8), 그들을 바른길로 이끄시고(시편 23,3), 목장으로(예레 50,19) 또 물 곁에서 쉴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시고(시편 23,2; 이사 49,10), 그들을 보살피며 지켜주시고(예레 31,10; 에제 34,12; 미가 7,14), 흩어진 이들을 모아들이시고(이사 56,8), 새끼 양들을 품에 안고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 40,11). 이러한 목자의 은유는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로 시작하는 시편 23편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주님은 다윗에게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직역: … 이스라엘을 <양처럼> 치고)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되리라.”고 약속하신다(2사무 5,2). 다윗은 백성을 “양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2사무 24,17). 이후 이스라엘 또는 유다에서는 임금을 비롯한 정치와 군사 지도자들이 목자라고 불린다(2사무 7,7; 예레 2,8; 에제 34,2-10; 미가 5,4 등). 그러나 특이하게도 ‘목자’가 임금의 정식 명칭이나 칭호로는 쓰이지 않는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렇게 선포한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내 백성을 돌보는 목자들을 두고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버리고 몰아냈으며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이제 내가 너희 악한 행실을 벌하리라.`…`그런 다음 나는 나 자신이 그 모든 나라로 쫓아보냈던 양 떼의 남은 자들을 거기서 다시 모아들여 그들이 살던 땅으로 데려오리라. 그러면 그들은 출산을 많이 하여 번성하리라. 내가 그들을 돌보아줄 목자들을 그들에게 세워주리니,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잃어버린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예레 23,2-4). 하느님 백성의 지도자들은 목자로서의 직무에 충실하지 않고 제 배만 채웠다(에제 34,2-4). 백성도 약자들을 못살게 굴었다. 그 결과 ‘양 떼’는 환난을 당하고 흩어지게 되었다(에제 34,18.21-22). 이제 하느님께서 몸소 목자 일을 맡아 당신에게 충실한 ‘양 떼’를 돌보시고, 성실한 목자들을 세우시는데, 결국은 “새 다윗” 곧 메시아를 “유일한 목자”로(에제 34,23) 세우신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백성은 한 목자 밑에서 한 민족이 된다(에제 37,22.24). 즈가리야 예언서에는 목자의 죽음에 관한 예언이 나온다. 목자의 죽음으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다는 것이다(즈가 14,7-9).

 

 

그리스도 - 우리의 목자

 

신약성서에서는 목자의 은유가 하느님께는 드물게만 적용된다. 아마도 이 은유가 예수님과 관련하여 집중적으로 쓰인 데에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다.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만 하느님을 목자에 비유한다(마태 18,12-14와 루가 15,4-7). 길 잃은 양 한 마리 곧 잃어버린 한 사람을 되찾게 되면 하느님은 인간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역설적인 사실은 예수님 당시에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이 목자들을 멸시하고 죄인 취급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이 여러 달 주인에게서 떨어져 지내는 동안, 주인의 재산에 손을 댈 수도 있고 남의 땅에 양들을 풀어놓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강조하는 정결례와 안식일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목자들은 세리와 창녀와 같은 부류로 여겨졌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 그리고 특별히 당신과 관련하여 과감히 목자의 은유를 사용하신다. 이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경멸당하는 목자들과 그들의 삶을 먼발치에서만 바라보지 않고 그들과 친하게 지내셨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착한 목자”로서, 창녀와 세리와 목자처럼 죄인으로 소외받는 이들을 받아들이시고 그들을 인도해 주신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시편 23편이 노래하는 목자 상을 당신의 생애와 죽음으로써 실현시키신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은 나의 목자!”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지역 공동체의 지도자들 또는 온 교회의 지도자를 은유적인 의미로 목자라고 부르는 것은(에페 4,11과 요한 21,15-17), 그들이 이러한 주님의 목자 직무에 동참하고 그분을 대리하여 직무를 수행함을 뜻한다. 이 동참과 직무 수행에는 양들을 위한 죽음까지 포함된다(요한 11,10). 교회 지도자들은 옛 이스라엘의 목자들과 달리 양 떼를 열성으로 보살피고(사도 20,28; 1베드 5,2) 길 잃은 이들을 찾아나서며(마태 18,12-14), 참 목자이신(1베드 2,25) 그리스도처럼 양 떼에게 신앙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1베드 5,3). 그리고 “으뜸 목자”이신 분이 다시 오시면, 자기들이 한 일에 대하여 그분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1베드 5,4).

 

[경향잡지, 2002년 12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번역담당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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