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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성서의 세계: 오순절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8 조회수4,137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오순절

 

 

오순절과 성령 강림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신 뒤에 사도들은 기도에 전념한다. 그리고 스승을 배신한 끝에 자살로 삶을 마감한 유다 대신에 마티아를 뽑아 사도의 수를 다시 열둘로 채운다(사도 1,12-26). 마침내 과월절에 이은 무교절이 지나고 오십 일째 되는 날 곧 유다인들의 오순절에,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성령께서(사도 1,8) 사도들에게 내리신다. 그러자 사도들이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데에 따라 여러 언어로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때에 예루살렘은 오순절을 기해 많은 나라에서 순례를 온 독실한 유다인으로 가득 차있었다. 이들이 사도들의 말소리를 듣고 몰려든다. 그리고 이 갈릴래아 ‘촌사람’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말로 듣고서는 어안이 벙벙해진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아침부터 술에 취하였다고 빈정거린다. 그때에 평범할 뿐만 아니라 무식하기까지 한 베드로가(사도 4,13) 나서서 저 유명한 오순절 설교를 한다(사도 2,14-40). 이 설교를 듣고 그날 하루에 삼천 명 가량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사도 2,41).

 

이렇게 유다인들의 오순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가,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세상 여러 곳에서 모여온 순례객으로 가득한 예루살렘에서부터, 세계 각지에 흩어진 유다인들의 종교적·정신적 중심지인 이 성도에서부터, 이제 온 세상을 향하여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퍼져가기 시작한 것이다.

 

 

오순절과 주간절

 

과월절에 이어 연중 두번째로 큰 이 유다인들의 축제는 그리스 말로 ‘펜테코스테’라고 하는데 ‘제 오십 일’을 뜻한다. 이를 우리 나라와 중국에서는 ‘다섯 오(五)’, ‘열흘 순(旬)’, ‘마디 절(節)’을 써서 ‘오순절’, 일본에서는 ‘절’ 대신에 ‘제사 제(祭)’를 써서 ‘오순제’라고 번역한다.

 

이 오순절이 히브리 말 성서에서는 본디 ‘주간들의 축제’ 곧 “주간절”이라고 불린다(출애 34,22; 민수 28,26; 신명 16,9-10). 이 축제는 과월절과 무교절 직후, 보리를 수확하려고 낫을 대어 그 첫 보릿단을 주님께 봉헌하는 안식일부터 시작하여 만 일곱 주간이 지난 뒤에 지내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이때는 밀 수확을 마칠 때이다. 그래서 출애굽기 23장 16절에서는 “수확절”이라고도 하는데, 이 명칭이 아마도 가장 오래된 것일 수 있다. 또 민수기 28장 26절에는 “맏물의 날”이라는 이름도 나온다. 팔레스티나 땅에서 가장 중요한 농산물 가운데 하나인 밀의 맏물을 하느님에게 바치는 날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오순절 또는 주간절은 밀 수확과 직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는 이 축제를 지내는 때가 유동적이었다. 지방별로 밀의 성장 상태에 따라 날을 정하여 각각의 성소에서 거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과월절이 무교절과 연결되면서, 무교절이 끝나면서 일곱 주간이 다되는 날, 곧 논란이 없지 않았지만 셋째 달 십오일로 고정된다. 이 일곱 주간은 단순히 날을 세는 단위에 그치지 않는다. 연중 최대 축제인 과월절·무교절에 이은 보리 수확에서 시작하여 밀 수확이 끝나는 오십 일 기간 전체가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이때가, 비를 내려주시고 농작물의 풍요와 다산을 마련해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그분께서 자연의 주님이심을 고백하며     그분께 합당한 예를 갖추는 시기인 것이다(예레 5,24 참조). 이러한 특별한 기간을 마무리하는 주간절은 또 왕정 시대에 지방 성소들이 폐지되고 예루살렘의 성전이 유일한 성소로 자리를 잡으면서, 과월절·무교절처럼 이스라엘의 모든 성인 남자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하는 순례 축제가 된다(신명 16,11).

 

그런데 그리스 말을 쓰는 나라 밖 유다인들은 이 주간절을 ‘일곱째 안식일 다음날까지 오십 일을 헤아린다.’는 지침에 따라(레위 23,16), ‘오십 일째 되는 날의 축제’라는 의미에서 ‘오순절’이라고 부르게 된다(토비 2,1; 2마카 12,32; 사도 2,1; 20,16; 1고린 16,8).

 

 

농경 축제

 

밀을 수확하는 시기는, 지금처럼 달력이 완전히 정착되어 널리 쓰이지 않던 옛날의 팔레스티나에서는 일년 가운데 매우 중요한 절기였다(창세 30,14; 판관 15,1; 1사무 6,13; 12,17 참조). 또 농작물을 수확하고 그 맏물을 신에게 바치는 것은 많은 민족에게서 볼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수확절” 또는 “맏물의 날” 곧 주간절 역시 본디는 가나안에 살던 원주민들의 축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반유목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면서 이 농경 축제도 받아들여, 자기들의 신앙에 따른 축제로 만든 것이다.

 

이 축제일이 되면(레위 23,15-21; 민수 28,26-31)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처럼 일을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성인 남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고, 사제들은 이스라엘 온 공동체를 대신하여 제사를 바친다. 이때에 여러 짐승도 잡아 제물로 바치지만, 이날의 특별한 예물은 단연 새로운 곡식제물이다. 곧 새 밀가루에 새 누룩을 넣어 구운 빵 두 개이다. 무교절 동안에는 집 안에 있는 묵은 누룩을 모두 치우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누룩을 넣지 않고 빵을 만들어 먹는다. 그런데 하느님께 바치는 빵이나 과자는 항상 이렇게 누룩을 넣지 말아야 하고 제단 위에서 살라 바쳐야 한다(레위 2,4-10). 그러나 주간절에만은 예외이다. 새 누룩을 넣어 새 빵을 만든다. 그리고 하느님께 바친다는 뜻으로 그것을 손에 들고 제단 앞에서 흔든다. 이러한 공식 제사를 시작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자기들의 맏물을 사제를 통하여 하느님께 봉헌한다.

 

주간절은 이렇게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기쁨의 축제이다. 이러한 감사 축제 때에는 직접적으로 감사드릴 계기가 없는 이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여 그들과 더불어 하느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여야 한다. 특별히 신명기는 토지 없이 살아가는 레위인, 그리고 가난한 사회 저변층 곧 종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와 함께 “주 너의 하느님 앞에서 기뻐하여라.” 하고 권고한다(신명 16,11).

 

이러한 농경 축제가 당시의 달력으로 삼월에 거행되었기 때문에, 이 주간절이 신약성서 전후 시대에 와서는 점차 이스라엘인들의 이집트 탈출과 연계되기 시작한다. 이들이 같은 달에 시나이 산에 도착하여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또 그분에게서 율법을 받았기 때문이다(출애 19,1). 주간절이 계약을 회상하는 축제일이 된 것이다. 그리고 기원후 2세기부터는 이 주간절 날에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에게 율법을 받았다고 하여, 이날을 ‘율법 수여일’로 경축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유다인들의 주간절·오순절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더욱이 우리 나라에서는 성령께서 내리신 것을 ‘성령 강림 대축일’ 또는 ‘성령 강림절’이라는 용어로 경축하기 때문에, 오순절은 특별히 성서에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는 낯선 축제일 따름이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그리스 말인 ‘펜테코스테’에서 그대로 이어오거나 그 동안 변형된 형태를 성령 강림 대축일의 이름으로 사용한다(영어 - Pentecost; 프랑스어 - Pentecote; 독일어 - Pfingsten 등). 이로써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내는 그리스도인들도, 구약성서에서 비롯된 오순절, 특히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뒤의 첫 오순절에 유다인들에게 일어난 그 일을 되새기면서 다시 한번 성령의 인도를 기원하게 된다.

 

[경향잡지, 2001년 6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번역담당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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