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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성서의 세계: 안식일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8 조회수3,863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안식일

 

 

예수님과 안식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우연히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는다. 이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그래서 안식일 규정을 엄격히 지키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주의를 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잘못을 수긍하시기는커녕, 오히려 옛날 이야기를 하시며 그들을 두둔하신다. 게다가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씀으로 상대방들에게 일침을 놓으신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이 바리사이들에게는 알아들을 수도 없거니와 말도 되지 않는 것이다. “안식일의 주인”은 하느님 혼자이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마르 2,23-28).

 

이렇게 안식일 때문에 예수님과 바리사이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고, 또 그 갈등은 더욱 증폭된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다시 회당에 가셨는데 마침 거기에 불쌍한 병자 한 사람이 있었다.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이 노리던 기회가 왔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 주시한다. 여차하면 예수님을 안식일 파계자로 고발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예 그 병자를 한가운데에 세우시고 나서, 사람들에게 안식일이 어떠한 날인지 물으신다. 그리고서는 보란듯이 그 병자를 고쳐주신다. 바리사이들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도발적인 행위이다. 그래서 그들은 밖으로 나가 예수님을 없앨 의논을 한다(마르 3,1-6).

 

바리사이들은 왜 이렇게 안식일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죽일 모의까지 하는가? 안식일, 그리고 안식일 준수가 그들에게 그만큼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을 사형에 처할 수도 있을 만큼, 안식일은 유다인들에게 거룩한 날이었다.

 

예수님께서도 안식일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신다. 안식일이 되면 그분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으레 회당에 가서 전례에 참석하신다(마르 1,21 등). 그분의 장례도 안식일 규정에 따라 치러진다(마르 15,42; 16,1).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은 계속해서 안식일 규정을 지킨다(사도 1,12). 바오로 사도도 마찬가지이다(사도 13,14.42; 16,13; 17,2; 18,4).

 

 

휴식의 날

 

안식일은 히브리 말로 “샵바트”라고 하는데, 서양에서는 영어의 sabbath처럼 히브리 말을 그대로 음역하여 사용한다. 이 말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샤바트”라는 동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이 동사는 본디 ‘그치다, 멎다’(창세 8,22; 여호 5,12), ‘하던 일을 멈추다, 쉬다’(출애 16,30; 23,12), 또 특수한 용도에서는 ‘안식일을 지키다’를 뜻한다(레위 23,32). 곧 “샵바트”는 한 주간의 마지막 날로서 ‘하던 일을 그치고 쉬는 날’이다. 그래서 한·중·일 한자권에서는 이 “샵바트”를 그 의미에 따라 “안식일”이라고 옮긴다.

 

일곱 날을 시간의 한 단위로 정하고 마지막 날을 쉰다는 이 주간(週間) 제도는, 비단 구약성서의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이제는 종교나 신앙과 관계 없이 거의 모든 사람의 일상 생활을 규정짓는 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이 제도가 어디에서 유래하는지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종교와 민족이 생기기 전부터 안식일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실을 가리키는 한 예로, 이스라엘의 종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나이 계약 이전의 일을 이야기하는 출애 16,22-30을 들 수 있다. 창세기 저자는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주간과 안식일 제도까지 제정하셨다고 말한다(창세 2,2-3).

 

안식일의 역사적 유래가 어떠하든, 이 제도는 하느님의 백성을 다른 민족들과 구분짓는 커다란 표징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이 날이 이스라엘의 신앙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신앙은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과 맺어주신 계약에 따라 정립된다. ‘야훼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야훼님의 백성이 된다.’는 이 계약이 선택된 민족의 존립 근거이다. 그리고 안식일은 이러한 계약을 맺어주신 하느님께서 지정하신 날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다른 날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거룩한 날이다. 이렇게 하여 안식일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한 근본 요소가 된다. 안식일을 지키느냐 마느냐가 계약의 준수 여부로 이어지고, 그것은 또 하느님과의 관계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안식일 준수가 십계명 가운데 하나로 자리를 잡는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출애 20,8; 신명 5,12).

 

 

야훼님의 거룩한 날

 

성서의 사람들이 안식일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사회적이고 인도적인 이유에서 모든 사람, 그리고 짐승까지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그 날에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너의 소와 나귀, 그리고 그 밖의 너의 모든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여 너의 남종과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해야 한다”(신명 5,14). 이렇게 모든 사람과 집짐승에게 공평한 휴식의 날은 이스라엘인들의 쓰라린 체험에 근거한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였다. 그러한 이스라엘인들에게 하느님께서는 해방과 안식을 마련해 주신다. 이제 그들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이 해방과 안식을 다른 모든 존재와 함께 나누어야 한다(신명 5,15).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탈출 20,11. 그리고 창세 2,2-3 참조).

 

이러한 연유로 안식일은 단순히 일을 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아래에서, 그리고 그분께서 창조하시고 특히 계약을 맺어주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아래에서 쉬는 날이다. 한마디로 이 날은 “주님의 안식일”(레위 23,38), “주님을 위한 거룩한 안식의 날”이다(출애 31,15). 그래서 안식일을 지킴은 자기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자기 민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주님 곧 야훼님을 기억하는 것이고, 또 그분께서 베푸시는 기쁨과 구원에 동참하는 것이다(이사 56,2; 58,13-14; 예레 17,19-27). 반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음은 그렇게 해주신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은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 될 자격을 상실하고(출애 31,14; 민수 15,32-36) 백성은 하느님에게서 집단적인 징벌을 받게 된다(에제 20,13; 느헤 13,17-18).

 

안식일에 대한 이러한 생각과 규정은 처음부터 확정되어 내려온 것이 아니라, 역사가 흐르면서 점점 꼴을 갖추고 강화되어 온 것이다. 특히 기원전 6세기 말에 유다 왕국이 멸망하고 많은 사람이 유배살이를 하게 되면서, 안식일은 유다인들의 삶에서 더욱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교의 중심인 제사를 거행하는 성전이 없이, 이국 땅에서는 다른 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본토에서는 다른 종교들을 신봉하는 여러 종족과 함께 살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야훼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실은, 이제 할례나 안식일 준수 같은 것으로만 분명히 드러낼 수 있게 된다. 안식일 준수가 야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가 되고 그 신앙을 드러내는 “징표”가 되는 것이다(출애 31,13; 에제 20,12).

 

이렇게 안식일이 더욱 중시되면서, 이 날의 안식을 어떻게 지키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안식일은 본디 기쁜 축제의 날로(이사 1,13; 호세 2,13 참조) 장사나 농사를 멈추고(출애 34,21; 아모 8,5), 성소에 가서 하느님을 경배하고(이사 1,12-13 참조) 때로는 예언자를 찾아가 말씀을 듣는 날이었다(2열왕 4,23). 처음에는 이렇게 비교적 단순한 안식일에, 점점 안식을 깰 수 있는 행동이나 일들을 금하는 금령들이 덧붙여진다. 포도주 짜는 확을 밟거나 짐을 나르는 일(예레 17,19-27; 느헤 13,15), 여행(이사 58,13), 더 나아가서는 이천 걸음 이상 걷는 것도 금지된다(사도 1,12 참조). 마카베오 시대에는 적군의 공격을 받고도 안식일 규정을 어기지 않으려고 그냥 몰살당하기까지 한다(1마카 2,32-38; 2마카 6,11). 이러한 극단적인 자세는 수정되지만(1마카 2,39-41), 전체적으로 안식일 규정은 점점 더 엄해진다. 그래서 신약성서 시대에 일부에서는 부부관계, 심지어는 뒷간 가는 일조차 삼갔다. 나중에 랍비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39가지 일의 목록을 작성해 내기까지 한다.

 

 

안식일과 주일

 

본디 휴식과 기쁨의 날인 안식일이, 곧 하느님을 위하여 거룩히 지내는 날이 이렇게 일종의 금령의 날로, 많은 사람에게 짐스러운 날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과 바리사이들 사이에 안식일 갈등이 일어난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폐지하지 않으시고, 갖가지 금령으로 본말이 전도된 안식일의 원의미를 되살리신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안식일은 하느님을 위한 날이다. 그런데 하느님을 위함은 이웃을 위함으로 구체화된다. 그래서 안식일 역시 단순히 무엇을 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날, 이웃의 선과 생명에 도움을 주는 날이라는 것이다(마르 3,4 참조).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8). 이 “사람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 다음날 부활하심으로써, 결국 옛 계약의 “징표”인 안식일을 폐기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인류의 새 빛으로 부활하신 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주간 첫날”이(사도 20,7; 1고린 16,2) “주님의 날”이 된다(묵시 1,10).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완전한 안식(히브 4,9-11 참조), 영원한 새날을 향하여 빛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주간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예수님께서 다시 밝혀주신 안식일의 원의미를 명심하면서, 이 날을 “주님의 날”로 지내야 한다.

 

[경향잡지, 2001년 1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번역담당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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