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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성서의 세계: 물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7 조회수4,472 추천수1

성서의 세계 : 물 (1)

 

 

물이 귀한 나라

 

사람 몸의 70% 이상이 물이다. 옛날 사람들은 이러한 수치를 몰랐다. 그러나 물이 인간은 물론 동물과 식물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집회서의 저자는 "인간 생명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을 나열하면서 물을 첫번째로 꼽는다(집회 29,21; 39,26).

 

그런데 성서의 땅은 물이 귀하다. 북쪽에 갈릴래아 호수가 있고 거기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요르단 강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강은 비가 얼마 내리지 않아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는 요르단 계곡을 관통하여 사해(死海)로 흘러든다. 이스라엘인들이 살던 곳은 주로 이 계곡의 서쪽 산악 지방이었다. 그래서 요르단 강은 북쪽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에게 직접으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다른 하천들이 없지는 않지만 규모가 작을뿐더러 사철 물이 흐르는 곳이 드물고, 일부는 하류 쪽에만 물이 흐른다. 또 많은 하천이 ‘와디(=마른내)’로서 우기(雨期)에만 물이 있다. 아모스 예언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하고 선포한다(아모 5,24). 여기에서 "강물"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은 본디 "언제나 물이 흐르는 내"이다. 내[川]가 두 종류여서 이렇게 자세히 말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샘은 그런대로 적지는 않았다. 그래도 우리 나라와 같은 땅과 비교하면 귀한 편이었다. 그래서 흔히 샘이 있는 곳에 촌락이 생기고 그 촌락 이름에 ’샘’이라는 말이 들어가게 된다. 예컨대 엔게디(여호 15,62), 엔도르(시편 83,11), 엔로겔(2사무 17,17) 등 지명에서 ’엔’은 샘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샘은 보통 높은 곳에 자리잡은 성밖에 있었다. 그래서 전쟁, 특히 성이 포위될 때를 대비하여 매우 일찍부터 성안과 샘을 연결하는 갱도나 통로, 또는 수로를 만들었다. 유다의 히즈키야 임금이 순전히 바위 속을 뚫어 수로로 완성시킨 예루살렘의 터널은 533미터에 달한다(2열왕 20,20).

 

우물 역시 매우 귀하였다. 그래서 우물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고(창세 21,25; 26,18-22) 옛날의 ’우물 파는 노래’가 전해지며(민수 21,17-18), 야곱 선조가 팠다는 우물이 천수백 년 뒤까지 내려온 것이다(요한 4,6). ’우물’도 지명으로 쓰인다. 예컨대 브엘세바(창세 21,31)에서 ’브엘’이 우물이라는 말이다. 지하수가 많지 않아 우물은 주로 평지에만, 그것도 때로는 상당히 깊게 파야 했다.

 

 

빗물과 저수 동굴

 

물은 곧 생명이다. 생존과 생계를 오로지 땅에 의지할 수밖에 없던 옛날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하였다. 성서의 사람들에게는 호수나 하천, 샘이나 우물만으로는 필요한 물을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빗물이 큰 수자원이었다(신명 11,11 참조). 그런데 팔레스티나 땅은 비와 관련해서 두 가지 면에서 여건이 불리하다. 첫째는 비가 많이 내리지 않는다. 일년 강수량은 해마다 달라지지만, 예컨대 예루살렘은 대략 700밀리미터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일년에 200밀리미터, 심지어 100밀리미터밖에 내리지 않는다. 우리 나라 역시 지방마다 다르긴 하지만 중부 지방의 강우량을 1200밀리미터 정도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여기에다 강들이 여럿 있음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로써 성서의 땅이 상당히 메마른 지방임을 짐작할 수 있다.

 

두번째로 불리한 점은 비가 오지 않는 기간이 길다는 사실이다. 우기는 대략 12월초부터 3월초까지이다. 우리 나라의 장마철처럼 한꺼번에 많이 또 며칠씩 비가 오지도 않는다. 이 우기 앞과 뒤로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온다. 그리고 건기 곧 4, 5월에서 10, 11월 사이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이렇게 물이 귀한 데다가 비마저 한정된 기간에 조금밖에 오지 않기 때문에, 팔레스티나 땅에서는 빗물을 가능한 대로 많이 그리고 오래 모아둘 필요성이 절실하였다. 그래서 이 지방 사람들은 인공 못이나 저수지 외에(2사무 2,13; 이사 7,3; 요한 9,7 등), 옛부터 ’저수 동굴’이라는 특수 시설을 고안해 내었다(신명 6,11; 느헤 9,25). 팔레스티나 지방은 바위가 많다. 지하 바위에 인공적으로 동굴을 파서 지붕과 마당이나 거리에 흐르는 빗물을 받아놓는 것이다. 바위가 갈라져 물이 새는 곳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모르타르로 덧칠을 하기도 하였다. 물을 가능한 대로 서늘하게 저장하려고 밑으로는 넓고 위로는 좁게 만들어 돌 같은 것으로 덮었다. 이러한 저수 동굴은 주로 집 곁에 팠지만, 짐승에게 먹이고 농사에 쓰려고 들에 만들기도 하였다(2역대 26,10).

 

아무리 잘 보관하여도 저수 동굴의 물은 ’죽은 물’로서, ’산 물’ 곧 생수보다는(레위 14,5) 훨씬 못하였다(예레 2,13 참조). 그런데도 물이 워낙 귀하기 때문에, 자기의 저수 동굴에서 물을 길어 마시는 것을 평화와 번영의 표징으로 여겼다(2열왕 18,31).

 

팔레스티나에서도 물을 길어 나르는 것은 여자들의 일이었다(창세 24,11; 1사무 9,11; 요한 4,7). 그래서 최후의 만찬을 준비할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을 길어 가는 사람을 따라가라고 분부하시는데(마르 14,13), 그 사람이 남자였기 때문에 쉽게 찾아 따라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물과 정화

 

고대인들은 집짐승과 곡식 등 사람이 먹는 양식을 여러 가지 형태로 신(神) 또는 하느님께 바쳤다. 이스라엘인들은 하느님께 올리는 제주(祭酒)로 포도주를 사용하였다(레위 23,13 등 참조). 그러나 인간에게 그토록 중요한 물은 예물로도 또 그것에 곁들이는 첨가물로도 바치지 않았다(1사무 7,6만 예외인데, 그 의식의 기능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물은 이와 다른 의미의 종교적 용도로 많이 쓰였다. 생명의 바탕인 물은 정화의 능력도 지닌다. 이러한 물이 성전에서 많이 사용된 것이다. 성전용 물만 나르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다(여호 9,21). 물을 담거나 나르는 여러 기구도 성전 안에 마련되어 있었다(출애 30,17-21; 1열왕 7,23-39). 이렇게 마련된 물로 특히 사제들은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여러 직무를 수행하기 전에, 그리고 제단에서 의식을 거행하기 전에 몸 또는 손과 발을 씻어야 한다(출애 29,4; 레위 16,24 등). 이는 생사와 관련된 엄한 규정이었다(출애 30,20).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제사나 기도로 그분께 다가가려면 사람과 제물과 기물(器物)이 깨끗해야 한다. 깨끗함은 단순히 외형적·위생적 현상이 아니다. 민족마다 터부 또는 금기가 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사람 몸에 나타나는 병적·생리적 현상이라든지(레위 14,1-9; 15,25-27), 시체와 접촉하는 것같이(레위 11,24-28) 의도적 또는 무의식적 행동으로 사람이나 기물이 일정 기간 부정하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그 자체로서 범법 행위가 아니다. 부정(不淨)이 어떤 도덕적·윤리적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일시적으로 경신례(敬神禮)를 통한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를 제의적(祭儀的) 정과 부정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부정을 벗으려면 일정 기간과 일정 의식 끝에 물로 옷을 빨고 몸과 때로는 기물까지 씻어야 한다. 특히 물에 몸을 담아 씻는 침수(沈水) 의식이 구약성서 말기에 오면서 여러 종교 운동 단체에서 애용된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비롯하여 그리스도교의 세례에서도 물이 큰 구실을 하게 된다.

 

구약성서에서는 정화의 용도로 쓰이는 몇 가지 특별한 물도 언급된다. 만드는 방법이라든가 기능이 늘 분명하지는 않지만, "거룩한 물"(민수 5,17), "속죄의 물"(민수 8,7), 그리고 "정화의 물"(민수 19,1-10) 등이 있다. 이것들은 우리는 현재 쓰는 ’성수(聖水)’의 전신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구약성서 시대에, 예언자들은 내적 정결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이사 1,16). 그러나 정결례(淨潔禮) 규정들을 신약성서 시대에 오면서 특히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폭넓고 엄격하게 적용했기 때문에,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 정과 부정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마르 7,1-23 등).

 

 

생명의 물

 

성서의 땅에서는 생존이 온전히 물에 달려있었다. 그런데 물이 귀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물, 특히 샘이나 우물에서 바로 길어올리는 생수(生水)에 대한 갈망이 뿌리깊이 박혀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하느님께서 장차 마련하실 세상에서는 물이 큰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이스라엘은 "물이 풍부한 정원",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고(아시 58,11), 광야와 사막에 강과 샘이 흘러 생명이 솟으리라는 것이다(이사 41,18-19; 44,3-4 등). 에제키엘은 새 세상에 들어설 성전에서 시작한 강이 광야를 거쳐 사해까지 흘러 들어가면서, 주변을 온통 생명의 땅으로 만드는 환시를 보기도 한다(에제 47,1-12).

 

물이 생명 그리고 삶의 질과 직결되기 때문에, 성서는 다른 이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의인의 입이라든가 현인의 가르침, 그리고 지혜를 "생명의 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잠언 10,11; 13,14; 16,22). 그러나 참되고 영원한 삶을 보장하고 또 직접 마련해 주는 "생명의 샘" 그 자체는 하느님(예레 2,13; 17,13), 그리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실 수밖에 없다(요한 4,14; 7,37-39; 묵시 21,6).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55장 1절에 이어서,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하고 사람들을 부르신다(요한 7,37과 묵시 22,17). 그래서 우리도 시편 36의 저자처럼 감탄과 감사의 정으로, "정녕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나이다." 하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경향잡지, 2000년 5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성서의 세계 : 물 (2)

 

 

야훼님과 바알

 

이스라엘인들은 본디 주로 양과 염소를 치며 살던 유목민이었다. 이 작은 가축들은 물이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인들은 농경지와 광야의 경계 지역을 떠돌아다니면서, 환경이 허락되는 대로 일시적으로 간단한 농사도 지으며 살았다. 그래서 이들을 광야나 사막 한가운데에서 낙타 같은 큰 짐승을 키우며 사는 종족과 구분하여 ’반(半)유목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다. 이는 생활 양식이 완전히 바뀜을 뜻한다. 더 이상 물과 풀을 찾아 옮겨 다니지 않고 한곳에 정주한다. 그러면서 목축도 하기는 하지만 주로 농사를 짓는다.

 

생활 양식은 종교 형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인들은 야훼님을 섬기며 광야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자연히 자기들의 하느님을 광야 생활과 관련지어 생각하고, 또 그러한 생활 방식에 따라 그분을 섬겼다. 이러한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새로운 생활 양식과 함께 생소한 종교 형태를 접하게 된다. 우선 그들은 야훼님 한 분만을 하느님으로 알아 섬겨왔는데,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이 많은 신(神)을 숭배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또 이들이 특히 바알이라는 신을 열심히 숭상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가나안은 물이 귀한 지방이다. 자연히 제때에 비가 알맞게 오느냐, 오지 않느냐에 따라 풍년과 흉년, 더 나아가 삶과 죽음이 좌우되었다. 가나안인들은 이러한 자연 현상을 관장하는 신이 따로 있다고 믿었다. 곧 폭풍우와 비의 신 바알이다. 자연의 풍요와 다산(多産)이 바로 바알에게 달렸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매우 관능적인 의식으로 이 바알을 섬겼다. 신전에서 벌이는 인간의 성적(性的) 행위로써 신도 그렇게 하여 자연의 생식력 또는 생산성을 촉진시킨다는 것이다.

 

황소의 모습으로 조각되는 이런 바알에 대한 신앙을 보면서 이스라엘인들은 이중으로 유혹을 받게 된다. 첫째, 자기들의 농경지 생활을 주관한다는 바알만 만족시키면 풍요와 다산이 보장된다는 기대이다. 둘째, 바알을 만족시키는 일이 어렵지 않을뿐더러, 그 관능적 의식 때문에 ’인간적’으로도 상당히 끌린다는 사실이다. 이리하여 가나안 땅에 사는 하느님의 백성에게 ’물의 신 바알’이 줄곧 유혹의 대상이 된다.

 

 

야훼님과 바알의 ’대결’

 

이스라엘인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에 야훼님께서 물과 전혀 관련이 없으셨던 것은 아니다. 야훼님은 당신 백성에게 먹을 것과 마실 물을 마련해 주시는 분이셨다. 이는 성서의 여러 전통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바이다(출애 15,22; 17,7; 민수 20,1-13; 신명 8,15-16; 느헤 9,15; 시편 78,15-16.20; 105,41 등). 이 전통에서는 (광야에는 비가 거의 오지 않기 때문에) 샘이 문제였다. 그런데 이제 가나안 땅에서는 비가 관건이다. 과연 야훼님께서는 바알보다 위대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 홀로 비까지 내려주실 수 있는 하느님이신가? 백성의 실생활은 불행히도 많은 경우 바알 쪽으로 기운다. 바알만 따르기도 하고, 야훼님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면서 바알을 끌어들여 신앙의 순수성을 훼손시키기도 한다.

 

마침내 기원전 9세기 전반부, 아합이라는 임금이 북부 이스라엘 왕국을 다스리던 시대, 가르멜 산 위에서 일대 결전이 벌어진다. 아합은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혼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도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세우고 이 신을 숭배한다(1열왕 16,31-32). 왕가가 이렇게 솔선수범하여 나서자, 이스라엘 온 땅에 바알 종교가 번창하게 된다. 그리하여 야훼님을 섬기는 예언자 가운데에서 엘리야만 남아 야훼 신앙을 위하여 고군분투한다. 이 엘리야가 우상 숭배에 빠진 아합, 그리고 야훼님과 바알에게 ’양다리를 걸친’ 백성을 가르멜 산으로 불러, 수백 명에 이르는 바알의 ’예언자’들과 대결한다(1열왕 18,20-46). 야훼님과 바알, 둘 가운데에서 누가 가뭄을 면하게 하는 비를 내려주는지, 누가 참 하느님이신지 판가름내자는 것이다. 결과는 야훼님의 승리로 끝나고 백성은 "야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하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자리에 없던 이세벨 왕비가 엘리야를 죽이기로 작심하자, 엘리야는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피신한다(1열왕 19,1-8).

 

이리하여 이스라엘인들의 신앙에 물이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계곡에서 샘이 터져 땅이 곡식을 내놓게 하시는 분은 바알이 아니라 야훼님이시다. 곧 야훼님께서 자연의 풍요와 다산까지 관장하신다는 것이 이스라엘인들의 중요한 교리가 된다. 그래서 시편의 저자는 이렇게 노래한다. "당신께서는 땅을 찾아오셔서 물로 넘치게 하시어 / 더없이 풍요롭게 하시나이다. / 하느님의 개울은 물로 가득하고 / 당신께서는 곡식을 장만하시나이다. / 정녕 당신께서 이렇게 마련해 주시나이다. / 그 고랑에 물을 대시고 두둑을 고르시며 / 비로 부드럽게 하시어/새싹들에게 강복하시나이다 / 당신의 선하심으로 한 해를 꾸미시어 / 당신께서 가시는 길마다 기름이 방울져 흐르나이다"(시편 65,10-12. 그리고 욥 5,10; 12,15; 28,25-26; 36,27-28; 시편 104,10-15; 147,8; 이사 41,18; 44,3; 예레 14,22; 아모 5,8; 9,6 등도 참조).

 

 

야훼님과 물

 

지난달에 보았듯이 물은 생명의 원천일뿐더러 정화하는 힘도 지닌다. 게다가 가나안 땅에서는 물이 이렇게 종교적 의미까지 지닌다. 그런데 구약성서를 보면 물에는 종교적으로 또 다른 면도 내포됨을 알 수 있다.

 

창세기 1장 2절은 창조 이전에는 ’땅이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있었으며, 어둠이 심연을 덮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큰물’ 또는 ’깊은 물’로 옮길 수도 있는 ’심연’이다. 이 용어와 이어지는 창조 이야기의 배경에 깔린 사상은 고대 근동 전역에 퍼져있던 창조 신화와 관련된다.

 

태초에 신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다. 바빌론 신화에서는 마르둑, 가나안 신화에서는 바알이 창조 이전의 상태를 가리키는 ’혼돈의 용(龍)’을 쳐이긴다. 이 용이 바빌론에서는 ’티아맛’, 가나안에서는 ’레비아단’ 또는 ’라합’으로 불린다(욥 3,8; 시편 74,14; 이사 27,1 등). 주인공 신은 이 괴물의 거대한 시체를 둘로 나누어 천상과 지하로 만든다. 이로써 혼돈의 ’큰물’이 ’윗물’과(시편 104,3; 148,4 참조) ’아랫물’로(출애 20,4; 신명 4,18; 5,8 참조) 나뉜다. 태초의 물이 없어지지 않고 위와 아래로 밀려 가두어졌을 뿐이다. 이리하여 인간 세상은 호시탐탐 경계를 넘어 지상을 창조 이전처럼 다시 뒤덮으려는 두 ’큰물’ 사이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창조 신화의 배경에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그리고 나일 강의 범람, 또 언제라도 육지를 덮칠 듯이 넘실대는 거대한 바다로부터 느끼는 인간의 원초적 공포가 깔려있다(물에 대한 이러한 두려움은 홍수와 해수면 상승으로 현대에도 계속된다). 이리하여 물은 서로 배제하면서도 깊은 관련이 있는 두 극 또는 현상을 동시에 포괄하게 된다. 곧 물은 질서와 혼돈, 축복과 재난, 그리고 생과 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서의 창세기는 이러한 고대 근동의 창조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신화적 요소들은 모두 제거하고 나서 그것을 이용한다. 절대적 권능을 가지신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외적 필요성이나 강제 없이 당신의 자유 의지로, 그리고 어떠한 물질의 도움도 없이 당신의 말씀 하나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다.

 

그런데 특히 시적인 운문(韻文)에서는 창조 신화의 요소들이 더러 쓰인다. 그 문맥은 먼저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찬양의 노래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반항하는 물을 제어하시고 경계를 정하셔서 그 선을 넘지 못하게 명령하셨다. 근동의 신화에서 창조의 재료로 쓰였던 레비아단도 그분의 조물에 불과하다. 그래서 시편의 저자는 태초의 혼돈, 물과 관련된 하느님의 업적, 그리고 창조 뒤의 모습을 이렇게 노래한다. "당신께서 대양을 그 위에 옷처럼 덮으시어/산 위까지 물이 차있었나이다. / 당신의 꾸짖으심에 물이 도망치고 / 당신의 천둥소리에 놀라 달아났나이다.… / 당신께서 경계를 두시니 물이 넘지 않고/땅을 덮치러 돌아오지도 않나이다.… / 주님, 당신의 업적들이 얼마나 많사옵니까? / 그 모든 것을 당신 슬기로 이루시어 / 세상이 당신의 조물들로 가득하나이다. / 저 크고 넓은 바다에는/수없이 많은 길짐승들이, / 크고 작은 짐승들이 우글거리나이다. / 그곳에 배들이 돌아다니고/당신께서 만드신 레비아단이 노니나이다"(시편 104,6-7.9.24-26).

 

물은 일상 생활에서 생명의 바탕이다. 그것은 또한 이렇게 생명의 기원 곧 세상의 창조와 관련해서도 중대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 탈출로써 하느님의 백성으로 ’창조된다.’ 이 탈출에서 갈대바다를 건넌 사건이 결정적 의미를 지닌다. 이스라엘의 시인들은 이 건넘을 하느님께서 혼돈의 물을 제어하시고 그 속에 길을 내시어 당신 백성을 혼돈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신 것으로 표현한다. "하느님, 물들이 당신을 보았나이다. / 물들이 당신을 보고 요동치며/해심마저 떨었나이다.… / 당신의 길이 바다를, / 당신의 행로가 큰물을 가로질렀지만 / 당신의 발자국들은 보이지 않았나이다"(시편 77,17-20. 그리고 출애 15,8; 이사 51,9-10도 참조).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창조와 관련해서든 역사와 관련해서든 모든 면에서 물의 주님이시다. 그래서 물도 사람을 비롯한 모든 조물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게 된다. "바다와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이 소리칠지어다. / 강들은 손뼉치고 / 산들도 함께 환호할지어다. / 주님 앞에서 환호할지어다"(시편 98,7-9). [경향잡지, 2000년 6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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