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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성서의 세계: 입양, 양자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7 조회수3,516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입양, 양자

 

 

시편 2편에 보면 이러한 말씀이 나온다. "’나의 거룩한 산 시온 위에 내가 나의 임금을 세웠노라!’ 주님의 결정을 나는 선포하리라. 나에게 말씀하셨도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6-7절). 이 시편은 본디 새 임금의 즉위식에서 예언자가 임금을 위하여 불렀던 노래이다. 이때에 예언자가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라는 하느님의 결정을 선포하는 것이다. "너는 내 아들(이다)"이라는 말은 당사자를 양자로 들인다는 뜻이다. 그리고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라는 표현은, "오늘" 곧 등극일에 새 임금이 주님께 입양됨을 새로운 탄생으로 설명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에 따르면, 입양 의식의 핵심은 양자를 들이는 이가 양자가 될 사람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하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양 관습은 고대 근동 전역에 널리 퍼져있었다. 성서의 사람들도 이 관습을 받아들여서 자기들의 임금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에 적용시킨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에서도 입양이 자주 이루어졌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입양의 뜻과 목적을 살펴보아야 하겠다. 입양은 ’혈연 관계가 아닌 일반인 사이에, 양친과 양자로서의 법적인 친자 관계를 맺는 일’이다(동아 새국어사전).

 

입양의 목적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다. 고대 근동에서는 아들이 없는 부부에게 이름과 재산을 이어갈 상속인을 마련하고, 일품이 많이 드는 목축이나 농사에 노동력을 보태며, 노년에 의지하기 위하여 양자를 들였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조상의 제사와 집안의 계승이 입양의 주목적이었다. 이렇듯 입양은 원래 양친(養親)이나 그 가문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현대에 들어와서야 입양되는 사람, 특히 고아나 버림받은 아이들의 보호 쪽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양친을 위한 전통적 입양과 양자를 위한 새로운 입양이 병존한다. 이 새로운 입양에서는 (물론 아직도 혈연을 중시하고 남아를 선호하는 우리 나라에서는 좀 다르지만) 입양되는 아이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통적 입양에서는 원칙적으로 남자만 양자로 들였다. 이러한 사실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하겠다.

 

성서 쪽으로 눈을 돌리면, 우선 놀랍게도 입양에 관한 법규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 입양이 이스라엘에서는 하나의 제도로 정착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표지이다. 물론 입양과 비슷한 예들은 성서의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 이집트의 공주는 어린 모세를 아들로 삼는다(출애 2,10). 또 에돔의 왕손 하닷이라는 사람이 이집트 임금의 처제와 혼인하여 그누밧을 낳는데, 이 그누밧을 왕비가 맡아서 왕자들과 함께 키운다(1열왕 11,20). 그리고 모르드개는 친족의 딸 에스델을 딸로 맞아들여 키운다(에스 2,7.15). 이 세 경우가 모두 입양의 성격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이것들을 엄격한 의미의 입양으로 보기는 어렵다. 또 전부 외국에서 일어난 사례들로서 이스라엘의 입양 제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입양과 비슷한 또 다른 사례들을 특별히 이스라엘의 선조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아이를 낳지 못한 라헬은 자기의 몸종 빌하를 남편 야곱에게 주어서 자기 대신에 아들들을 낳게 한다. 그러자 이미 아들들이 있는 레아도 그와 똑같이 하여 아들들을 더 얻는다(창세 30,1-13. 그리고 창세 16,2도 참조). 야곱은 손자, 곧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나쎄를 자기 아들로 삼는다(창세 48,5.12). 요셉의 손자 "마길의 아들들도 태어나 요셉 무릎에 안긴다"(창세 50,23. 그리고 룻 4,16도 참조). 이 네 경우에 모두 일정한 입양 의식이 언급된다. 곧 입양되는 아이를 입양하는 이의 무릎 사이에 또는 무릎 위에 놓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례들도 원래 의미의 입양이라 할 수 없다. 같은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혈족이 아닌 사람과 법적인 친자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본부인, 할아버지, 또는 증조부가 첩자(妾子), 손자, 또는 증손자를 아들로 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좀 다르다. 아들이 없는 그는 자기의 집종 엘리에젤을 "집안의 상속자"로 삼으려고 생각한다(창세 15,2-3). 사실 종을 양자로 들이는 관습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문헌들에서도 입증된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선조 시대에 메소포타미아의 관습이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후대의 이스라엘인들도 그러한 관습을 따랐다고 볼 수는 없다. 또 아브라함의 입양 의도도 하느님의 약속 덕분에 생각으로 그치고 만다(창세 15,4-6).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다른 민족들 사이에 널리 퍼진 양자 제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는 이 관습이 거의 실행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인들이라고 양자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한 필요성은, 아들 없이 과부가 된 여자를 죽은 그 남편의 형제가 맞아들여서 아들을 낳아 고인의 이름을 잇게 하는 수숙혼(嫂叔婚) 제도라든가(경향잡지 1998년 3월호 참조), 아들 없이 죽은 아버지의 유산을 딸이 이어받아 그 상속지가 계속 아버지의 이름으로 존속하게 하는 규정(민수 27,1-11; 36,1-12) 등으로,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충족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입양이 이스라엘인들의 일상생활에서는 별다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지만, 신학적으로는 독특한 방식으로 쓰인다. 곧 하느님과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은유(隱喩)로 쓰이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시편 2장 7절이 바로 그러하다. 특별히 이집트 같은 나라에서는 임금을 신(神)의 친아들로 여겼다. 이스라엘인들은 이집트를 비롯한 주변 국가들에서 왕정 제도를 도입하면서도, 하느님께서 임금을 직접 낳으신다는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하느님과 임금의 특별한 관계를 입양의 형식을 빌려서 표현한다. 이 특수한 관계의 근거는 왕실 자체나 임금 자신에게 있지 않다. 하느님께서 나단 예언자를 통하여 다윗에게 내리신 약속 또는 계약이 그 유일한 근거이다(2사무 7장). 하느님께서는 순전히 당신의 자애로써 임금의 아버지가 되어주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인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이미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어 왔다. 출애굽기 4장 22절, 신명기 14장 1절과 32장 6절, 이사야 63장 16절 등에서는 입양에 관한 별다른 시사 없이,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가 부자 관계로 표현된다. 또 예레미아 3장 19절과 31장 9절, 호세아 11장 1절 같은 곳에서는 입양 관계가 직간접적으로 시사된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인들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셔서, ’이스라엘은 당신의 백성이 되고 당신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는’ 계약을 맺어주신다. 전적으로 자유로우신 하느님의 선택, 그분의 온전한 은혜로 맺어진 이 계약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인들은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예레 3,4).

 

입양의 은유적, 신학적 이용은 신약성서에서도 계속된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그 큰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 3,1).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은 위에서 보았듯이 이미 구약성서에서 시작되었지만, 그곳에서는 ’창조주로서의 하느님’, ’주(主)님으로서의 하느님’이 전면에 부각된다. 신약성서에 와서는 이 요한의 첫째 편지의 구절에서나 ’주님의 기도’에서 이미 엿볼 수 있듯이, ’아버지’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주개념이 된다. 하느님께서는 "그 큰 사랑"으로 당신과 "똑같으신"(요한 1,18; 필립 2,6)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1요한 4,9), 이 성자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써 이루어지는 "새로운 계약"을(루가 2,22) 인류와 맺어주신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이 새 계약 덕분에(2고린 3,6), 바로 이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로마 8,15). 아들이 된다는 것은 친아들과 함께 아들의 권리도 받음을 뜻한다.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로마 8,17)

 

[경향잡지, 1998년 11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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