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자료실

제목 [문화] 유다인의 집회장소, 회당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7 조회수4,694 추천수1

[성서의 풍속] 유다인의 집회장소, 회당

 

 

트로아스에서 기도 중에 신비로운 영상을 본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이끄심대로 자신의 계획과는 전혀 다른 방향인 마케도니아의 필립비에 도착했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 일행은 로마의 군사도시였던 필립비에서 유다인 회당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안식일이 되자  유다인 기도처가 있으리라 생각되는 강가를 찾았다. 조용하고 마실 물도 있어 기도와 명상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드디어 사도 바오로 일행은 기도하는 여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기도하고 있는 그 여인들에게 다가가 인사하고는 주님의 복음 말씀을 전했다(사도16, 6-14).

 

이처럼 넓은 의미로 유다인들이 함께 모여 기도를 하는 곳이면 회당이라 할 수 있다. 즉 건물이 아니어도 유다인들이 모여 해변, 강가, 숲속 등에서 기도를 한다면 거기도 역시 회당이라는 범주에 포함된다.

 

회당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시나고가(synagoga)는 '집회'(集會) 또는 '집회하는 곳'을 뜻한다. 신약성서에서 회당이란 말은 가르침을 베풀기 위한 유다인의 집회(마태 4,23; 마르 1,21; 루가 4,15; 요한 6,60)나 종교 집회를 행하는 건물(마태 10,17; 루가 7,5; 사도 22,19)을 가리켰다.

 

유다인들의 기도장소인 회당은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에 정착하던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또한 바빌론 유배로 이스라엘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자 건물, 강가, 집 등에 모여 율법서를 읽으면서 함께 기도했다. 그러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뒤에도 이 같은 집회를 계속한 것이 그 기원이라는 주장도 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팔레스티나 곳곳에 회당이 세워지고, 바빌론, 시리아, 소아시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이탈리아, 아프리카 등지에도 많은 회당이 세워졌다. 서기 70년 성전 파괴 당시 예루살렘에는 394개 회당이 있었다고 한다. 1세기경에는 유다인 공동체가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반드시 회당이 세워져 있었다.

 

본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께 경배를 드리고 번제를 올리고 속죄를 하는 유일한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587년부터 이스라엘은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바빌론에서도 유다인들은 여전히 같이 모여서 율법을 듣고 묵상하였다. 따라서 자연히 회당은 유다교의 예배의식, 각종 집회, 교육훈련 장소로 쓰였다. 회당에는 율법을 공부하는 책방과 공부하는 교실이 하나씩 있었다.

 

자치 단체나 마을과 같은 한 집단이 자기 소유의 회당을 지었다. 그러다가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회당의 중요성은 훨씬 더 커졌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1세기 이후 유다교는 회당을 중심으로 존속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유다인 공동체는 회당에서 하루 세번 즉 아침, 점심, 저녁 예배와 주 1회 안식일 예배 그리고 종교적 절기마다 특별의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회당은 교제, 휴식, 자선행사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회당은 예루살렘을 본떠 건설했다. 회당 앞쪽 끝에는 성서 두루마리를 담는 작은 상자를 놓아두는 벽장이 있었다. 성서를 낭독하거나 해석하는 사람이 올라가는 성서대도 있었다. 출구 맞은편 한쪽 끝에는 율법서와 예언서 두루마리를 담은 언약궤가 놓여 있었다. 언약궤 앞과 출구와 회중 맞은편에는 높은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옆쪽에는 어른들이 쓰는 큰 공부방, 때로는 공부방과 합쳐지기도 하는 교실, 그리고 잠깐 머무는 손님이 묵는 방이 하나씩 있었다.

 

회당은 민주적이고 자율적으로 관리되고 유지되었다. 회당은 원로들 가운데서 뽑힌 행정관인 회당장이 관리했고(루가8,41) 의회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행정관은 전례를 체계적으로 관리했고, 성서 낭독자들을 지정했으며, 성서를 해석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초빙하기도 했다(루가 4,16-20).

 

사람들은 매일 회당에 갈 수 있기는 했지만 예배는 우선적으로 안식일에 거행되었다. 사제의 역할은 단지 축복을 내리는 것이었지 사람들을 지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예배 참석자가 적어도 10명은 되어야 전례가 거행되었다.

 

유다인은 회당을 통해 민족의 동일성을 지켜왔다. 오늘날에도 외국을 여행하다 보면 유다인들이 안식일에 모여 함께 경건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앙은 개인보다는 공동체 안에서 싹트고 발전하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회당은 말씀과 기도가 중심이 되었던 공동체라는 점이다.

 

[평화신문, 2003년 3월 16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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