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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진리를 외면한 빌라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3 조회수4,096 추천수1

[성서의 인물] 진리를 외면한 빌라도

 

 

빌라도는 예수님 시대에 유대를 통치하기 위해 로마 정부가 파견한 총독이었다. 식민지 정책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로마는 유대인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종교에 대한 자치권을 인정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사형권한과 집행권 등 중요한 권한은 여전히 총독에게만 있었다. 총독의 가장 큰 역할은 당연히 반란 없이 식민지를 잘 통치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대사제 가야파는 예수를 체포하여 빌라도에게 재판을 하도록 데려왔다. 빌라도는 솔직히 예수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간간이 들리는 소문 때문에 호기심은 없지 않았다. 빌라도는 귀찮았지만 대사제의 요청이므로 어쩔 수 없이 재판을 맡았다. 빌라도는 로마 총독이란 막강한 지위로 유대를 다스렸지만 골치 아픈 종교문제에는 별로 관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로마 통치에도 불구하고 유대를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세력은 유대교 지도자들이었다.

 

예수를 빌라도의 법정에 넘긴 의회의원들과 율법학자, 대사제를 대동하고 뒤따랐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풍속에 외국인의 집에 들어가면 이레 동안 몸이 더러워진다는 관습 때문에 빌라도 총독의 집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기다렸다. 빌라도 앞에 끌려온 예수는 밤샘 심문으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예수는 품위가 있어 보였다. 빌라도는 귀찮은 듯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이 사람이 무슨 죄가 있기에 재판을 해달라는 거요? 당신들에게도 최고 의회가 있지 않소? 거시서 당신들의 율법에 따라 재판하면 되는 것 아니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우리에게는 죄인을 십자가형에 처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죄인은 꼭 십자가형에 처해야 할 죄인입니다. 지금까지 백성을 혼란에 빠뜨리고 심지어 세금도 바치지 말라고 선동했습니다." 하며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빌라도는 예수를 조심스럽게 심문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 말처럼, 당신이 그런 죄를 지었소? 그리고 당신이 유대의 왕이요?"

 

그러나 예수께서는 일언반구도 대꾸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예수께서 간단히 대답했다. "내 왕국은 이 세상이 아니오. 나는 하늘나라를 위해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진리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오."

 

빌라도는 예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하게 로마의 실정법을 거스른 확증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 동안 유대인들의 독립투쟁을 비롯해 종교문제를 많이 다루었지만 이번처럼 애매한 사건은 처음이었다.

 

빌라도는 전혀 예수를 처형할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빌라도는 은근히 예수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이런 빌라도의 마음을 눈치 챈 유대의 종교지도자들도 압력을 은근히 행사했다. "만약 총독께서 예수를 풀어 준다면 우리는 당신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총독의 행동을 로마 황제에게 항의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자신을 왕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로마 황제의 반역자 입니다. 그런데도 그를 풀어 준다면 그건 직무유기 아니겠소?"

 

"말조심하시오? 직무유기라니…" 화가 난 빌라도는 베란다에 나갔다. 밖에서는 군중들의 거센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시오." "어서 죽이시오." 예수를 석방할 경우 군중들은 소요라도 일으킬 태세였다.

 

빌라도에게는 무엇보다 군중들이 시끄러우면 좋을 게 없었다.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앙 정부에 무능한 총독으로 비춰질 수도 있고 결국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 없었다. 빌라도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도대체 왜 죄 없는 이 사람을 죽이려 하는지 알 수가 없네.'

 

빌라도는 진퇴양난이었다. 총독의 기본 임무는 로마제국의 통치 기반에 저항하는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아무리 조사를 해도 예수에게 로마법에 의해 사형을 처할 죄목을 찾을 수는 없었다. 빌라도도 양심적으로는 무고한 사람을 쉽게 죽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가 로마 황제의 적이라고 고발하며 당장 죽이라고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빌라도는 마침내 경비병을 시켜 물 한 대야를 뜨다 유대인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씻었다. 그는 자신은 이 사건과 관계 없음을 시사한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를 사형에 처하도록 내어 주었다.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권리나 지위, 능력을 기피할 때 종종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있다. 빌라도는 진리에는 관심 없고 자신의 자리만을 보존하려는 정치가로 양심을 거슬러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판단하고 행동했다. 세상에서는 보편적인 처세 방법이다. 빌라도는 지도자가 자기자리에서 올바르게 처신하지 못하고 불의를 보고도 못 본체 할 때 얼마나 많은 이에게 고통을 안겨주는지를 보여주었다.

 

불의를 보고 침묵하면서 역사의식 없이 보신주의에 몸을 맡겼던 빌라도는 오늘날에도 도처에서 발견된다. 인간의 역사가 불행해지는 건 승리는 성공이요, 실패는 죄가 된다는 잘못된 사고에 빠져있는 이들이 많을 때이다.

 

[평화신문, 2001년 10월 28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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