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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아가, 노래들의 노래6: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아가 2,14)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3 조회수3,152 추천수0

아가, 노래들의 노래 (6)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아가 2,14)

 

 

사랑을 하고 싶습니까? 그 사랑에 따라오는 모든 위험까지 감수하겠습니까? 아니면 차라리 안전하게 내 안에 머무르고 말기를 선택하겠습니까?

 

아가 2,8-17의 노래는 이러한 사랑의 충동과 망설임이 엇갈리는 마음을 보여 줍니다. 담장 안에 머물러 있던 여인은 밖에서 부르는 연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점차 마음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3,1-4에 이르면 이 여인은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 붙잡고 놓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내 연인의 소리!”(2,8)

 

1,2-2,7이 서문이라면 사랑 이야기는 이제 비로소 시작됩니다. 서로 떨어져 있는 두 연인은 5,1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점점 가까워집니다. 그런데 그 첫 단락인 2,8-14을 두 연인이 주고받는 대화로, 연극 대사처럼 읽으면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두 사람의 말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2장에서 연인(남자)은 직접 등장하지 않고 그의 말은 모두 여인의 입을 통해 전달되고 있습니다. 초점은 연인이 찾아왔다는 데에 있지 않고 그 목소리를 들었던 여인에게 있으며, 모든 일이 여인의 마음 안에서 펼쳐집니다.

 

여인은 아직 자기 집 안에 있습니다. 사랑을 하러 밖으로 나가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연인의 소리를 듣습니다. 사랑이 다가옴을 감지합니다. 그가 담장 앞에서 기웃거리고 들여다보는 것도, 자기를 불러내려고 하는 것도 느낍니다. 방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밖에서 어떤 이가 문틈으로 기웃거리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여인이 그 소리를 듣는 것은 그만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2,11). 이스라엘에서는 겨울에 비가 내립니다. 비가 멈추면 이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계절이 됩니다.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멧비둘기 소리가 들려오며, 무화과나무가 이른 열매를 맺고 포도나무 꽃송이들이 향기를 내뿜는 것(2,12-13 참조)은 한창 때가 무르익었음을 나타냅니다.

 

사랑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그래서 아가에서는 어떤 달력이나 사회적 관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이 살아나는 때가 사랑의 때라고 말합니다. 서문에서도 연인들의 집 들보는 향백나무이며, 서까래는 전나무이고, 그들의 잠자리는 푸르다고 했습니다(1,16-17 참조). 여인의 집 담장 밖에서 집 안에 있는 여인을 부를 수 있는 것, 그리고 여인이 그 소리를 듣는 것은 때가 무르익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가 안 되었는데 사랑을 강요하는 것은 움이 트지 않은 나무에 억지로 꽃을 피우려는 폭력입니다. 연인은 어쩌면 겨우내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이제 때가 되었다고 여인에게 속삭입니다.

 

 

“일어나오”(2,13)

 

그러나 사랑은 하나의 모험입니다. 가만히 집 안에 앉아 사랑을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연인은 “일어나오”, “이리 와 주오”(2,13)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오다’로 번역된 단어는 본래 ‘가다’를 뜻하고(동사 hlk), 일어나 간다는 것은 여인이 지금까지의 삶에서 떠나는 것을 뜻합니다. 창세기에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2,24) 아내와 결합한다고 말하지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난다는 것은 물리적 의미에서 혼인하여 부모 집을 떠나는 것만이 아니라 내 삶을 바꾸어 놓는 것, 더 근본적으로 ‘나’를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딸을 시집보내는 어머니가 기쁜 날인데도 슬퍼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제가 만났던 어떤 분은 다른 사람이 딸을 보내는 것만 봐도 눈물이 난다고 하셨습니다. 고이 기른 딸을 주는 것이 너무 아깝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삶의 중심을 옮겨 놓으라고 요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목소리가 부를 때에는 내가 지금까지 ‘집’이라고 여겨 온 곳을 떠나야 합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의 중심이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원하는 것을 찾게 합니다. 사랑은 때로 나를 죽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랑만큼 ‘나’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요? 그냥 집 안에 머무른 것이 나을까요? ‘집’은 ‘오빠들’이 있는 장소입니다. 오빠들은 사랑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빠들이 누이의 사랑을 가로막으려 한 것은 누이를 보호하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안전과 사랑은 함께 갈 수 없는 것일까요?

 

이것은 남녀의 사랑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38)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궁극적으로 “제 목숨을 잃는”(마태 10,39) 것까지 요구합니다.

 

사랑을 믿을 때 비로소 떠날 수 있습니다. 이 모험은 아브라함의 모험에 비교되곤 합니다. 아가 본문에서 “이리 와 주오”라고 번역된 동사가, 창세 12,1에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거라”고 하실 때와 동일하게 사용되기 때문입니다(창세기에서는 남성형이고 아가에서는 여성형이지만, 두 경우 모두 이해의 여격과 결합된 드문 형태가 나타납니다). 이렇게 “가거라”고 말씀하셨을 때, 75세나 되었던 아브라함은 약속해 주시는 분을 믿었기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히브 11,8).

 

유다교의 전통 해석에서는 아가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이루어진 사랑의 역사를 보여 준다고 생각하는데, 그 첫 시기가 신랑이신 하느님께서 신부인 이스라엘을 불러내시는 시기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관계에서도 이스라엘은 여러 차례 하느님을 믿고 ‘일어나서 나가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칼데아 우르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이 그랬고, 이집트 땅에서 4대를 살았던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호세아서에서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여 이집트에서 불러내셨다고 말하지요(호세 11,1 참조).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가리켜 ‘종살이하던 집’이라고 하면서도, 광야의 거친 음식에 지쳐서는 이집트 땅에서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탈출 16,3) 때를 그리워했습니다. 사랑을 믿고 떠나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미래를 계획할 수 없습니다. 그 미래가 “내가 사랑하는 이”(3,1)의 손에 맡겨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내 남편!”(호세 2,18)이라 부르게 될 때, 사도 바오로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갈라 2,20) 분이라고 고백하게 될 때,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고(갈라 2,20 참조)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서 돌아오셔요”(2,17)

 

여인은 사랑의 상징인 ‘비둘기’이지만 ‘바위틈’에, ‘벼랑 속’에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2,14 참조). 사랑의 때가 되었으나 모험을 두려워하고 있어, 다른 사람(또는 사랑)이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숨어 있습니다. 그러던 여인이 자기를 부르는 사랑의 목소리에 용기를 내어 응답합니다. “나의 연인은 나의 것, 나는 그이의 것”(2,16)이기에, 나를 완전히 내어 주려 하니 “날이 서늘해지고 그림자들이 달아나기 전에”(2,17), 저녁이 되기 전에 자신에게 오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모험이 삶을 뒤흔들어 놓고 미래를 불안하게 만들며 ‘나’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지라도,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마태 10,39)을 감지한 것일까요? “일어나오”(2,13). 히브리어 ‘쿠미(qumi)’에서 ‘탈리타 쿰!’(마르 5,41)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 명령이 떠오릅니다.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마르 5,41). 그 말씀에 응답한 소녀는 죽음에서 살아납니다.

 

처음 질문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사랑하고 싶습니까? 그 사랑에 따라오는 모든 위험까지 감수하겠습니까? 부활을 믿는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 모험을 할 수 있습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성 도미니코 말씀의 은사》,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2년 6월호(통권 435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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